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10화 (210/528)

〈 210화 〉 [209화]엔터 더 던전

* * *

사법 구역 내 던전은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때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원래 이 지하 감옥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었는데, 가차랜드의 첫 번째 회귀 때 땅속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이 음침하고 쿱쿱한 던전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건 단순히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이 던전에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이 던전의 가장 깊은 곳에는 손잡이와 검날이 서로 뒤바뀐 검이 있다고 한다.

그 검을 손에 넣어 자기 심장을 찌르면 과거로 돌아가 자기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얻는다는 전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그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참 대단한 사람인 듯하다.

그 검을 지키는 던전의 주인, 데스 나이트를 뚫고 들어갔다는 말 아닌가.

모순적이게도 이 던전은 한 번 이상 공략되었지만, 단 한 번도 공략된 적이 없다.

시간 축이 어긋나서 그런가.

"...라고 적혀 있군."

도미닉 경은 흐릿하게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에 의지해 벽에 적힌 문구를 읽어내렸다.

한 사람이 적은 것 같지는 않은 문구는 중구난방 제멋대로였으나 이런 정보라도 지금의 도미닉 경에게 있어선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다.

"시간 축이 어긋나 있다라..."

도미닉 경은 다른 것들은 모두 젖혀두고 단 하나, 시간 축이 어긋나 있다는 것만 기억했다.

어차피 일주일 동안 이 지하 감옥에서 버티기만 하면 되는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다른 것들은 전혀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도미닉 경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도미닉 경을 바라보는 시선들.

"도대체 언제까지 바라보기만 할 거요?"

도미닉 경이 한숨을 내쉬며 어둠 너머의 존재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어둠 너머의 존재들은 깜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

마치 빛나는 눈만 아니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 보이오."

도미닉 경이 손가락을 들어 빛이 닿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미 다리 하나가 슬쩍 튀어나와 있었다.

"어? 으, 어. 변태!"

어둠 속의 존재가 화들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황급히 빛에 드러나 있던 걸미다리를 어둠 속으로 집어넣었다.

"도대체 왜 나를 따라다니는 거요?"

도미닉 경이 어둠 속의 존재를 인지하고 말을 걸었다.

저 존재는 정말 몰래 미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었지만, 도미닉 경의 감각엔 마치 강아지가 졸졸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변태의 감인가?"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도미닉 경에게 으르렁거렸다.

여덟 개의 붉은 눈이 사납게 변했다.

"아니, 그렇게 대놓고 오는데 왜 모르겠소."

"...으. 완벽한 미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둠 속의 존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들킨 거,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떻겠소?"

"너야말로 불을 끄지 그래? 횃불의 일렁거림 때문에 어지럽게 여덟 명으로 보이잖아!"

도미닉 경이 잠시 침묵했다.

어둠 속의 존재가 시력이 좀 나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뭐, 그렇다면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좋아. 랜덤 채팅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드는군. 변태."

어둠 너머에 있는 이가 그렇게 말하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여성체의 방에 침입하는 거야? 너도 그렇도 방금 전에 들어온 마법사도 그렇고."

"마법사? 방금 들어왔다고 했소?"

도미닉 경이 어둠 너머의 존재에게 물었다.

"그래. 무례하게도 끔찍한 생명체를 마구 풀어놓더라구. 다람쥐라던가 토끼 같은 거 있잖아. 으, 세상에. 난 방구석에서 그런 작은 동물들이 나오는 것이 너무 싫어."

하다못해 코끼리까진 버틸 수 있는데 말이야. 라고 말한 어둠 너머의 존재.

"그 마법사는 어디로 간 거요?"

"글쎄. 어디 좁은 구석에서 새끼를 까고 있지 않을까?"

어둠 속의 존재가 너무 끔찍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역 업체를 불러야하나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럼 그 옆의 존재들은 다 뭐요?"

도미닉 경이 여덟 개의 눈 주변에 여럿 떠 있는 빛들을 바라보았다.

"아."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빛들을 바라본 어둠 속의 존재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게이밍 키보드야."

그리고 그건 정말 별것 아니었다.

"내가 방구석 찐따라서 말이야. 엄마는 늘 나보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도 잡아먹고 그러라고 하지만 난 방에서 게임이나 하는 게 좋은걸."

어둠 속의 존재가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한 말을 했지만, 도미닉 경은 개의치 않았다.

어둠 속에 있는 이는 도미닉 경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공격적이었더라면 도미닉 경도 대응했겠으나 앞으로 일주일이란 시간을 버틴 뒤 재판까지 진행해야 하는 처지에서 체력은 아낄 수록 좋았다.

"좋소. 당신은 내게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군."

"당연하지. 뭣 하러? 이래 봬도 숙녀라고. 폭력적인 건 싫어! 폭력적인 건 엄마의 잔소리로 충분하다고!"

어둠 속의 존재가 역정을 내었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을 공격하지 않으리다. 대신 내가 일주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소?"

"...끙."

어둠 속의 존재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안 돼."

