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28화]던전 클리어
* * *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학살자 왕의 방의 비밀 문이 열렸다.
아마 저기가 이 던전의 끝,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검이 있는 곳이이라.
도미닉 경은 마침내 드러난 비밀 공간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학살자 왕을 바라보았다.
학살자 왕은 환한 미소를 짓는 메리를 바라본 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학살자 왕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거겠지.
비밀의 문이 열린 것도 그 사라진 의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이건 도대체..."
비밀의 문만 열린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던전이 우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천장에서 돌 조각과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던전은 붕괴할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던전 클리어 판정이야."
메리가 도미닉 경을 향해 말했다.
"비밀의 방이 열리는 때는 지하 1층의 최종 보스, 학살자 왕을 이긴 이후야. 그리고 학살자 왕을 이겼다는 말은, 이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뜻이지."
메리가 이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이 던전은 무너지고,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올 거야."
그게 더 싸게 먹히거든.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메리는 이내 비밀 통로를 가리키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이제 저곳으로 들어가. 그럼 과거를 바꾸는 칼이 나올 거야. 그러기 위해서 여기 온 거잖아."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는 거요?"
도미닉 경이 점점 더 크게 흔들리는 바닥 위에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말했다.
"던전이 무너진다면, 당신도 무사하지 않을 텐데."
"어차피 가차랜드에서 죽음은 의미가 없잖아."
"아."
도미닉 경은 메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차랜드에 제법 적응한 도미닉 경이었지만, 가끔은 이렇게 몇몇 사실을 까먹곤 했다.
"아무튼, 빨리 클리어 해. 어설프게 어쩌지라고 생각하는 거 보다, 그냥 클리어 해 버리는 것이 더 내게 도움이 되니까."
메리가 그렇게 말하며 도미닉 경을 비밀 공간으로 밀어 버렸다.
도미닉 경은 갑작스러운 타이밍에 밀쳐지는 바람에 흔들리는 바닥의 여파로 균형을 잃고 비밀 공간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도미닉 경은 문 너머, 균열이 일어나고 무너지기 시작한 던전을 바라보았다.
"잘 가. 이제 여기선 볼일 없겠지만"
메리가 도미닉 경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 뒤로 몇 마디의 말이 더 있었던 것 같지만, 던전이 무너지는 소음과 둘 사이를 갈라놓은 돌덩이와 흙먼지로 인해 도미닉 경은 뒷말을 듣지 못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어둠 속에 갇혔다.
...
도미닉 경은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치 3층에서 보았던 판자로 가려진 검은 장소나 2층에 있었던 창고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도미닉 경의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이번엔 갑자기 불빛이 번쩍하더니 어느 한 군데에 조명이 비춰졌다.
도미닉 경은 겨우 어둠에 적응한 시야가 갑자기 나타난 빛에 다시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찌푸렸다.
다시금 시야가 빛에 적응하자, 도미닉 경은 조명 아래에 있는 물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자루와 날이 반대인 검이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저게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검인 것 같았다.
도미닉 경은 멍하게 홀린 것처럼 그 검에 다가 갔다.
그리고 검을 들어 올리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과거를 바꾸시겠습니까? Y/N]
다른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저 설명이 전부인 시스템 창.
도미닉 경은 잠시 검을 든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은 아마도 도미닉 경이 이 비밀 공간으로 들어온 문이 있는 방향이었는데, 도미닉 경의 시선은 그 문 너머에 있을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어딘가를 바라보던 도미닉 경은, 이내 다시 시스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Y를 눌렀다.
원인과 결과가 없이, 도미닉 경의 심장에 뭉툭한 검신이 틀어박혔다.
그 어떤 고통도 상처도 없이,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검은 여전히 사용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
"저기, 있잖아."
절반 이상 무너져 내린 던전의 지하에서, 메리가 멍하게 서 있는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뭔가."
학살자 왕은 메리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듯 대답했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던전에는 전혀 미련이 없는 듯, 학살자 왕은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맞으며 자리에 앉았다.
"방금 전에 내가 역겹다고 한 건 미안."
메리가 학살자 왕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멀쩡한 초상화들을 유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여긴 처음 와보네."
메리가 과거 인간이던 시절의 초상화를 보았다.
아직 데뷔탕트하기도 전, 12살 쯤의 모습인 것 같았다.
초상화 속 어린아이는 천사같이 귀여웠다.
스스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 그랬다.
메리는 다음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거미의 모습을 하는 메리였는데, 아마 저주 초창기 때인 것 같았다.
그 초상화 속 메리는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던전의 흔들림으로 인해 덧칠한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환하게 웃고 있던 모습은 곧 절규하고 절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메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아니, 취소. 기분 나빠. 역겨워. 더러워."
"오해다."
학살자 왕은 우물쭈물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몰라 다시 입을 다물었다.
차마 메리의 슬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덧그렸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메리는 그 이후에도 다양한 초상화와 인형들을 바라보았다.
잠깐은 머리 위로 자잘한 돌가루들이 떨어져 내렸으나, 메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돌가루와 돌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메리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엔 학살자 왕이 있었다.
