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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25화 (225/528)

〈 225화 〉 [224화]도미닉 경 VS 슬라톤 벡스 VS 학살자 왕

* * *

학살자 왕의 등장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하에서 나오지 않는 학살자 왕이었으나, 이례적으로 이 첨탑... 아니, 던전에 일어난 이상 현상을 알아차리고 지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이례적인 등장에 경비병들과 메이드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왕의 등장을 맞이했다.

"그래서."

학살자 왕이 오만하게 모든 것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가 이상 현상이지?"

"그것이..."

"그만."

유모 캐서린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다가가자, 학살자 왕은 손바닥을 펼쳐 캐서린의 발언을 막았다.

"지금 나는 매우 짜증이 난 상태다."

학살자 왕이 거대한 용 이빨 대검을 뽑아 어깨에 걸쳤다.

그그극. 하는 소리와 함께 검 끝이 천장을 긁었다.

그의 대검은 그만큼이나 거대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 것 같으니, 내 결론을 말하지."

쿵. 쿵. 하고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과 슬라톤 벡스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학살자 왕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위압감이 있었는데, 그 키가 거의 5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인간이 아니라 트롤이나 오우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얼굴을 덮은 검은 투구의 틈 사이로 사악한 푸른빛이 줄기줄기 솟아올랐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으나, 가까이서 보니 투구의 숨구멍으로 마치 브레스마냥 뜨거운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미닉 경과 대치하고 있던 슬라톤 벡스의 크기가 대략 도미닉 경의 열 배는 되었으니 정작 덩치는 슬라톤 벡스가 더 컸으나, 위압감으로 따지면 학살자 왕이 으뜸이었다.

마침내 도미닉 경과 슬라톤 벡스 앞에 선 학살자 왕은, 어깨에 멘 대검을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모든 침입자를 죽이면, 던전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전, 도미닉 경이 본능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학살자 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둘러진 그의 대검이 도미닉 경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다행인지 아닌지 대검은 도미닉 경의 깃털 세 가닥의 끝자락만을 베어내었다.

그러나 슬라톤 벡스는 운이 없었다.

휘둘러진 대검이 슬라톤 벡스의 문짝만 한 이빨들을 산산조각내며 슬라톤과 벡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팔 두 개가 베어진 채 허공에 떠오른 슬라톤 벡스의 윗부분과, 아래에서 깔끔한 단면을 드러낸 아랫부분이 다시 겹쳐졌다.

얼마나 깔끔하게 베어졌는지, 다시 겹쳐진 곳에 베인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베인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내 슬라톤 벡스의 윗부분이 스스륵 미끄러져 땅에 철퍽 떨어졌다.

"...놀랍군."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과 슬라톤 벡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미닉 경에 대해서 놀란 이유는 기습적인 일격을 피한 동물적인 감각 때문이었고, 슬라톤 벡스에게 놀란 이유는 그 놀라울 정도로 빠른 재생력 덕분이었다.

"빌어먹을!"

슬라톤 벡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모독적인 말을 내뱉었으나, 도미닉 경은 혐오 필터가 켜져 있기에 순화되어 들렸다.

슬라톤 벡스는 아랫 부분에 달린 팔들로 윗부분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금 철퍽 소리와 함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합쳐지자, 이번엔 그 틈새에서 이빨이 자라 서로 맞물렸다.

아마 단면이 너무 깔끔해 재생하는 동안 미끄러지지 않도록 맞물린 톱니바퀴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너는 누구인데 나를 방해하느냐?"

슬라톤 벡스가 학살자 왕을 보며 짖었다.

열 개의 입과 예순 여섯의 눈이 학살자 왕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너는 무엇이길래, 내 거처에서 난리를 치는가?"

"나는 슬­ 아니, 아니지.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군."

슬라톤 벡스가 하마터면 진명을 말할 뻔했다.

"그의 이름은 슬라톤 벡스요."

그러나 옆에 있던 도미닉 경이 슬라톤 벡스의 진명을 드러냈다.

"슬라톤 벡스?"

"윽!"

도미닉 경과 학살자 왕이 연속적으로 진명을 부르자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한 슬라톤 벡스.

학살자 왕은 그런 슬라톤 벡스에게 관심을 거뒀다.

약점이 확실한 만큼, 그다지 신경 쓸 존재는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대신 학살자 왕은 여기서 대면한 셋 중 가장 작은 이, 도미닉 경에게 말을 걸었다.

"내 대검을 피한 자여.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페럴란트...? 들어 본 적 없는지역이로군."

"그럴 거요. 내가 당신을 모르는 것처럼."

학살자 왕의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그리고 이내 광소를 터뜨리며 도미닉 경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과연 담이 센 자로다. 내 검을 피한 건 그저 운이 아니었던 건가. 그래. 그렇지. 내가 너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지 못할 수도 있지."

"당신은 혹시, 학살자 왕이오?"

"별명은 또 알고 있군. 신기하군, 신기해."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크게 관심을 가졌다.

"저 옆에서 뒹구는 것은 네 친구인가?"

"악연이오."

"이름을 알고 있는데도?"

"적을 알고 나를 알라고 했소.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으니, 적을 안다고 해서 이상할 것 있겠소?"

"과연. 암살자가 목표의 이름을 되뇌이는 것과 같은가?"

"그보다는 저주에 가깝소."

