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30화 (230/528)

〈 230화 〉 [229화] Beyond the Scene

* * *

[본 시스템은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갱생의 여지가 있는 수감자에게 주어지는 특별 절차입니다.]

[당신은 과거로 가 죄의 근원이 되는 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시스템의 관리하에 있으며, 시스템이 허락하는 시간 내에서 당신의 과거를 바꿀 수 있습니다.]

[네. 가차랜드에서 보낸 시간 안에서만 말이죠.]

...

도미닉 경은 마치 몸이 붕 뜨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헤엄을 치거나, 구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지럽군."

도미닉 경은 방향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간 속에서 어지러움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토를 할 것 같은 기분에, 도미닉 경은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도미닉 경의 기도가 통했는지, 도미닉 경은 이내 그 기묘한 공간을 지나 그나마 현실적인 공간으로 돌아왔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환풍구에서 도미닉 경이 굴러떨어졌다.

소리에서 알 수 있듯 바닥은 얇은 금속 재질이었는데, 도미닉 경이 떨어진 충격으로 약간 찌그러진 상태였다.

도미닉 경은 곧바로 일어나 주변을 살폈는데, 도미닉 경이 있는 곳은 얇은 금속판으로 된 임시 통로처럼 보였다.

건물 외부에 있는 비상용 계단이나 비상용 사다리와 비슷한 재질이었다.

그 통로는 빛을 흡수하는 검은 벽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는데, 그 넓이가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도미닉 경은 통로를 좀 더 자세히 보았다.

낡고 녹슨 통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철사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그 흔들거림에 따라 저 아래가 슬쩍슬쩍 보였다.

그 아래를 우연히 보게 된 도미닉 경은 기겁하며 뒤로 넘어졌다.

"무저갱인가?"

도미닉 경은 방금 전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통로의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 아슬아슬한 통로의 아래는 수천 미터의 무저갱이 있었는데, 지독할 정도로 짙은 안개로 인해 정확한 깊이는 알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은 이후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늘도 수백 미터는 될 법한 높이의 검은 벽이 나란히 서 있어 하늘이 실선으로 보일 정도였다.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유물이라더니 왜 나를 여기로 보냈단 말인가?"

도미닉 경은 멍하게 이 장소를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 아무 방향으로나 나아갔다.

일단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현재 도미닉 경은 외부에 연락을 할 수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일단 연락 수단을 찾을 때까진 움직이기로 했다.

도미닉 경은 빛을 흡수하는 검은 재질의 벽을 한 손으로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낡고 녹슨 임시 통로가 굵은 철사에 매달려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었을까?

도미닉 경은 문득 저 위에 실선처럼 보이는 하늘이 붉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긴 도미닉 경은, 놀랍게도 사람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뭐야. 오늘 당직은 나뿐인데?"

"사람...이구려."

도미닉 경은 잠시 눈앞에 있는 이가 사람인지 고민했다.

그는 뼈 밖에 없는 깡 마른 몸과 죽은 고등어처럼 퀭한눈을 가지고 있어 마치 언데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곧 그가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목이 늘어난 꼬질꼬질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그 옷에는 형광색의 에너지 드링크 얼룩과 피자 소스 얼룩이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도미닉 경은 그의 모습을 통해 그가 코더 중 하나임을 확신했다.

그것도 야근을 오랫동안 한 코더라는 것을.

"코더로군."

"...넌 코더가 아니군. 길을 잃었나? 말동무라도 해 줘."

코더가 앞뒤 문맥이 어색한 말을 내뱉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과 제대로 대화해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왔소."

도미닉 경은 다짜고짜 본론을 말했다.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경비로 일하면서 이런 코더들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걸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뭐야. 길을 잃은 게 아니군. 아니지. 길을 잃긴 했지."

코더가 주머니에서 발톱 자국이 난 소가 그려진 음료수 캔을 꺼내 들었다.

그의 얼굴보다도 긴 캔의 내용물을 한 호흡에 마셔버린 그가 입가에 흐르는 형광색의 액체를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따라와. 내가 당직이라 다행이야. 난 이 분야에서 최고니까. 서버 관리나 시키고 말이야."

코더는 이내 음료수 캔을 무저갱으로 던져 버리고는, 랜턴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천천히 멀어지는 코더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잠시만. 여기서 확인할 게 좀 있어. 나도 일은 해야지."

