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214화]던전 5층
* * *
싹튼 감자와 썩은 양파를 녹아내릴 때까지 끓인 콩소메.
보스 앙트레와 앤트리가 야심차게 내어놓은 요리였다.
"포만감을 위해 전분을 조금 넣었다."
"혹은 콜라겐이거나!"
앙트레와 앤트리가 곰 인형 얼굴의 콧수염을 매만지며 국자로 수프를 휘저었다.
보글보글 반투명한 형광 초록색의 끈적거리는 액체가 국자를 타고 솥단지로 다시 흘러내렸다.
보스의 수프를 바라보던 도미닉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먹을 수나 있는 걸까? 라고 생각한 도미닉 경.
그러나 여기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도미닉 경 뿐이었는지, 심사위원들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은으로 된 숫가락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수프에 손을 댄 것은 존 도우였다.
그는 가장 먼저 수프의 향기를 맡고, 반 스푼 정도를 덜어 입에 가져갔다.
"흐... 푸흐흐흐... 흐흐흐하하하하하!"
그리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아주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맛이네요!"
존 도우가 숫가락을 들어 올리며 박장대소했다.
그의 은수저는 검게 변해 있었는데, 그 말인 즉 이 수프에는 대놓고 독성이 가득하다는 소리였다.
"짜릿해요. 아주 짜릿해. 몸이 마비되어 저릿거리는 감각. 이 감각이 기분 좋기란 쉽지 않거든요!"
존 도우는 혀가 꼬인다는 듯 날름 입술을 핥았다.
그의 혓바닥은 이미 보라색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요리를 냄으로서 미각을 마비시켜 뒤에 낼 도전자의 요리를 무력화한다! 이게 궁정 요리사의 품격이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함! 그야말로 정치와 눈치로 단련된 자의 오의!"
존 도우가 벌떡 일어서 기립박수를 쳤다.
그리고 마비가 몸 곳곳에 퍼져나가며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앙트레와 앤트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맛 자체는 좀 평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료에서 1점, 레시피에서 2점, 맛에서 2점드리겠습니다."
뜻밖에 냉정한결과!
"어째서!"
"완벽한 수프였다! 만점짜리 수프였다!"
존 도우의 말에 앙트레와 앤트리가 항의했다.
그러나 존 도우는 이렇게 점수를 준 이유가 있었다.
아주 명확한 이유가.
"계략과 술수를 쓴 건 좋지만, 이미 심사 기준이 뻔하게 드러난 상황이잖습니까."
매일 먹던 요리, 매일 먹는 레시피, 매일 먹던 맛.
존 도우가 점수를 짜게 준 이유였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캐서린이 우아하게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닦아냈다.
"우린 신선한 것을 찾았지, 추악하고 더러운 정치와 공작을 바란 게 아니니까요. 저도 2점, 2점, 2점 드리죠."
캐서린이 검게 변한 은수저를 탁 놓으며 말했다.
더 먹을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가벼운 행동은 앙트레와 앤트리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다.
"...이거 평소에 먹던 감자 수프보다 구려."
메리는 숫가락으로 그릇에 담긴 수프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먹기 싫다는 티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난 그냥 0점 줄래. 요리사로서 기본은 맛있는 걸 만드는 거잖아. 더 구리고 쓰레기 같은걸 만드는 게 아니라."
앙트레와 앤트리는 이제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저희의 수프는 세계 최고입니다!"
그러나 곧 앙트레와 앤트리는 커다란 분노에 사로잡혔다.
심사위원들의 혀가 맛이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네 개의 팔이 각각 소매를 걷으며 당장에라도 달려나갈 것처럼 행동하는 상황.
그때였다.
딸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종소리가 난 방향으로 몰렸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인 그 자리엔, 도미닉 경이 서 있었다.
"다 되었소."
도미닉 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도미닉 경의 요리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그곳엔 높이가 2미터는 될 법한 젤리의 탑이 있었기 때문이다.
젤리를 벽돌삼아 설탕을 녹인 물을 발라 쌓은 거대한 탑 위엔 사탕으로 된 지팡이를 짚은 사탕으로 된 인형이 있었는데, 탑의 꼭대기 층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아름다워."
캐서린이 그 예술품에 가까운 디저트를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사실, 캐서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메리도, 존 도우도, 심지어 보스인 앙트레와 앤트리도 그 아름다운 세공에 정신이 팔렸었다.
심지어 도미닉 경 마저 말이다.
그야말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가 만들어낸 기적과도 같은 결과물.
"...이건 어떻게 먹으면 되지요?"
캐서린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당장에라도 이 달콤한 디저트를 입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대답은 조금 야만적이었다.
"뜯어먹으면 되오."
"그러기엔 너무 아깝군요."
