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213화]던전 5층
* * *
도미닉 경이 본의 아니게 보스와 요리 대결을 펼치게 된 그 시각.
"...아무래도 없는 것 같지?"
양산박의 마법사가 벽의 틈새에서 주변을 살펴보고 천천히 기어나왔다.
그녀는 핏기가 싹 사라진 창백한 피부가 파들거리는, 그야말로 미라처럼 바짝 마른 상태였는데 얼마나 심각하게 말랐는지 두꺼운 화장이 갈라지며 그녀의 맨 얼굴을 드러낼 정도였다.
무려 2cm는 될 법한 무시무시한 화장이 쩌적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아, 안 돼! 맨 얼굴은 안 돼!"
마법사가 황급하게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화장을 복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미 갈라진 균열은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는 법.
마침내 그녀의 두꺼운 화장이 벗겨지며 맨 얼굴이 드러났다.
사마귀가 가득한 매부리코.
양쪽의 크기가 전혀 맞지 않는 짝눈.
턱에는 거뭇거뭇 수염이 난 자국이 있었으며, 그 턱은 앞으로 쭉 튀어나와 있어옆에서 보면 얼굴상이 마치 초승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수천 년을 살아온 마녀다운 모습.
마법사는 황급히 마녀 모자를 눌러써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새로운 화장을 시작했다.
너무 다급하게 화장을 고치느라 몇몇 부분이 비율에 어긋나기는 했으나, 화장이 벗겨지기 전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아간 마법사.
안도의 한숨을 내쉰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쓰러졌다.
마법진을 그리며 과도하게 쓴 체력과 거대한 거미를 의식하며 소모된 정신력.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에서 화장을 고치느라 허둥대는 바람에 그녀의 상태는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법사는 옷 너머로 느껴지는 축축한 이끼의 감각에 몸서리치며 도미닉 경을 저주했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
마법사는 이렇게 자기가 엉망이 된 이유가 도미닉 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미닉 경이 적당히 관심을 끌었으면 이렇게 고생하면서 그를 상대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정작 도미닉 경에게 해악을 끼치려는 쪽이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양산박의 사람들은 대개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남의 불행에 즐거워하고, 자기 고통이 가장 아프다고 느끼는 부류인 것이다.
"짜증 나, 짜증 나, 짜증 나!"
마법사의 짜증스런 말이 공허하게 던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좁고 어두운 공간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저 멀리까지 퍼져야 마땅했으나,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던전의 벽에서 자라는 이끼들 때문에 그녀의 말은 멀리 가지 못하고 흡수되었다.
"잡기만 하면 정말 개처럼 다룰거야. 목줄을 채우고 가축 이하의 대우만 해 줄 거라고!"
마법사는 이미 도미닉 경을 사로잡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 것인가?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는 마법사의 뒤, 방금 전까지 마법사가 숨어 마법진을 그리던 벽의 틈 사이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멧돼지처럼 뻣뻣한 털이 가득한 거대한 붉은 팔이 그 틈새를 벌리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
"이걸 어쩐다..."
도미닉 경은 녹슨 가마솥을 화로에 올려 두고 벌레먹은 축축한 장작에 불을 붙이는 보스를 바라보았다.
보스가 선택한 재료는 보기만 해도 끔찍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너무 끔찍해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깎여나갈 정도였다.
그런 끔찍한 재료들을 한꺼번에 녹슨 가마솥에 집어넣자, 차마 식사 시간에 들으면 식욕이 싹 사라질 끔찍한 소리가 귓가에 질척거렸다.
향은 어찌나 끔찍한지 5층의 입구에서 맡은 냄새를 고작 그따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심해, 코를 막았음에도 피부가 썩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역병을 통째로 스프로 만든 것 같은 비주얼과 향.
맛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 성인 필터를 꺼두는 것도 좋아. 나도 그러고 있거든."
도미닉 경이 그 끔찍한 요리에 충격을 받았다고 느꼈는지 심사위원석에 앉은 메리가 말했다.
"성인 필터?"
도미닉 경이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 카드를 보면 좌측 상단에 [19 ON/OFF]라고 된 거 말이야."
도미닉 경이 황급히 카드를 꺼내 죄측 상단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19 ON/OFF]라고 적혀 있었다.
"도대체 왜 가차랜드는 큰 글씨로 이런 기능들을 알려주지 않는 거요?"
도미닉 경이 볼멘소리를 내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 뭐라고 해야 할까. 검열?"
메리가 도미닉 경의 말에 답했다.
