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220화]변수 출현
* * *
도미닉 경은 눅눅한 유황에서나 날 법한 냄새를 맡았다.
그건 눈앞의 마족에게서 나는 냄새였는데, 도미닉 경은 이런 냄새를 내는 마족들을 잘 알고 있었다.
"레기온의 주구냐?"
도미닉 경은 평상시 기품있는 기사식 예법마저 잊은 채 으르렁거렸다.
도미닉 경은 마족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정 조건 하에 마족임이 판명날 경우 그 증오심이 드러났다.
실제로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서 마족들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왕 뚜 르 방을 만나고도 그다지 증오심을 드러내지 않았지 않은가.
그 특정 조건이란, 바로 페럴란트를 습격한 마족들에게서 나는 역겨운 체취였다.
눅눅하게 곰팡이 핀 유황과도 같은, 코를 마비시키는 끔찍한 냄새.
그것이 바로 도미닉 경의 분노를 촉발하는 매개체 중 하나인 것이다.
"어찌 그분을 아느냐?"
"그 분과 관련이 있는 자인가?"
"왕쳉시티? 리틀 샌프랑코? 이도 저도 아니면... 반드리치?"
"으음, 모르겠다. 모르겠어."
"우리의 군세는 차원을 넘나든다. 이런 하찮은 필멸자를 본 적은 없는데."
붉은색의 끔찍한 살덩어리가 제각기 할 말만 내뱉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증오해 마지않는 마족의 입에서 나온 말 중 하나를 똑똑히 들었다.
반드리치.
반드리치 요새.
아직 도미닉 경이 기사가 아닌 징집병이었을 당시 가장 큰 전투가 있었던 곳.
마지막 전투를 제외하면 도미닉 경의 머릿속에서 가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전투로 기억된 그곳의 이름이 마족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반드리치 요새에 있었나?"
도미닉 경이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마족을 노려보았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은 두 개의 눈으로 노려보는 것보다 더 크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 거기였나?"
"반드리치 요새. 마족들의 수치! 마켈란의 오점!"
"당연하다. 그곳에서 먹었던 고기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추방되었으나 남는 장사였지."
마족의 모든 입이 온갖 감정들을 털어내었다.
"보아하니 너는 그 요새의 생존자로구나. 그렇지?"
"승리자 중 하나로군. 박수라도 쳐줄까?"
"혹시나 이 얼굴을 아나? 이 얼굴은?"
살점 덩어리가 도미닉 경의 출신지를 알자마자 마구 도발하기 시작했다.
살점 덩어리의 피부에서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그중 몇몇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반드리치 요새에서 도미닉 경과 같이 싸우던 동료들 중 일부였다.
"..."
도미닉 경은 마족의 도발에도 묵묵히 살점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마족과 싸우기 위해선 정말 모든 것을 대비한 채 임해야 한다는 걸 도미닉 경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도미닉 경은 던전에 수감되며 기본적인 장비, 그것도 그중 일부만 사용 가능한 상태.
마족과 싸우기에는 대비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인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도미닉 경이었기에 도미닉 경은 그저 마족을 바라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일단 따돌린 다음 장비를 갖추고 도전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달려들어 약점으로 보이는 13곳을 찌를지 말이다.
"혹시라도 시스템이라는 편법에 기대려 했다면 포기해라. 나는 정상적인 소환 절차로 소환되었으니, 시스템도 나를 막지 못한다."
"모든 마족들이 다 그렇듯, 이 땅의 법칙보다 마족의 법칙이 우선이다. 그러니 너의 시스템도 나를 해하지 못한다."
살점에서 돋아난 두 개의 까마귀 머리가 도미닉 경을 향해 비웃었다.
도미닉 경은 저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마족들은 매우 이기적인 것들이었기에 습격한 차원의 법칙과 관습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들의 우두머리 레기온의 권능 중 하나였다.
정작 레기온은 본래의 차원에서는 고개도 못 든다는 것이 우연히 밝혀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차원에서까지 그 힘을 투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마족들의 왕, 레기온의 권능은 강력한 것이었다.
도미닉 경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에 순간 숨 쉬는 것을 까먹기도 했거니와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한숨 뒤에 다시 히죽 웃었다.
눈은 여전히 마족을 노려보는 채로, 그늘진 얼굴 위로 찢어질 듯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마족들과 싸웠던 경험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모든 마족들은 제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언제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었다.
눈앞의 마족이라고 해서 그들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마족들에겐 위의 장점들을 모조리 상쇄할 만한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뜻밖에 치명적인 약점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물론 마족들도 약점에 대한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을 숨기려고 노력하였으나, 도미닉 경은 마족들과 싸워오며 알음알음 알아낸 것들이 있었다.
도미닉 경은 바로 몇 가지 알 수 없는 단어를 외쳤다.
"바'록샤! 알트'례니! 칸'샤차르! 미니워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살점 덩어리가 엉터리 단어들을 내뱉는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너무나 큰 고통에 실성해 버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계속해서 나열해 갔다.
