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201화]상투스 도미니쿠스
* * *
"이럴 때가 아닐세."
아르쿠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떨리는 목소리로 오그레손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저 언덕을 올라야 하네. 도미닉 경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아르쿠스가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언덕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나 아르쿠스는 오로지 언덕만을, 정확하게는 언덕에 꽂힌 페럴란트의 깃발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혼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는 아르쿠스를 보며 오그레손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페럴란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미닉 경의 이야기를 좋아했으나, 아르쿠스는 그 정도가 굉장히 심한 편이었다.
"...같이 갑시다!"
오그레손이 이미 저 앞까지 달려간 아르쿠스의 뒤를 쫓아 뛰었다.
...
도미닉 경이 점령한 언덕은 이제 분화구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았다.
언덕 아래에서 쏘아낸 화력의 집중으로 인해 여기저기 움푹 파인 자국들이 생긴 것이다.
"포탄은 떨어진 데 또 떨어지지 않는다네, 콤라드."
주가슈빌리가 전장에서 떠도는 낭설을 입에 담았다.
주가슈빌리의 말은 절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언덕 아래에서 언덕 위로 쏘아올릴 때, 명중률과 이런저런 변수들로 인해 똑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포탄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포탄의 피해는 고스란히 세 명에게 전달되고 있었는데, 이는 포탄의 폭발 반경이 언덕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크기였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의 특수 능력으로 피해를 감소시키고, 그레고리의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그나마 입은 피해도 회복되는 상황.
[한 파티가 500포인트로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파티에 무작위 불행이 일어납니다...]
"아."
그레고리가 무언가를 직감한 듯 실실 웃기 시작했다.
"망했군."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받는 피해랑 증가 2. 주는 피해량 감소 3. 무작위 장소로 전이 4. 무작위 파티와 자리 변경]
[불행의 수레바퀴가 굴러갑니다...]
그레고리의 담담한 한탄과 함께 룰렛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지도 않았다.
'무작위 장소로 전이'와 '무작위 파티와 자리 변경' 사이에서 멈출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도면 선방했지."
그레고리가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꼭 이겨 주게. 그리고 절대 주가슈빌리를 믿지 말"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주가슈빌리의 [숙청]이 또 한 번 발동되었다.
룰렛은 무작위 파티와 자리 변경에서 멈춰있었고, 이를 본 주가슈빌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숙청을 발동시킨 것이다.
[주가슈빌리의 특수 능력, [숙청]이 발동되었습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 한 사람이 책임을 지고 숙청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떠오른 메시지.
도미닉 경은 그 메시지를 담담하게 바라보다가 주가슈빌리에게 물었다.
"그냥 물러났다가 다시 오면 안 되었던 거요?"
도미닉 경의 의문은 합리적이었다.
이 스테이지는 스테이지 내에서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특성상, 파티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주가슈빌리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멀쩡한 아군을 희생시켜가며 이 고지를 지키려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주가슈빌리의 전략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별 건 아니오, 콤라드."
주가슈빌리가 포탄이 떨어져 움푹 파인 구멍에 들어가 숨었다.
"모든 건 나중에 말해 주겠소. 아직은 동무에게 말해 줄 수 없소."
그 말을 끝으로 주가슈빌리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도미닉 경이 주가슈빌리를 노려보았으나, 주가슈빌리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답변을 듣기를 포기한 도미닉 경은, 대신 주가슈빌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말해 준다고 했으니 넘어가겠소. 정확한 때나 말해주시오."
"이 스테이지가 끝난 뒤에."
도미닉 경의 말에 주가슈빌리가 그렇게 말했다.
"정확하게는 스테이지에서 승리한 뒤에 말해주겠소."
주가슈빌리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기다릴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
"그럼 일단 여길 지키는 데 집중하겠소."
도미닉 경이 방패를 들어 올리고 아래에서 쏘아낸 탄환을 튕겨 냈다.
어째서인지 아까 전보다는 확연하게 줄어든 화력.
도미닉 경은 왜 화력이 이렇게 줄어들었는지 궁금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일단 도미닉 경은 이 언덕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럼 시각은 도미닉 경의 편이 되리라.
...
도미닉 경이 화력이 줄어들었다고 느낀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 언덕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화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덕 아래에서 모여 있던 드래곤 클랜과 서펜트 클랜의 파티들과 새롭게 합류한 파티들 간의 알력 다툼 때문이었다.
아니, 이걸 알력 다툼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서"
"?"
