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215화]던전 4층/3층
* * *
"4층은 사실 3층이나 다름없어."
"...?"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메리가 그렇게 말했다.
도미닉 경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메리를 쳐다보았다.
"이건 설명하기가 좀 그런데... 아무튼 4층에 도착해 보면 알 거야."
메리가 히죽히죽 웃으며 젤리 하나를 입에 집어넣었다.
다시금 입안 가득 퍼지는 단맛에 여덟 개의 다리로 땅을 탕탕 구르며 좋아하는 메리.
그러는 사이, 도미닉 경은 4층의 입구에 도착했다.
"4층은 3층이야. 3층은 4층이고. 하지만 4층을 깨면 3층으로 가고, 3층을 깨면 2층으로 가는 거지. 그것만 기억해."
메리가 방금 전 받은 젤리만큼의 정보를 토해냈다.
도미닉 경은 그 수수께끼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방패를 앞세우고 4층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
도미닉 경은 3층의 문을 열었다.
반짝이는 투명한 크리스털로 된 샹들리에. 일곱 층으로 된 케이크와 각종 고기를 만 양배추 롤이 가득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런 화려한 것들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검을 앞으로 내밀고
잠깐, 검?
도미닉 경은 방금 전까지 방패를 들고 있던 손을 바라보았다.
방패는 여전했으나, 어째서인지 도미닉 경은 방패가 아니라 검을 앞세우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도미닉 경이 검을 내려놓고 다시 방패를 앞세웠다.
그러자 얼굴에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도미닉 경이 얼굴을 매만지자, 그곳에는 도자기 가면의 감촉이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 도미닉 경이 이번에는 자기 복장을 체크했다.
지금까지 입었던 일상복이 아닌 제독들이나 입을 법한 코트와 하늘하늘한 비단 옷이었다.
가면을 쓴 귀족들이 도미닉 경을 지나쳐가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런 즐거운 날 칼부림이라니. 흉흉하기도 해라."
"그러게 말이에요. 기사라면 품위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거늘."
"해적 기사라 그런 것 아닐까요?"
"하긴. 해적에겐 기품 따위 쓸 데가 없으니까요."
귀족들의 비웃음 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도미닉 경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여전히 여기는 3층, 귀족들의 가면 무도회장이었다.
또 한 걸음 옮겼다.
여전히 여긴 3층, 귀족들의 연회장이었다.
"도대체 이건...? 메리 양은 어디로 간 거지?"
도미닉 경이 문득 메리의 존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메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네. 역시 어수룩하게 있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미닉 경은 그를 향해 반갑게 말을 거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있었다.
여섯 개의 루비가 장식된 가면을 쓴 검은 머리의 소녀가.
"...메리 양이오?"
도미닉 경이 눈앞의 소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인간이었다.
거미의 몸과 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각할 정도로 창백한 피부를 가진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소녀.
"어떻게 날 찾은 거요?"
도미닉 경이 멍청한 소리를 했다.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데 말이오."
도미닉 경은 자기 복장을 생각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상.
거기에 가면까지 썼으니,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메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가 너에게 정보를 주었잖아. 나만큼 여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손에 꼽거든. 무엇보다도..."
메리가 지나가는 시종이 든 와인잔 트레이에서 한 잔을 들어 올리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무도회에서 검과 방패를 든 멍청이는, 너 뿐이잖아?"
도미닉 경이 손에 들린 방패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여기서 검과 방패를 든 사람은 도미닉 경 뿐이었다.
"그만. 이제 날 알아본 이유는 충분히 알았소. 그나저나... 여긴 어디오?"
도미닉 경이 새로이 떠오른 의문점을 메리에게 물었다.
"3층이야. 4층이기도하고."
메리가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그리고 접시에 담긴 양배추 고기말이를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역시나. 맛은 그대로네."
"...여긴 또 멀쩡하구려."
도미닉 경은 주변의 요리를 바라보며 5층에 있던 썩은 식재료들을 떠올렸다.
"가짜니까. 속은 텅 비어 있어."
"가짜?"
메리가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애초에 3층의 모든 건 가짜야. 4층도 가짜지만, 3층은 완전 가짜인 거지. 뭐랄까, 설명이 좀 어렵긴 한데..."
메리는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꼬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예전에 랜덤채팅에서 만났던 코더의 말에 의하면, 4층과 3층은 하나의 세계야. 그것도 음수의 세계지. 둘이 곱해져야 완성되는 음수의 세계."
"그런데 알다시피 제곱해서 1이 되는 수는 존재하지 않아. 그렇기에 4층과 3층은 허수 차원이 되어 버린 거래."
"...그게 다 무슨 소리요?"
"가짜의 가짜라는 소리지."
