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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28화 (228/528)

〈 228화 〉 [227화]세상에서 가장 정적인 전쟁

* * *

도미닉 경은 B2에 있던 폰을 두 칸 전진시켰다.

체스는 두뇌와 논리, 그리고 전략의 싸움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눈앞의 체스 경기를 바라보며, 가차랜드의 체스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가차랜드의 체스는 지식과 지혜, 논리, 전술의 싸움이었다.

누군가가 도미닉 경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면 어이가 없다는 투로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도대체 두 문장의 차이가 뭐냐고.

물론,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차이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가차랜드의 체스를 들여다본다면, 그 차이점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수로군."

학살자 왕이 팔짱을 낀 채 G8에 있던 나이트를 H6로 움직였다.

아니, 말이 스스로 움직였다.

이윽고 도미닉 경이 채 다른 말을 움직이기도 전에 C1에 있던 비숍이 제멋대로 A3로 이동했다.

여러분은 여기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는가?

가차랜드의 체스가 가진 특별함을 알아차렸는가?

"...이걸 체스 경기라고 해도 좋을 지 모르겠소."

"훌륭한 경기지."

학살자 왕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체스 말들을 내려다보았다.

퀸이 폰을 잡고 비숍에게 잡아먹힌다.

나이트가 제멋대로 상대방의 킹 앞에 들어가 왕의 제물이 된다.

폰은 앞길을 막는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끝까지 도달해 갑자기 비숍으로 진급했으며, 룩은 제멋대로 왕과 캐슬링을 시도하다가 폰에게 잡아먹혔다.

그야말로 초보자들도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만한 엉망진창인 경기!

도미닉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차랜드의 체스는 페럴란트의 체스처럼 상대의 수를 확인하고 다음 수를 놓는 방식이 아니었다.

페럴란트 식이었더라면 방금 전까지 무승부로 끝난 12번의 경기 중 7번은 도미닉 경의 체크메이트로 끝났으리라.

물론 나머지 5번의 경기도 도미닉 경에게 유리한 무승부로 끝났을 테고.

그러나 가차랜드의 체스는... 참으로 제멋대로였다.

"어째서 한숨을 내쉬는 거지?"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경기는 순식간에 다시 무승부가 되어 모든 기물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너는 훌륭한 체스 플레이어다. 이 학살자 왕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니."

학살자 왕이 호적수를 만나 기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찬사에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이거, 자동이잖소. 지능 수치와 지혜 수치, 그리고 [논리] 특성이나 [전략] 특성의 영향을 받는."

그렇다.

가차랜드의 체스는 말 그대로 서로의 지능과 지혜, 논리와 전략이 부딪치는 게임.

각자가 가진 지능과 지혜 스탯의 영향을 받아 체스판의 기물들이 더 똑똑하게 움직였고, 논리와 전략 특성을 통해 몇 수 앞을 예측하고 움직였다.

그런 자동 체스에서 이렇게나 엉망진창이라는 말은, 서로의 지능과 지혜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라는 뜻과 동일했다.

이것이 바로 학살자 왕의 찬사에도 도미닉 경이 기뻐할 수 없는 이유였다.

도미닉 경의 지능 스탯과 지혜 스탯이 이토록 처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미닉 경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경기는 16번째 무승부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즐겁군. 내 부하들은 모두 체스를 못 해서 말이지. 항상 3수 내로 내가 이길 뿐이었다."

"그렇다면 당신 부하들은 모두 머리가 텅텅 비었거나, 혹은 접대 체스를 뒀겠구려. 이런 엉망인 체스는 처음 보오."

도미닉 경이 신랄하게 학살자 왕에게 말을 내뱉었다.

물론, 도미닉 경은 무려 두 가지의 가설을 제시했으나, 분명히 후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여기서 최고의 체스 플레이어라는 건 변함이 없지."

학살자 왕이 묘하게 흥분한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무려 17만 2223번의 경기를 치렀으니 말이다."

학살자 왕이 묘하게 뿌듯해하는 동안, 경기는 22번째 무승부를 기록했다.

"...우리 대화나 좀 하는 것이 어떻겠소."

도미닉 경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체스 경기에서 눈을 돌려 학살자 왕을 올려다보았다.

학살자 왕은 도미닉 경보다 한참 컸기에, 앉은 키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도미닉 경의 뒷목이 아플 정도였다.

"그거 좋지."