학살자 왕은 이 작은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과는 별개로, 학살자 왕은 침입자를 처치할 의무가 있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자로다. 마음 같아선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내 굴레가 너를 죽이라고 말하는구나."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소?"

"무엇인가?"

"당신을 처치하면,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자루와 검신이 바뀐 검을 얻을 수 있는 거요?"

"그것은 바로 내 방에 있다."

학살자 왕은 대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방으로 가기 위해선, 나를 처치해야만 하지. 늘 그랬듯이."

학살자 왕이 허리를 펴고 오만하게 도미닉 경을 내려다보았다.

"대답이 되었는가?"

"그렇소."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이제 널 죽이겠다."

학살자 왕이 고통에서 겨우 벗어낸 슬라톤 벡스에게 대검을 꽂아 넣으며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이를 잘 안다. 너는 분명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하겠지."

"카­악!"

슬라톤 벡스가 다시 고통에 몸부림쳤다.

"언제라도 여기에 도달해 나를 즐겁게 해 봐라, 기사여."

"그럴 리는 없소."

도미닉 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나는 것은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하오."

다소 오만한 듯한 도미닉 경의 말.

그러나 도미닉 경은 현재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또 본능적인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맑은 이성과 가장 본능적인 감각 모두 이 싸움에서 도미닉 경이 이길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죽이겠다! 죽이겠어!"

슬라톤 벡스가 상처를 메우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경비병들을 잡아먹으며 체력을 회복했다.

"너희 모두를 죽이고 흡수해 내 격을 올리리라! 필멸자 따위는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시끄럽군."

슬라톤 벡스의 피부가 꿈틀거렸다.

학살자 왕이 대검을 휘둘러 다시 슬라톤 벡스를 베어내려고 했으나, 다시 격을 채운 슬라톤 벡스는 그 공격을 무난하게 막아 냈다.

고작 팔 5개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학살자 왕이 대검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전력을 다 하마."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의 태도를 보며 방패를 들어 올렸다.

여차하면 바로 구르거나 주저앉을 준비하면서.

천장에 달려 있던 크리스털 상들리에가 흔들거렸다.

방금 전, 도미닉 경과 슬라톤 벡스의 싸움에서 약해진 천장이, 학살자 왕의 대검이 만들어낸 풍압으로 너덜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천장의 일부가 무너지며 크리스털 상들리에가 떨어지고 말았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는 크리스털 조각들.

그 소리를 신호탄 삼아, 도미닉 경과 슬라톤 벡스, 그리고 학살자 왕이 격돌했다.

...

가장 먼저 공격받은 것은 슬라톤 벡스였다.

그 덩치만큼 때릴 곳도 많았기에 가장 먼저 둘의 표적이 된 것이다.

"비겁한!"

슬라톤 벡스가 입을 열어 유독한 가스를 배출해냈다.

이는 슬라톤 벡스가 최후를 위해 아껴 둔 비장의 무기 중 하나였다.

그가 잡아먹은 시체들이 부패하며 생긴 유독한 가스가 퍼지며 순식간에 금속으로 된 것들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에게 그 가스가 닿자, 피부가 부글거리며 수포로 가득 차더니, 이내 죽처럼 녹아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회심의 일격은 도미닉 경과 학살자 왕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도미닉 경은 기본적으로 저항력 스탯이 높아 독에 강했고, 학살자 왕의 갑옷은 용의 가죽이었기에 자체적으로 저항력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회심의 일격이 실패한 이에게 남은 것은 반격당할 일 뿐이었다.

도미닉 경이 방패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슬라톤 벡스의 아래로 돌진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방패를 들어 올려 슬라톤 벡스를 다시 한번 뒤로 넘기는 데 성공했다.

비록 슬라톤 벡스의 무게때문에 체공 시각은 겨우 1초 남짓이었으나, 학살자 왕 정도의 보스에게는 1초의 시각은 영겁에 가까운 타이밍이었다.

대검을 등 뒤로 최대한 당긴 학살자 왕이 대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공중에 떠 있던 슬라톤 벡스는 대처할 시간도 없이 그 대검을 그대로 마주했고, 이내 마치 야구 배트에 부딪친 농구공처럼 천장과 벽을 통통 튀었다.

순식간에 커다란 피해를 입은 슬라톤 벡스.

그러나 슬라톤 벡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사방으로 튀며 으깨진 시체를 흡수해 다시 체력을 채운 슬라톤 벡스는 정공법으로는 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자기 몸의 일부를 분리시켜 저들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다는 전략을 꺼냈다.

열다섯 개의 팔로 이루어진 구체들이 데굴데굴 굴러 도미닉 경에게 다가 갔다.

도미닉 경은 그 구체들을 방패로 쳐 내려고 했으나, 열다섯 개의 팔이 방패를 강하게 붙잡으며 오히려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 작전은 도미닉 경에게 꽤 효과적이었지만 학살자 왕에게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는데, 갑자기 학살자 왕의 몸에서 피어오른 지옥의 업화에 팔로 이루어진 구체들이 잿더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팔로 된 구체를 떨쳐 낸 도미닉 경이 뒤로 물러서 상황을 살폈다.

이는 슬라톤 벡스도 마찬가지였고, 학살자 왕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첫수를 교환한 탐색전으로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아차렸다.

삼파전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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