코더가 통로의 펜스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상체는 거의 떨어질 듯 기울어졌는데, 보고 있는 도미닉 경이 기겁할 정도였다.

그러나 코더는 익숙하다는 듯 불안불안한 자세로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여기가 바로 서버에 전력 공급하는 곳이거든. 여기가 나가면 약 17초 동안 가차랜드가 사라져. 17초인 이유는, 예비 전원이 가동되는 시간이야."

코더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저 아래 무저갱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굵은 선이 있었는데, 아주 멀어 선으로 보이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수백 미터 굵기였다.

"전원은 안전해. 가차랜드는 안전해. 자, 이제 가자. 다음으로."

코더가 실실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는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으나,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히죽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여기에 사람이 온 건 진짜 오랜만이거든. 야근은 사람이 할 일이 못 돼. 이제 1738시간만 더 일하면 교대라지만, 여긴 밤이 너무 길어. 허깨비가 아닌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주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야."

그렇게 말한 코더는, 이내 다시금 한 곳에 멈춰 섰다.

"여기야. 도미닉 경. 아,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하지 마. 방금 전 서버가 나에게 알려 줬거든. 얘는 소심해서 나에게만 속삭여."

"서버?"

"얘 말이야."

코더가 검은 벽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이 안에는 가차랜드의 모든 것이 들어 있어. 0과 1, ON과 OFF, True와 False의 형식으로 말이야. 지금도 내게 말하잖아. '... ­­­ ... ... ­­­ ... .... . .­.. .­­. .... .. ­­ .­­. .­.. ­­..'라고."

이건 더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지. 항상 내 귓가에 들리거든. 하고 말한 코더.

도미닉 경은 코더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그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진지하게 저 코더가 과도한 야근으로 미쳐 버린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닥쳐. 난 아직 멀쩡해, 서버. 아직 10만 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코더의 혼잣말을 들은 도미닉 경은 좀 더 진지하게 그가 미쳐 버렸다고 결론을 내릴 뻔했다.

"아무튼 여기가 바로 과거를 바꾸는 곳이지. 정확하게는 이미 기록된 Log를 덧씌우는 것뿐이지만..."

그건 내가 가장 잘하는 특기지. 라고 말한 코더가 검은 벽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틈 하나 없어 보이던 검은 벽이 열리며 그 내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문득 서늘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아, 미안. 서버는 열이 많아서 항상 과냉각 상태를 유지해야 하거든. 좀 추울 거야."

도미닉 경의 상태를 알아차렸는지 코더가 도미닉 경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끝낸다며 서버의 열린 부분을 향해 난간을 밟고 폴짝 뛰어넘은 코더는, 이내 무언가를 들고 다시 임시 통로로 넘어왔다.

한 손으로 난간을 잡으려다가 순간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사건이 있었으나, 코더는 별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난간을 기어올랐다.

"자. 이거야. 이게 바로 도미닉 경, 당신의 과거. 당신의 누명이 바로 여기에 있어."

도미닉 경이 코더가 건네주는 무언가를 받았다.

그건 플로피 디스크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는데, 도미닉 경이 받아들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도미닉 경이 코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코더는 몸짓과 함께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미리 보기는 플로피 디스크 가운데에 있는 구멍을 통해 엿보면 돼. 그 과거를 그냥 지우려면 당장 저 아래로 던지면 되고, 고쳐쓰려면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 그럼 모든 것이 끝나."

코더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건 덧쓰는 거지. 이런 기회가 흔한 건 아니거든. 보통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 이벤트야."

별로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코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코더가 다시금 열려 있던 검은 벽을 매만지자, 다시금 검은 벽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틈새 하나 없는 매끈한 모습으로.

도미닉 경은 잠깐 플로피 디스크를 매만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도미닉 경이, 그 플로피 디스크를 관자놀이에 집어넣었다.

"좋은 결정이야."

코더가 싱글싱글 웃으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타임 패러독스 같은 건 걱정하지마. 언제나 백업 파일은 존재하니까. 그러니까­"

코더는 도미닉 경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이 사라진다는 말은, 곧 도미닉 경의 과거가 바뀌어 이 자리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또 허깨비를 본 건가."

코더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공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차랜드를 지탱하는 이 거대한 서버에는 오늘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야근하는 코더 하나를 제외하고.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