학살자 왕이 여전히 체스판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방금 도미닉 경의 룩이 학살자 왕의 폰을 잡아내자, 체스판은 자동으로 도미닉 경의 수를 무르고 폰을 제멋대로 되살려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수 전에 두어진 퀸을 되돌리더니, 이내 그 퀸으로 도미닉 경의 룩을 잡았다.

그것으로 경기는 무승부가 되고, 24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평화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만이던지. 무슨 이야기가 좋겠나?"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되물었다.

학살자 왕은 평소에 대화라고 해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지하까지 쳐들어온 침입자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 정도가 전부였기에, 제대로 대화하는 법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학살자 왕은 스스로 대화를 주도하는 것보다, 도미닉 경에게 주도권을 넘긴 것이다.

"메리 공주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소."

움찔. 하고 학살자 왕의 몸이 흔들렸다.

심리적 동요가 제법 컸던지, 외부에 표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만큼 학살자 왕에게 있어서 메리 공주는...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학살자 왕의 방에 걸린 수많은 메리의 초상화만 해도 그가 얼마나 메리를 좋아하는지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도미닉 경은 학살자 왕에게 날카롭게 질문할 수 있었다.

단순히, 학살자 왕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학살자 왕의 동요가 그대로 체스판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물들이 갈 곳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제한 시간이 지나기 직전에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메리 공주라."

"그렇소. 유모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용사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더군."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학살자 왕의 안광이 흔들렸다.

"용사가 사라지고 나자, 당신은 메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들었소."

"조금은 다르지만, 전체적으론 틀린 말은 아니군."

학살자 왕의 손가락이 일정한 박자로 무릎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연민이 아니오?"

"..."

도미닉 경의 말에 학살자 왕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도미닉 경은 여전히 학살자 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학살자 왕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 재촉하듯 말이다.

"글쎄. 연민이라."

체스판 위의 기물들이 제멋대로 쓰러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학살자 왕의 복잡한 심리 상태 만큼이나, 체스판 위의 말들도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학살자 왕이 팔짱을 풀고 쓰러진 킹을 다시 세웠다.

마치 혼란스러운 마음에 기준점을 세우려는 듯.

"하지만 연민으로 시작된 감정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은 사랑이다."

학살자 왕이 힘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로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내가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했으니, 이는 사랑이다. 뒤틀린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 아니. 그 어떤 수식어도 필요 없다. 이건 그저 사랑이다. 내가 그리 정했다."

도미닉 경은 말없이 학살자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학살자 왕의 기물들은 도미닉 경의 킹 앞에 그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체크. 날 감히 흔들려고 한 시도는 좋았다, 도미닉 경. 그러나 그 정도예 흔들릴 내가 아니다."

...이거 분위기 안 좋은데.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를 위해 내민 도박수가, 그 양날의 검이 도미닉 경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도미닉 경은 다급하게 눈을 굴려 체스판 위의 형세를 다시금 파악했다.

다행스럽게도 살아날 길은 몇 군데 있었다.

이후 움직임은 도미닉 경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겠지만, 적어도 무승부는 노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도미닉 경이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기물을 잡아채고 생각한 수를 두려고 할 때­

"...학살자 왕."

학살자 왕의 등 뒤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리?"

학살자 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여파로 체스판이 뒤집혔으나, 학살자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둠 뿐,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메리."

학살자 왕이 나지막이 메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문득 느껴진 기척을 따라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미의 모습을 한 메리는 얇은 거미줄에 거꾸로 매달려 학살자 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 있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줄은 몰랐네."

메리가 싱긋 웃으며 거미줄을 따라 땅으로 내려왔다.

"어디로 들어온 거야?"

"정문으로."

"...다시 잠그는 걸 깜빡했군."

학살자 왕이 실수했다는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나저나, 여긴 참... 기괴하네."

마침내 바닥에 여덟 개의 다리를 모두 내려놓은 메리가 학살자 왕의 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이렇게나 많다니 말이야."

메리는 학살자 왕의 방에 있는 초상화와 인형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어떤 곳에서 시선이 멈출 땐 역겨운 표정을 지었고, 어떤 곳에서 시선이 멈출 땐 과거를 회상하듯 미소 지었다.

마침내 방 전체를 다 확인한 메리는 그녀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역겨워."

학살자 왕은 그 자리에 굳어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이 메리의 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메리의 환한 미소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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