드래곤 가죽으로 된 망토를 들어, 메리의 머리 위를 가려주면서.
"...뭐야."
메리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혐오를 멈추지 않았다.
메리에게 있어서 학살자 왕은
학살자 왕은
메리는 순간 그다음에 올 말을 잊었다.
내가 학살자 왕을 왜 싫어했더라?
메리가 멍하게 학살자 왕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메리가 학살자 왕을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납치?
세상의 멸망에서 메리를 구해주려는 의도였다.
저주?
가차랜드에 오면서 생긴 것일 뿐, 학살자 왕과는 관련이 없었다.
본능적인 혐오?
그건 옛 차원의 굴레가 제멋대로 정한 설정이었다.
가차랜드에서는 더 이상 작동하지도 않는, 버그 덩어리 굴레.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메리는, 마침내 깨달았다.
메리는 더 이상 학살자 왕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실은 아주 예전부터 이미 학살자 왕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 상태였다.
이 지루한 시간 동안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던 메리의 무의식이 과거의 증오를 데려와 멋대로 만들어낸 새로운 굴레일 뿐이었다.
메리는 다시 학살자 왕을 바라보았다.
뜻밖에 잘생긴 것 같기도 하고.
물론 투구에 가려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메리는 분위기상 그런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왜 그리 빤히 보지?"
학살자 왕이 메리의 시선을 의문스럽게 쳐다보았다.
메리는 그 시선에 다급하게 눈을 초상화를 향해 옮겼다.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거미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이 반반인 초상화.
머리에는 화관이 있어 화사한 느낌을 주던 그림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떨어진 커다란 바위가 학살자 왕의 어깨 갑주를 치고 벽에 부딪쳤다.
방금 전까지 걸려 있던 초상화 중 일부가 바위에 찢겨져나가 더 이상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아깝네. 꽤 잘 그린 그림이었잖아."
메리가 아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괜찮다. 모든 것은 머릿속에 있으니."
"와 세상에."
학살자 왕의 말에 메리가 닭살이 돋는다는 듯 가느다란 팔을 마구 문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 자신은 학살자 왕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 그의 나이, 그의 성격, 그 모든 것을.
그리고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학살자 왕 당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네."
"뭐라고?"
학살자 왕이 메리에게 되물었다.
사실 메리는 학살자 왕의 망토 아래에 있어서 몰랐으나, 이미 던전은 거의 붕괴되어 학살자 왕의 위로 수십 미터는 되는 잔해가 쌓인 상태였다.
"아냐."
메리가 환하게 웃으며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다음 회차에선, 당신에 대해서 좀 알아볼까 하고."
"그건"
쿵. 하고 떨어진 바위가 모든 것을 차단했다.
던전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재생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이 처음 이 던전에 온 그 모습 그대로.
...
던전이 무너지기 시작한 그때, 6층에 있던 마법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 살려 줘..."
마법사는 끔찍하게도, 온몸으로 검은 피를 콸콸 쏟아 내며 땅에 쓰러져 있었다.
이미 외부 차원의 마족을 끌어들인 탓에 엉망이 된 몸은 마족이 추방되며 생긴 반작용으로 심각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스스로 치료하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마법사는, 이내 던전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떨어진 날카로운 돌조각에 찔려 움직이지도 못하게 고정되어 버린 것이다.
"이, 이럴 순 없어... 양산박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인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죽을 수는..."
마법사는 간신히 힘을 끌어모아 회복 주문을 읇조렸지만, 던전의 흔들림은 계속해서 주문 시전을 방해했다.
"안 돼... 살아야 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법사는 삶에 대한 의욕을 가득 불태웠다.
가차랜드에서 왜 이렇게 삶에 집착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법사는 양산박 출신이었고, 법에 명시된 온갖 범죄는 물론, 차마 언급할 수도, 눈으로 볼 수도, 들을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일들을 자행한 마녀였다.
물론 살아 있을 때에는 그녀의 두꺼운 화장만큼이나 그 죄악을 잘 숨기고 다녔지만, 죽은 뒤 중앙 시스템이 그녀의 로그를 본다면 그녀는 그대로 추방당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는 죽을 수 없었다.
가차랜드에 쌓아 올린 온갖 불법적인 부와 명예를 차마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마법사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오른 것은.
[현재 던전의 스토리 라인 중 일부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17명의 작가를 동원해 임시 시나리오를 제작 중입니다!]
[여기 좋은 대체제가 있군요! 던전의 장르를 로그라이크가 아니라 로맨스로 바꿔야하나 고민하던 모태 솔로 출신 작가들이 안도합니다!]
[당신은... 범죄자로군요. 그래요. 던전이니 당연한 건가?]
[아무튼, 그래도 당신에게 제안은 하겠습니다. 우린 인도적인 이들이니까요.]
[지금, 이 시간에 묶일 의향이 있습니까? [Y/N]]
마법사는 눈앞에 떠오르는 창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사는 마음을 굳힌 듯, 제대로 들어 올려지지도 않는 팔을 들어 시스템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하나의 죄인의 죄가 사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새로운 죄인이 자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