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17화 (217/528)

〈 217화 〉 [216화]던전 4층/3층

* * *

"이쪽이야."

버그 공간을 벗어나 3층으로 돌아오자,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메리가 화려한 3층에 어울리지 않는 뒤틀린 나무 문을 부채로 가리켰다.

"그 층에 어울리지 않는 문을 통해 4층과 3층을 오갈 수 있어. 물론 어울리는 문을 통해 그 층에서 이동할 수도 있고."

도미닉 경이 메리의 설명을 들으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약간의 버벅거림 이후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화려함의 이면에 있는 추악한 진실이.

오물과 쓰레기로 가득한 뒷골목.

아이들로 보이는 유령들이 쥐를 쫓아다니고, 온갖 망령들이 골목길로 들어가 사라졌다가 다시금 다른 골목에서 튀어나왔다.

멀리서 본다면 연민이 가득 들 만한 광경이었으나 실제로 가까이서 보면 그 음산함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장소였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혐오 필터와 성인 필터가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 모습이 실제 모습이 아닌, 약간의 과장이 섞인 애니메이션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여기는...?"

도미닉 경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전 화려한 연회장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세상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연회장이 생각나는 구조였다.

"4층과 3층은 하나라니까."

메리가 도미닉 경의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 도미닉 경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애초에 하나의 세계니까, 비슷한 게 당연하잖아?"

도미닉 경이 메리를 쳐다보았다.

메리는 현재 검은 귀부인의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검은 모자에는 검은 망사가 달려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려주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모자에는 여섯 개의 루비 장식이 달린 상태였고, 그녀의 하반신은 통이 큰 드레스에 가려져 있기는 했으나 여덟 개의 거미 다리가 슬쩍슬쩍 보이는 중이었다.

"4층과 3층은 균형의 세계지요. 한쪽이 부유해지면, 한쪽이 가난해집니다."

"음?"

"응?"

도미닉 경은 갑자기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메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메리가 한 말이 아니었는지, 메리도 도미닉 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깁니다, 여기."

도미닉 경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실수로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시야각 문제로 예상보다 더 돌리긴 했지만, 도미닉 경은 새롭게 등장한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반가워요. 도미닉 경. 방금 만났죠? 제인 도우라고 해요."

그 여성은 모던한 흰 와이셔츠와 검은 양복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로 헐렁하고 낡은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있었다.

와이셔츠의 가슴 쪽 주머니에는 펜이 대여섯 개 정도 있었고, 코트의 한쪽 주머니에는 너덜너덜한 수첩이, 반대쪽 주머니에는 녹색 액체가 찰랑거리는 녹색 병이 슬쩍 보였다.

자신을 제인 도우라고 소개한 여성이 터벅터벅 걸으며 도미닉 경에게로 다가왔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파이프 담배가 쥐어진 채였다.

"비루하지만 4층의 보스를 맡고 있어요. 물론 매번 4층만 하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다르게 돌아가긴 하니까, 다음번에 오면 3층일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나는 일단 더 가난한쪽으로 배정되니까요."

제인 도우가 손을 뻗어 도미닉 경에게 악수를 청했다.

도미닉 경은 4층의 보스라는 말에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으나, 악수를 받아 주지 않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최대한 경계하면서 악수를 받아주었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이 던전을 깨려고 왔소."

"그거 좋네요. 마음에 들어. 꺤 사람은 여럿이지만, 누구도 깬 적이 없는 모순된 던전을 정복하려는 기사라... 이건 팔리겠어요."

제인 도우가 너덜너덜한 수첩을 꺼내 펜 하나를 들고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미안해요. 대화하는 도중에 이러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래야 먹고 살 수 있거든요. 이래 봬도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배고픈 예술가의 표본이죠. 라고 중얼거린 제인 도우가 다시 주머니에 수첩을 넣었다.

"좋아요. 사실 제가 이렇게 나온 이유는 어차피 이 세상의 기믹 상, 4층 보스인 전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였어요. 어차피 여러분들은 빠르게 이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잖아요? 그럼 3층만 깨도 2층으로 갈 수 있으니 4층인 전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죠."

애초에 이런 가난한 예술가가 무슨 힘이 있어서 당신들을 막아서겠어요? 라고 말한 제인 도우가 주머니에서 녹색 병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반대쪽 손에는 각설탕이 올려진 술잔이 있었는데, 그녀는 익숙하게 그 잔에 천천히 녹색 병에 든 액체를 떨어뜨리며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병에 든 액체는 도수가 높은 술이었던지 코를 찌르는 알코올의 향기와 함께 각설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든 액체를 주욱 들이킨 제인 도우가 캬­하고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흐리멍덩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죠. 3층에 있는 제 오빠이자 저이자 절대 저와 관련이 없는 녀석을 좀 살살 때려 눞히겠다고 약속하면, 4층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어요."