명백한 거절 의사.

"어째서요?"

도미닉 경이 어둠 속의 존재에게 되물었다.

"네가 말한 일주일이 이 던전에서의 일주일이라면 상관이 없어. 하지만 네가 말한 일주일은 바깥에서의 일주일일 거잖아. 안 그래?"

"다른 거요?"

"다르지. 다르고 말고."

어둠 속 존재가 말을 이었다.

"밖에서 일주일은, 여기서 2년 정도니까."

"2년?"

"그래. 700일 정도?"

어둠 속 존재의 말에 도미닉 경이 크게 놀랐다.

방금 전 적힌 글귀가 바로 떠올랐다.

시간 축이 어긋나 있다는 글귀.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존재를 통해 시간축의 어긋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나 크게 뒤틀린 시간 축을 본 적은 없었다.

"지루하거나 할 일이 없을 때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느껴지지 않아? 여기선 진짜 늦게 가는 거야. 여긴 그런 곳이니까."

"그건 너무 심하지 않소?"

"그러니까. 2년 동안 숙녀의 방에서 지내는 건 문제가 되지."

도미닉 경은 2년이란 시간 동안 여기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했으나, 어둠 속 존재는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군. 다른 방도는 없소?"

도미닉 경이 어둠 속 존재에게 대안을 물었다.

"뭐, 원한다면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해 줄 수는 있어. 문제는 걔네들이 너에게 호의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면... 만일 네가 너무 긴 시간을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이 던전을 공략하는 방법도 있어. 혹시 손잡이와 칼날이 반대인 칼의 전설을 알아?"

도미닉 경은 방금 전 읽었던 글귀를 다시 한번 생각해냈다.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칼로 자신을 찌르면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해. 네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여기에 들어온 거면, 그걸로 과거를 바꿔 없었던 일로 만들면 되는 거야."

도미닉 경이 어둠 속의 존재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 저울의 양쪽에 각각 700일을 버틴다는 명제와 던전을 공략한다는 명제가 올라갔다.

그리고 잠깐 저울의 양쪽이 비슷비슷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던전을 공략한다는 명제에 무게가 쏠렸다.

도미닉 경이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던전을 공략해야겠소."

"잘 생각했어."

어둠 속의 존재가 히죽히죽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나저나, 만일 네가 던전을 공략한다면..."

그녀의 머뭇거림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도 따라가도 괜찮을까?"

"따라온다?"

도미닉 경이 어둠 속의 존재에게 의문을 드러냈다.

도대체 왜 그녀가 도미닉 경을 따라오려 한다는 것인가?

"이래 봬도 난 상인이거든. 누군가와 거래해 이익을 얻는 것이 내 직업이란 말이야. 물론 요즘엔 아이템 거래로 먹고 살긴 하지만­"

요즘 크레딧이랑 골드 교환비가 많이 떨어져 버렸거든. 어둠 속의 존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지금 급전이 필요해. 이번에 예쁜 아바타가 나와서 엄마 몰래 가차석을 질렀단 말이야. 엄마가 알면 내 등짝이 남아나질 않을걸? 그 전에 다시 통장을 복구시켜야만 해."

"물론 내가 던전 최약체라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이런저런 물건을 사고파는 일밖에 없겠지만, 그것도 너에겐 꽤 도움이 될 거야. 어때, 관심 있어? 관심 있지?"

어둠 속의 존재가 이제는 거의 애원하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도미닉 경은 그 강력한 애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이! 좋아. 나름 양심적으로 포인트를 매길 테니까 바가지 쓸 걱정은 하지 마. 진짜 조금만 남겨 먹을게."

어둠 속에서 희고 가느다란 팔이 튀어나왔다.

그 팔은 마치 도미닉 경에게 악수를 청하는 듯 보였다.

"자. 마지막엔 계약을 성립했다는 악수를 해야지."

도미닉 경은 그 깡마른 팔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손을 뻗어 어둠 속에서 나온 손을 마주 잡았다.

[던전 내 계약이 발주되었습니다.]

[병약한 메리(이하 갑)은(는) 도미닉 경(이하 을)에게 물건을 팔 때 10% 싼 가격에 판매한다. 반대로 물건을 살 때는 10% 비싼 가격에 매입한다.]

[을은 모험하는 내내 갑을 제외한 다른 상인들에게서 물건을 사거나 팔지 못한다.]

[갑은 을이 원할 때 좌판을 열어 물건을 매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갑 : 병약한 메리(인) / 을 : 도미닉 경(인)]

도미닉 경은 순간 손가락 끝에서 따끔한 감각을 느꼈다.

횃불을 가까이 가져가 손가락 끝을 보자, 그곳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 악수도 했으니 이제 계약서에 지장을 찍으면 돼."

병약한 메리라고 적힌 어둠 속 존재는, 흰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창백한 피를 계약서에 떨어뜨렸다.

도미닉 경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이 계약을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미닉 경이 잠시 어둠 속의 존재, 메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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