메리가 혼란에 빠진 도미닉 경에게 한 줄로 요약을 해줬으나, 수학에 약한... 아니, 이젠 문학에도 약해진 도미닉 경으로서는 좀처럼 혼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림 속의 그림 속 세계라고."
"아. 대충 이해했소."
도미닉 경이 마침내 이해할 만할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4층은 그림 속 세계고, 3층은 그 그림 속의 그림 속 세계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도미닉 경이 이렇게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는 것도,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아무 걱정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메리가 말한 요리의 속이 텅 비어 있다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여기가 그림 속의 세계라면, 아무리 그림 속의 음식을 먹어도 허기가 진 것이 당연할 것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여기를 공략하려면 무엇이 필요하오?"
도미닉 경이 메리에게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손에는 젤리가 들려 있었다.
"으, 세상에. 그거 좀 치워줄래? 지금은 혈당 관리해야 해서 보기도 싫어."
그러나 메리는 도미닉 경이 건넨 젤리를 역겹다는 듯 쳐다보았다.
도미닉 경이 당황한 눈으로 메리를 바라보자, 메리는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여기선 일단 인간이니까. 뭘 먹어도 멀쩡한 괴물이랑 평범하다못해 연약한 소녀를 비교하면 안 되지."
가면 아래, 메리의 뺨이 붉어진다.
아마 지금까지의 행동을 떠올리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뭐, 어쨌든 지금은 젤리 정도로는 정보를 얻지 못해. 원한다면 나중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갚아도 되지만... 그땐 이자가 조금 붙을 거라구?"
메리가 의기양양하게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젤리는 아직도 넘치도록 남아 있으니까.
오히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인벤토리를 정리하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시오. 어차피 젤리는 한참 남소."
"...이게 아닌데?"
메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실 메리는 도미닉 경을 조금 놀리려는 생각이었다.
한창 놀고 싶을 때에 이 던전에 갇힌 메리로서는 이런 사소한 장난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야말로 맺고 끊음이 확실한 기사 중의 기사.
메리의 장난이 쉽게 통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재미없어."
메리는 곧 도미닉 경을 놀리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아무튼 여긴 그림 속... 의 그림 속 세계야. 그렇다면 그림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메리는 도미닉 경에게 수수께끼를 내듯 역으로 물었다.
도미닉 경은 메리의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도미닉 경은 나름의 답을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과연. 그런 것이었구려. 고맙소."
"어, 어?"
도미닉 경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메리는 설마 도미닉 경이 정답을 알아차릴지는 몰랐는지 놀란 눈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이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귀족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는데, 도미닉 경은 아까 전부터 그곳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도미닉 경이 그곳으로 걸어가자, 도미닉 경은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아차렸다.
도미닉 경이 대화를 나누는 귀족들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어설프게 판자에 그려진 귀족들의 그림이었다.
"여기인 것 같군."
"어, 어어? 잠깐"
도미닉 경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그림의 뒤편으로 향했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암전되었다.
이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것은 도미닉 경과 메리, 그리고 방금 전 지나쳐 온 판자가 전부였다.
도미닉 경은 이 층계의 기믹을 알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맞는 거요?"
"아니, 와. 세상에. 나 설마 이 층계에서 버그를 찾은 사람은 처음 봐. 아니, 애초에 여기에 온 것도 처음이긴 하지만."
메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도미닉 경을 향해 중얼거렸다.
"사실 그냥 문을 지나치면 4층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기도 전에 사고를 쳐 버리네."
"익숙한 일이오."
도미닉 경이 메리의 말을 받아 쳤다.
"이래 봬도 제법 버그를 자주 겪었으니."
"...보통은 평생 한 번 보기 힘든데 말이지."
메리가 도미닉 경의 당당함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메리는 다시 반은 사람, 반은 거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미닉 경의 모습도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도미닉 경이 어둠 속을 둘러보았다.
너무 어두워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이었지만, 여기는 무언가 달랐다.
마치 어둠이 뭉쳐 물질을 만든 것처럼 눈에 그 윤곽이 훤히 보이는 것이다.
"여긴 어딘지 모르겠구려."
도미닉 경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 어?"
메리가 도미닉 경의 말에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여기서 나가려면 언제든 나갈 수 있지 않아?"
메리가 뒤를 돌아 판자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 판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도 제대로 보이고 있었는데, 그 너머로 불빛이 조금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구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돌아가도록 합시다."
도미닉 경이 멍하게 판자를 바라보는 메리를 지나쳤다.
"어, 어? 내가 먼저 나갈 거야!"
메리는 도미닉 경보다 먼저 판자 너머로 나아갔다.
도미닉 경이 그 뒤를 따라 다시 판자 너머 3층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다시 이 공간에 어둠만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그르릉."
어둠 속에서 섬뜩한 불빛과 울음소리가 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