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217화]던전 4층/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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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도우가 문을 열자 도미닉 경은 어지러운 거리가 아닌,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화려한 문과는 달리, 굉장히 소박하고 낡은... 좁은 단칸방이었다.
"...미안해요. 사실 이건 제 보스 방으로 가는 문이었어요."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에게 다시금 사과했다.
"조금이라도 더 도미닉 경을 바라보고 싶었거든요."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요?"
도미닉 경이 제인 도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분명 도미닉 경에게 살려달라고 제안한 것은 제인 도우였고, 그 대가로 여기까지 길을 안내한 것도 제인 도우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을 바꿔 이렇게 제인 도우가 보스로 나오다니.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그건?"
제인 도우가 머뭇머뭇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모기보다도 더 작은 소리로.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상상도 못한 이유.
도미닉 경은 제인 도우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알아요. 정말 뜬금없는 거.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제인 도우가 거미줄이 가득한 창문가에 서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행동엔 자기연민과 자기혐오가 가득 들어 있었다.
"혹시 그거 아나요? 존 도우와 제인 도우는 둘 다 예술가인 거?"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존 도우를 처음 만났을 때 왕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라고 했으니, 존 도우를 기반으로 한 제인 도우도 예술가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글로 먹고산다고 스스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예술가란 직업은 참 피곤한 직업이에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짜증을 부리고, 선 하나를 긋기 위해 구르고 짖어대죠. 모든 예술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인 도우가 술 기운을 빌리려는지 녹색 병에 든 술을 잔뜩 들이켰다.
"크.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요. 전 예술가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적어도 성격은 예술가보다 더하다는 거."
"쉽게 사랑에 빠져 버려요. 애정 결핍이라. 도미닉 경이 처음은 아니죠. 사실 지금까지 삼천 명의 애인을 사귀어 봤을 거예요. 하지만 그 누구도 제 성격을 견뎌 내지 못했죠."
"네. 맞아요. 저 또 사랑에 빠졌어요. 바로 도미닉 경 당신과 말이에요."
"당신에게는 고작 몇 시간이었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도미닉 경은 무려 수십 일 동안 같이 이 거리를 걸어간 사람이에요. 당연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잖아요?"
속사포처럼 속에 있던 말을 내뱉은 제인 도우가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속을 진정시키려는 듯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싸구려 담배가루가 천천히 타들어갔다.
"알아요. 제가 이상하다는 거. 하지만... 이게 저예요. 팔리지도 않을 글을 쓰면서, 모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 그게 바로 저라구요."
제인 도우가 타자기가 있는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미닉 경은 그저 말없이 제인 도우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전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미 보스 방에 들어와 버렸죠. 그 말은"
제인 도우가 손으로 마구 머리를 헝크러뜨렸다.
"제가 당신을 죽이거나, 당신이 저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거죠."
제인 도우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다시 했던 말을 정정했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을 죽일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곳을 나가려면 절 죽이고 가도록 해요."
제인 도우가 깊이 담배 연기를 들이켰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게, 제가 당신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제인 도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 지금,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
이는 제인 도우라는 보스의 설정을 알아야 했다.
존 도우와 제인 도우는 예술가라는 특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보스였다.
둘인 만큼 그 기믹이 확연히 달랐는데, 존 도우가 예술가의 밝고 화려한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면, 제인 도우는 예술가의 고뇌와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면모로 가득 찬 보스였다.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극단적인 행동을 취하고, 자신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는 것.
그게 바로 제인 도우의 본질인 것이다.
지금 제인 도우의 심정은 이랬다.
방금 전, 길을 걸을 때 제인 도우는 도미닉 경에게 이미 사랑에 빠진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도미닉 경은 기사였고, 제법 훤칠한 키에 나름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눈이 하나 없다는 것은 흠이었지만, 기사의 몸에 난 상처는 그만큼 열심히 전장에서 활약했다는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과묵하긴 하지만 스스로 정한 규칙을 지키려는 모습도 보였고, 던전을 뚫고 지나가려는 것을 보면 가만히 운명을 기다리는 것보다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눈이 심각하게 낮은 제인 도우의 마음을 사로잡을 요소는 충분했다.
그러나 제인 도우는 제멋대로 상처받았다.
제인 도우가 했던 질문.
여자 친구가 있느냐에 대한 도미닉 경의 대답 때문이었다.
과연 도미닉 경은 그 멋진 매력 덕분인지 주변에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제인 도우는 이미 뒤틀린 사랑에 익숙한 여자.