"대충 그런 거로 생각해. 검열 후 비공식 유저 패치가 풀려서 검열을 우회할 수 있는 뭐 그런... 응."
도미닉 경은 메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 끔찍한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도미닉 경이 [19 ON/OFF] 버튼의 OFF 부분을 눌렀다.
"...버그인가?"
도미닉 경은 OFF를 누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게 파인 가슴골을 드러내고 있던 유모 캐서린과 광대 존 도우의 성적인 농담이 사라졌다.
또한 꽤 노출도가 심하던 메리의 상체에 품이 넉넉한 후드티가 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끔찍한 역병 수프는 그대로였다.
"저 역겨운 스프는 그대로로군."
"아. 그러네. 이건 성인 컨텐츠가 아니었지. 혐오 표시였어."
메리가 생각났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혐오 컨텐츠 ON/OFF는 따로 태그를 지정해서 차단해야 해. 차단 기능은 카드의 톱니바퀴 부분을 누르고"
도미닉 경이 메리의 설명대로 조작하자, 마침내 [혐오 OFF]라는 시스템 창이 떠오르며 끔찍하던 세상이 순화되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순화되어도 너무 순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요리해 보자!"
"우와! 맛있겠다!"
방금 전까지 위협적이고 끔찍한 모습으로 보스의 품격을 보여 주었던 앙트레와 앤트리는 혐오 검열 이후 동글동글하고 콧수염이 달린,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머리 둘 달린 곰 인형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만들던 끔찍한 수프는 그냥 형광 녹색으로 빛나는 슬라임처럼 되어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보면 환장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이것보세요! 뭘 더 넣으면 좋을까요?"
"음, 내 생각엔 달콤한 게 좋겠어. 설탕을 넣으면 요리에서 반짝반짝 윤이 난단다!"
심지어 그들의 대사마저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의 모습을 알고 있던 도미닉 경으로서는 이 엄청난 위화감이 어색하기만 했다.
"이제 슬슬 요리해야 하지 않겠나?"
심사위원석에 앉아 도미닉 경을 노려보고 있던 캐서린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도미닉 경이 캐서린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인벤토리를 열어 식재료로 쓸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뒤져 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금 혐오 방지 필터로 인해 식재료들이 나름 괜찮게 보이긴 했지만 도미닉 경은 그 요리들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젤리와 설탕을 헤치고, 인절미 가루와 사탕을 지나 구석구석 확인해 본 도미닉 경은, 마침 유통기한이 지나기 직전인 컵라면을 발견했다.
...예전에 편의점에 들렀을 때 사두고 깜빡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미닉 경의 일상은 쉴 틈 없는 이벤트의 연속이었기에 충분히 깜빡할 만했다.
도미닉 경은 마침내 인벤토리에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젤리, 사탕, 인절미 가루, 설탕, 그리고 유통기한이 임박한 컵라면 하나.
그게 전부였다.
그야말로 부실하기 그지없는 식재료들.
심지어 과반수는 디저트에나 어울릴 간식거리지 않은가.
사실, 오히려 이건 도미닉 경에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의 요리 실력은 꽤 뛰어난 편이었으나 그건 가정 요리로서의 뛰어남이었지, 식당에서 돈 주고 사 먹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도미닉 경은 호기심이 왕성한 사나이였다.
분명 쓸 수 있는 식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저런 실험을 한답시고 요리를 엉망으로 만들지도 몰랐다.
물론, 이런 중요한 시기에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마도.
도미닉 경은 일단 급한 대로 접시 하나를 들고 젤리와 사탕을 가득 쌓아 올렸다.
그리고 흩날리는 인절미 가루와 설탕을 그 틈 사이에 부어넣었다.
어딘가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컵라면의 뚜껑을 딴 그때, 둔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프가 끝났어!"
"음. 정말 입맛이 도는걸?"
앤트리와 앙트레... 였던 머리 둘 달린 곰 인형이 가마솥을 통째로 들어 심사위원 앞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스프는 따뜻해야 맛있어!"
"바로바로 먹는 게 가장 뜨겁지!"
곰 인형 머리들이 껄껄 웃었다.
그야말로 어린이 프로그램의 한 장면 같은 그림.
물론, 이게 보스전이 아니었더라면 도미닉 경도 넋을 잃고 동심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필터의 효과는 뛰어났다.
"자, 먹어봐!"
"그야말로 미미(美味)!"
앙트레와 앤트리가 국자를 크게 휘둘러 형광 슬라임 덩어리를 그릇에 담아내었다.
보스 앙트리와 앤트리의 요리가 심사대 위에 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