캐서린이 정말 아쉽다는 듯 이 젤리의 탑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이건 달겠지만, 너무 아까워서 맛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할 것 같아요."
캐서린의 한탄에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젤리의 맛을 잘 알고 있는 메리는 저 탑이 매우 맛있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젤리에 푹 빠진 메리마저도 눈앞의 예술품을 뜯어 먹는 일은 좀체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맛을 볼 수 없을 것 같군요."
캐서린이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돌렸다.
저 달콤한 첨탑을 향해 당장에라도 손을 뻗고 싶지만, 먹기엔 너무 아깝다는 상반된 생각의 충돌을 어떻게든 누르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맛을 볼 의무가 있습니다."
존 도우가 저릿한 어깨를 뱅글뱅글 돌리며 앞으로 나섰다.
마비같은 수준 낮은 상태 이상은 보스의 내성으로 순식간에 풀려 버린 것이다.
"알다시피 저희 평가표에 보면 중요한 건 재료, 레시피, 그리고 맛입니다. 먹지 않고서 맛 항목을 체크할 순 없는 일 아닙니까."
존 도우의 말에 캐서린이 망설였다.
심사위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느냐, 아니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예술품을 보존하느냐.
캐서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보스 생활 삼천 년 중에서도 몇 없었던 깊은 고민이었다.
"그, 혹시 먹기 그러면 다른 거라도 드시겠소?"
침을 질질 흘리며 젤리의 탑을 빤히 쳐다보는 메리와 고뇌에 빠진 캐서린, 그리고 어떻게든 저 젤리의 탑을 먹어야 한다는 죄책감에 빠진 존 도우의 앞에 도미닉 경이 끼어들었다.
도미닉 경의 손에는 컵라면 하나가 들려져 있었는데, 사실 이건 달콤한 젤리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다시 인벤토리에 넣어 둔 것이었다.
메이와 캐서린, 그리고 존 도우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도미닉 경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품은 예술품대로 남고, 시식은 시식대로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비록 컵라면 하나를 셋이서 먹기엔 양이 적었으나 세 사람의 심사위원에게 있어선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맛있는 라면이었다.
...
"졌다. 우리가 졌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기교를 도전자가 해냈다!"
머리 둘 달린 콧수염 곰 인형이 도미닉 경에게 패배를 시인했다.
"우리를 이겼다고 방심하지 마라."
"4층엔 지금처럼 녹록치 않을 거다!"
앙트레와 앤트리가 으르렁거리며 도미닉 경에게 겁을 주었다.
그러나 필터로 인해 젤리를 우물거리는 곰 인형의 모습을 한 둘의 모습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앙트레와 앤트리가 다시 보스 방으로 돌아가자, 도미닉 경의 앞에 있던 바닥이 땅으로 천천히 꺼지며 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던전은 보스를 깨야만 다음 지역으로 갈 수 있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다시금 보스 앙트레와 앤트리가 있을 방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4층으로 가야 할 차례였다.
"그나저나 놀랐어."
도미닉 경이 묵묵히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메리가 도미닉 경을 칭찬했다.
"설마 엄청난 양의 젤리로 사람을 안달 나게 만든 다음, 배고파진 이들에게 다른 요리를 대접할 줄이야. 당연히 맛있을 수밖에 없잖아."
공복은 최고의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 메리는 도미닉 경이 그 상황을 노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우연히 그나마 있는 신선한 재료인 젤리를 쌓아 올렸을 뿐이었고, 쌓다 보니 재밌어져 우연히 예술작품에 버금가는 예술적 요리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다시 만들라고 하면 도미닉 경은 그저 고개를 저으리라.
그러나 도미닉 경은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변명하기에는 이미 메리가 아주 깊이 오해하는 상황이었고, 이럴 때에는 차라리 오해를 풀지 않는 것이 도미닉 경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많은 젤리를 줘버렸으니, 이제 난 누구에게 젤리를 얻어야 하나..."
메리가 시답잖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말 시답잖은 고민을.
"아직 한참 남아 있소."
메리의 고민에 도미닉 경이 말했다.
도미닉 경의 인벤토리에서 지금까지 메리에게 주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젤리가 튀어나왔다.
이상 기후 때 내린 젤리의 비는 상상 이상의 양이었고, 도미닉 경의 인벤토리에 들어간 양도 상상 이상이었다.
도미닉 경이 젤리를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는 메리.
"저기 있잖아. 혹시 4층에 대한 정보는 필요 없으신가? 지금이라면 젤리 이 정도로 넘겨줄 수 있는데."
메리가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둥근 원을 그렸다.
도미닉 경은 5층 입구에서 하던 대로 메리에게 젤리를 넘겨주었다.
그렇게 둘은 정보를 교환하며 4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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