"오빠이자 당신이자 절대 당신과 관련이 없는 자?"

도미닉 경이 그 수수께끼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4층과 3층은 하나이자 둘이야. 아마 3층에 있을 존 도우가 원본이고, 제인 도우는 이 세계가 분리되면서 태어난 자아겠지. 지금은 완전히 분리되어 버려서 서로 다른 개체가 되어 버린 거고."

"그렇구려."

메리가 도미닉 경의 의문에 대략적인 대답했다.

도미닉 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실제로 도미닉 경도 도미니카 경이라는 평행세계의 자신이 있지 않던가.

눈앞에 있는 여인도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아무튼, 어떻게 하실래요? 살려주실 건가요?"

"그러겠소."

도미닉 경이 제인 도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인 도우가 다시 한번 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 한 잔만 먹고 가죠. 제정신으로는 안내하기 그러니까요."

제인 도우가 독한 술을 쭉 들이키고는 히끅 딸꾹질했다.

"좋아요. 이제 가보도록 해요. 보스 방 전까지 말이죠..."

제인 도우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거 맞아? 술 주정뱅이의 길 안내를 받는 게?"

메리가 까치발을 들고 작게 도미닉 경의 귀에 속삭였다.

"뭐, 우리끼리 길을 찾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도미닉 경이 어깨를 으쓱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그게 아니라­"

메리가 도미닉 경에게 변명하듯 말을 꺼내려고 할 때, 이미 도미닉 경은 제인 도우를 따라 저 앞으로 가 버린 상태였다.

"...아니다. 별일이나 있겠어?"

메리가 우물쭈물 무언가 불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간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여덟 다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

"그거 알아요? 여긴 한 칸이 사흘이에요."

제인 도우가 한 블록을 지나친 후 다시금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제 설탕을 탈 생각도 없는지 녹색 병을 그대로 입에 대고 들이킨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고작 몇 시간을 걸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이미 한 달 동안 이 거리를 걸은 셈이지요."

제인 도우의 말에 도미닉 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막 열 번째 블록을 지나치던 참이었다.

"...이해하지 못하겠소."

"당연해요. 여긴 시간 축이 제멋대로거든요. 애초에 밖의 100배라니, 이상하지 않아요?"

제인 도우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름 퇴폐적인 미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재밌는 걸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가서 아쉽고, 재미없는걸 하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죠. 던전은 그런 곳이에요."

그나마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무언가 하는 게 시간이 더 잘 가니까요. 라고 제인 도우가 중얼거렸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차랜드라면 충분히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갈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도미닉 경과 제인 도우는 말없이 몇 블록을 더 걸었다.

그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지, 제인 도우가 다시 도미닉 경에게 말을 걸었다.

"무뚝뚝하시네요. 혹시 여자 친구가 있나요?"

"...여자인 친구라면 있소."

도미닉 경이 제인 도우의 말에 긍정했다.

도미니카 경은 평행세계의 자기 자신이니 제외하더라도, 몇몇 사람들이 생각난 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히메였다.

가차랜드에서 가장 먼저 친해진 이성 친구.

"남녀 간에 우정은 없어요."

어쩐지 제인 도우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친구라는 건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사실상 여자 '친구'가 아니라 '여자 친구'인 셈이죠."

제인 도우가 다시 한번 독한 술을 들이켰다.

명백히 방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달이 아름답네요."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도미닉 경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풍경은 쓰레기와 낙서로 가득했지만,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뜬 보름달이 제법 아름답긴 했다.

"그렇구려."

도미닉 경이 긍정했다.

"...정말요?"

제인 도우가 멍한 눈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제인 도우는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듯 말이다.

"...이제 다 왔네요."

제인 도우가 몸을 돌려 도미닉 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더 이상의 혼란은 없었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3층 보스 방이에요."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에게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제 오빠가 있는 곳이지요. 혹은 저 자신이거나, 혹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도미닉 경이 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금과 백금,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문.

"...도미닉 경."

제인 도우가 도미닉 경을 불렀다.

도미닉 경이 제인 도우를 돌아보자, 제인 도우는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도미닉 경이 제인 도우의 말에 어떤 행동이라도 취하기도 전에, 제인 도우가 문을 활짝 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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