"...답답하군. 누구 통역가 없어? 통역 스킬이라도 있는 사람 없냐고!"
언덕 아래에서 서펜트 클랜의 낭인이 버럭 화를 냈다.
낭인의 앞에는 머리가 셋 달린 치와와를 탄 마왕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마왕과 말이 통하지 않아 이렇게 답답한 상황을 연출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왜 우리 앞을 막아선거지, 인간?"
"아,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왔군. 그러니까 우리가 연합해서"
"거절한다."
보다 못한 참모장이 이 대화에 끼어들었으나 참모장도 말이 안 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마왕과 참모장은 단일 파티로 언덕을 점령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다른 이들과의 연대는 고려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여긴 다른 의미로 말이 안 통하는구만."
낭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지 말고 길을 비켜줍시다."
드래곤 클랜의 사무라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요!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낭인이 또다시 화를 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무언가 생각이 있는지 그저 묵묵히 낭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사무라이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낭인이 마왕과 참모장을 향해 길을 열어 주었다.
"흥. 결국 이럴 거면서 실랑이를 벌이다니."
참모장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가도록 하지요, 마왕님."
"?"
마왕이 참모장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참모장을 향해 말랑말랑한쪽 팔을 팔랑팔랑 휘둘렀다.
"무슨..."
참모장이 마왕의 명에 따라 마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
그러자 마왕은 참모장에게 무언가를 한참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차원적인 언어라 함축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실제로는 수십 마디의 말이 전해졌다.
"...그렇군요."
그 말을 들은 참모장이 싸늘한 눈으로 낭인과 사무라이를 바라보았다.
"감히, 우리 마왕님을 이용하려고 했단 말이지요."
참모장의 말에 사무라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사실, 사무라이는 마왕이 연합 제의를 거절한순간부터 역으로 마왕을 미끼로 쓸 생각하고 있었다.
마왕이 도미닉 경을 이기더라도, 도미닉 경에게 지더라도 난입해 남은 세력을 쓸어 담는, 이른바 어부지리를 노리던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설마 그 계략이 이렇게 허무하게 들킬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고, 그 어떤 단서도 흘리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사무라이가 참모장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걸 너희에게 알려줄 이유가 있나? 우리를 이용하려고 했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야지."
그 말을 끝으로 참모장이 하늘을 날듯 도약해 연합 파티 내부에 난입했다.
그리고 파티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틈을 타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별 의미는 없었다.
그저 마왕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이들에게 경고의 차원으로 날뛰는 것이다.
물론 모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마왕님의 자비심을 알릴 겸 절반 정도만 죽일 생각이었다.
그는 마족이었고, 마왕님의 충실한 충신이었다.
이때만큼은, 그가 마족이라는 것에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도미닉 경의 파티를 향해 날아오는 화력이 줄어 든 이유였다.
...
[한 파티가 750포인트로 선두를 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파티에 무작위 불행이 일어납니다...]
"이제 마지막 룰렛이 돌아가는 구려."
도미닉 경이 주가슈빌리에게 말했다.
현재 도미닉 경의 파티는 도미닉 경과 주가슈빌리 둘밖에 없었고, [제국과 연방]시너지도 꺼진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만 갔으나, 다행스럽게도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었다.
"더 느려진 것이 눈에 보이는군."
도미닉 경이 이제75%를 넘긴 포인트 바를 바라보며 말했다.
첫 250 포인트를 버는 데에는 고작 1분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두 번째 250 포인트를 벌 때에는 3명이 있었기에 1분 30초가량 걸렸다.
이제는 인원이 2명만 남았기에 250포인트를 버는 데 무려 2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도미닉 경이 하늘에서 돌아가기 시작한 룰렛을 바라보았다.
한 명이 남아버린다면 무려 250초, 4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지역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주가슈빌리가 생각이 있다면 언덕 방어에 필요한 인원인 도미닉 경을 처형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룰렛이 잘 나오거나, 어디론가 이동하거나 자리가 바뀌어서 다시 언덕을 점령하거나, 혹은...
아니, 그럴 리 없지. 도미닉 경이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받는 피해랑 증가 2. 주는 피해량 감소 3. 무작위 장소로 전이 4. 무작위 파티와 자리 변경 5. 3분 동안 전장에서 이탈 후 복귀]
시스템 창은 더 강력해진 페널티 룰렛을 보여 주었다.
도미닉 경은 묵묵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룰렛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룰렛이 어느 한 칸에 도달한 그 순간에
탕!
전장에서 한 발의 총성이 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