"반드레드! 비영드리우! 개스톤 하일! 막스테스!"
도미닉 경의 외침은 그 어떤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으나, 이내 도미닉 경이 한 단어를 내뱉자 마족이 움찔했다.
"슬라톤 벡스!"
"윽!"
"뭐지? 어째서 그걸 아는 거지?"
살점 덩어리가 날카로운 발톱을 들어 올려 온몸의 가죽을 벗겨낼 기세로 피부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마족은 흰개미 떼가 피부를 갉아먹는 듯한 가려움과 따가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내 진명을 아는 거지?"
"정체가 뭐냐, 필멸자!"
방금 전까지 도미닉 경을 도발하며 여유를 부리던 마족이 짜증 난다는 듯 분노를 표출하며 도미닉 경을 노려보았다.
전면에 있는 마흔 다섯 개의 눈이 도미닉 경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마족들은 이기적이지. 살려주는 대가로 진명 몇 개를 받아 내었을 뿐이다."
뭐, 끝까지 살아남은 마족은 없지만 말이다. 라고 도미닉 경이 생각했다.
굳이 그건 입 밖으로 꺼낼 이유가 없었다.
"과연! 그래서 내 진명을 알고 있었구나!"
"누가 알려주던가? 아키텐스? 카람바 드 악'솔? 오트리텐의 치바바?"
"고맙군. 그 진명들은 내가 모르던 이들이었거든."
이제 도미닉 경은 역으로 마족에게 이죽거렸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방심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마족을 노려보며 움직임을 관찰하던 도미닉 경은, 이내 천천히 다가가며 다시금 마족의 진명을 외치기 시작했다.
"슬라톤 벡스! 슬라톤 벡스! 슬라톤 벡스!"
"큭!"
살점 덩어리 마족은 점점 더 심해지는 간지러움에 도저히 정상적인 생각할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이 마족의 진명을 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족은 살점이 축 늘어진 두꺼운 팔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명확한 목적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저 본능적으로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족들의 약점 중 하나였다.
그들은 진명을 불리면 본능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이는 차원을 넘나드는 마족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풀어서 말하자면, 그들은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차원의 방벽을 속이고 들어온 불법 체류자인 셈이었다.
위조된 여권인 만큼 본래의 이름을 속인 채 들어와 차원의 추적을 피하며 불법적인 일을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진명이 알려지는 순간, 차원은 그 마족을 특정해 추적하여 추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 거부 반응은 바로 차원이 이 마족을 특정해 추적, 제압하려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라톤 벡스라고 불린 마족은 제법 강한 마족이었는지 진명이 여러 번 불리는데도 이성만 잃었을 뿐, 힘은 거의 그대로 유지한 상태였다.
도미닉 경은 살점 덩어리의 공격을 막아 내며 다가가 검으로 눈 중 하나를 찔렀다.
도미닉 경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마족들도 자주 상대해 본 베테랑.
그저 힘만 믿고 마구 휘두르는 공격 쯤은 무난하게 빗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공격이 다시 살점 덩어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크아! 그만! 그만!"
살점 덩어리의 피부가 울뚝불뚝 요동쳤다.
그리고 두꺼운 팔들이 더욱 두꺼워지기 시작하며 핏줄이 서더니, 땅을 쾅쾅 내려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흔들리는 지면에 휘청거리면서도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자세를 채 바로잡기도 전, 엄청난 힘으로 연속적인 피해를 입은 던전의 바닥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제길."
도미닉 경이 쩍쩍 갈라지는 발밑을 보며 짧은 욕을 내뱉었다.
계속해서 살점 덩어리가 땅과 벽을 내려치고 있었다.
균열은 점점 커져, 마침내 갈라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아래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우르르거리는 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부서져 내렸다.
"으, 아! 도미닉 겨어어어엉!"
가장 무거운 살점 덩어리가 무너지는 바닥을 긁어대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이내 잡고 있던 바닥마저 무너지는 바람에 살점 덩어리는 저 아래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내 손을 잡아!"
언제부턴가 천장에 붙어 숨어 있던 메리가 도미닉 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미닉 경은 무너지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메리의 손을 잡았다.
아니, 잡을 뻔했다.
"아."
아니, 사실 닿지도 못했다.
도미닉 경은 무너지는 바닥을 잘못 박차는 바람에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오른 것이었다.
그마저도 고작 10cm 떠올랐을 뿐이다.
"도미닉 경!"
메리의 손을 잡지 못한 도미닉 경이 살점 덩어리처럼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도미닉 경은 점점 멀어지는 메리를 바라보았다.
메리는 여전히 손을 뻗어 도미닉 경을 잡아채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거리는 팔을 조금 더 뻗는다고 달라질 것 없을 만큼 멀어진 상태였다.
박살난 바닥의 파편 중 하나가 도미닉 경과 메리의 사이를 지나며 서로의 모습을 가렸다.
도미닉 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있을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