첩이나 불륜이어도 상관없으니, 도미닉 경의 사랑을 받아 내고 싶었다.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에게 달이 아름답다는 문학적 고백을 건네보았으나, 도미닉 경은 대답만 할 뿐 시선은 제인 도우를 향해 있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전혀 제인 도우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제인 도우는 낙담했다.
도미닉 경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왜 도미닉 경은 나를 봐주지 않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도미닉 경의 마음을 내게로 돌릴 수 있을까?
아니, 도미닉 경의 관심을 한 번이라도 끌 수 있을까?
제인 도우는 점점 도미닉 경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고작 몇 시간이었겠지만, 이 던전에 속한 제인 도우에게는 몇 달이란 시간이 흐르며 이 뒤틀린 사랑은 점점 더 썩어들어가고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인 도우는 생각했다.
도미닉 경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의 마음 한 켠에 남을 수 있게끔 하자.
내 비루한 죽음이라면, 도미닉 경의 마음에 한 점 얼룩이라도 남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제인 도우는 마침내... 도미닉 경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했다.
바로, 자기 보스 방이었다.
그렇게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그러니 도미닉 경. 날 찔러줘요. 제발, 날, 기억해 줘요. 날 바라보지 않아도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게끔, 날 죽여요."
이제 제인 도우는 애원을 넘어 오열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병든 마음을 가진 제인 도우의 필사적인 외침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제인 도우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도미닉 경은 처음에 제인 도우와 약속 할 때 그녀를 살려주겠노라고 했고, 지금도 그 약속은 유효했다.
그 약속이 도미닉 경의 발목을 잡았다.
"우린 약속했소. 당신을 살려 두기로. 그리고 당신은 살려주는 대신 3층의 보스에게로 데려다주기로 했고."
도미닉 경이 논리적으로 제인 도우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인 도우는 요지부동이었다.
"...절 죽이고 3층으로 가세요."
제인 도우가 낡은 서랍에서 녹슨 열쇠를 꺼냈다.
"이 열쇠를 쓰면 바로 3층의 보스 방으로 갈 수 있어요. 애초에 바로 옆방이에요. 바로 저 문을 열면 지나갈 수 있죠."
평상시엔 전혀 쓰지 않지만요. 라고 제인 도우가 말했다.
"그러니까, 절 사랑하지 않는다면 단호히 죽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절 사랑한다면, 제 부탁을 들어 주세요. 제발 절 죽이고, 기억해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선택지는 하나뿐이에요. 결정하고말고 할 것이 없는 거죠."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을 압박했다.
도미닉 경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적들과 수많은 기믹들을 보아온 도미닉 경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으니까.
"이기적이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메리가 나타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고 싶다... 그건 참 이기적이지 않아? 사랑한다면서 상대에게 마음의 짐을 가득 지운다니. 그건 사랑이 아니야. 민폐지."
메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제인 도우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했다.
"정말 네가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가볍도록 포기하는 것이 정답 아닐까?"
"...당신이 뭘 알죠?"
메리의 말에 제인 도우가 발끈했다.
그러나 메리는 당당하다는 듯 제인 도우에게 소리쳤다.
"그러는 넌 뭘 알길래 자꾸 도미닉 경에게 부담을 지우지? 그렇게 죽고 싶다면,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던가! 애초에 이곳에선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왜 그렇게 죽음을 구걸하는 건데?"
"아."
메리의 말에 도미닉 경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분위기에 취해서 머뭇거리긴 했으나, 가차랜드에선 가치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었다.
보스라는 위치를 가진 제인 도우의 가치가 그리 부족하진 않을 테니, 분명 제인 도우도 다시 부활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네요. 이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네요."
제인 도우가 메리의 말을 듣고 코를 훌쩍였다.
고개를 숙이고 책상에 머리를 박은 제인 도우는, 이내 손에 쥔 열쇠를 도미닉 경에게 건넸다.
"가요. 당장 가요. 제가 더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 존 도우를 처치하고 2층으로 꺼져 버려요. 다신 절 생각하지도 말고, 절 불쌍히 여기지도 마세요. 제가 당신을 잊을 수 있게끔."
도미닉 경이 열쇠를 건네받았다.
"잘되었네. 이제 가자. 저 문으로 가면 될 거야."
메리가 도미닉 경에게서 열쇠를 뺏어 뒷문으로 향했다.
도미닉 경이 메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제인 도우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도미닉 경은 마지막으로 제인 도우에게 그렇게 말한 뒤, 메리가 연 문을 통해 다음 방으로 떠났다.
방에는 제인 도우 혼자만 남아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훌쩍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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