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200화]가차랜드 41
* * *
주가슈빌리가 바체슬라브를 숙청하고 다시 전투를 속행한 그때, 언덕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현재 도미닉 경의 팀을 제외한 다른 팀은 도미닉 경의 팀을 욕하고 있었다.
"이거 짜증이 나는군."
굵고 거대한 철포를 든 거한이 땅에 소금을 뿌리며 투덜거렸다.
그는 마치 스모 선수처럼 상투를 땋아올리고 샅바 하나만 입은 채였는데, 거대한 철포의 반동을 부드럽게 분산시킬 수 있는 뱃살과 몸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뭐, 더 많은 화약을 때려 부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그의 옆에는 대머리에 땅에 끌릴 정도로 긴 양 갈래를 하고 물안경을 낀 웃기게 생긴 꼽추가 있었는데, 등에 멘 바구니에는 폭죽이 매어져 있는 작대기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그 말대로야. 오늘만큼은 우리의 뜻이 일치하는군."
바로 옆에 있던 삿갓을 쓴 남자가 말했다.
그는 손에 있던 화승총을 들어 언덕을 향해 한 발 쏘아냈다.
언덕 위에 있던 도미닉 경이 방패를 들어 그 총알을 막아 내었으나, 총알은 미끼였다는 듯 바로 역청 덩어리가 도미닉 경을 덮쳤다.
복면을 쓴 이가 손에 든 낚싯대의 끝에 역청 덩어리가 담긴 그물망을 달아 불을 붙였다.
저들이 언덕 아래를 화염병으로 불태워 버렸듯이, 이들도 언덕 위를 불지옥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현재 이 스테이지에 있는 인원은 13개 파티, 42명이었다.
룰 상으로는 모든 파티가 적대적 관계였으나, 현재 도미닉 경의 파티가 독주를 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도미닉 경의 파티 VS 나머지의 구도가 성립되어 있었다.
도미닉 경의 파티 4명... 아니, 방금 전 숙청으로 인해 하나가 줄었으니 3명과 나머지 39명의 대결.
분명히 셋인 쪽이 불리해야만 하는 싸움이었으나, 정작 나머지 파티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견제만 하는 바람에 상황은 점점 도미닉 경의 파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나마 드래곤 클랜과 서펜트 클랜의 원거리 딜러들이 활약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마저도 도미닉 경의 철옹성 같은 방어를 깨기엔 부족한 상황.
"탱커 너프가 시급하다니까."
드래곤 클랜의 궁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도미닉 경의 파티가 최단 시간 승리와 최고의 점수 차이로 이길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마땅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드래곤 클랜의 궁수의 한숨엔 그 답답함과 먹먹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서펜트 클랜의 도적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저, 저게 뭐야?"
"뭐야, 무슨 일인데?"
텐구의 가면을 쓴 이가 나무로 된 포를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저, 저, 저기!"
도적이 반대편 숲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왕! 왕! 왕!"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셋 달린 거대한 치와와가 나타났다.
"!"
"마왕님! 아무 거나 주우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를 드렸건만!"
"하얀 까마귀시여, 제 죄를 용서하소서. 하얀 까마귀시여, 제 죄를 용서하소서..."
"아, 이제 귀에 못이 박히겠소! 그만! 그만! 그 정도면 하얀 까마귀께서도 짜증 나 화내실거요!"
머리가 셋 달린 마수를 탄 2등신의 마왕 뚜 르 방과 마수의 입에 대롱대롱 물려 있는 아르쿠스와 오그레손, 그리고 마왕에게 잔소리를 하며 쫓아오는 참모장과 함께 말이다.
...
숲의 가장자리.
마왕은 마침내 참모장에게 따라잡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왕에게 다가온 참모장이 뚜 르 방에게 훈계를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마왕님, 저희는 오늘 비열하게 승리하는 법을 배우러 온 거지, 산책을 나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
"이제야 알았다는 듯한 표정은 치우십시오. 이미 열 하고도 다섯 번이나 말씀드린 사안입니다."
마왕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참모장에게 어필했으나, 참모장은 교육에 있어선 깐깐하기 그지없는 마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저것들은 뭡니까? 비쩍 마른 성직자와 오우거 사촌같이 생긴 검사? 도대체 저것들은 왜 주워 오신 겁니까!"
참모장이 마왕에게 버럭 화를 냈다.
평상시라면 마왕이 놀라지 않게끔 상냥하게 말했을 참모장이었으나, 오늘은 교육의 날이었기에 다소 엄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
마왕은 머리 셋 달린 치와와를 주워서 혼내는 게 아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마수는 괜찮습니다. 애완동물은 정서 발달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문도 있는데다가, 이렇게 귀엽고 얌전한 마수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 마수가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을 놓고 근처의 통나무를 마구마구 물어뜯고 햘퀴며 공격성을 마구마구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머리 셋 달린 마수는 그 깐깐한 참모장의 처지에서 볼 때 얌전하고 괜찮은 개체인 모양이었다.
"!"
마왕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그럼 이거 키워도 되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참모장을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것들은... 버리는 게 좋겠군요."
참모장은 마왕에게 마수를 키워도 된다고 허락하면서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을 노려보았다.
"..."
마왕이 살짝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마왕 뚜 르 방에게 있어서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은 덤이었다.
마수를 얻은 김에 우연히 옆에 있던 것들을 주워 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마왕에게는 굉장히 대단한, 그러나 참모장의 처지에서 보면 허접하고 엉망인 계획이 하나 있었다.
바로 콜라보 이벤트의 인원들을 마구마구 파티에 넣어 최대한 점수를 얻는 작전이었다.
"!"
마왕은 바로 손짓 발짓으로 참모장에게 이 놀라운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모장은 마왕의 계획을 단 한 마디로 일축시켰다.
"어차피 마왕님의 무력과 제 무력을 합치면 언덕에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할 텐데, 왜 더 많은 이들이 필요합니까?"
"...!"
마왕은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참모장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참모장의 말대로 사람이 많던 적던 마왕 파티가 언덕을 점령하는 건 기정사실.
그렇다면 사람이 많은 쪽보다는 적은 쪽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마왕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마왕의 눈썹이 화난 것처럼 기울어졌다.
"마왕이라니. 하얀 까마귀시여, 믿기시나이까? 마왕입니다. 마족들의 왕입니다!"
"아, 이젠 마왕보다 당신이 더 짜증 나기 시작했소."
마왕이 나름 위엄 넘치는 걸음걸이로 뽀작뽀작 걸어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에게 다가 갔다.
그리고 그 사악하고 말랑말랑한 손을 들어 검고 날카로운, 불길함이 가득한 칼날을 소환해 아르쿠스를 향해 겨눴다.
"...역시나. 그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마족들의 왕이여. 귀여운 모습으로 우릴 속이려고 했겠지만, 하얀 까마귀의 가호받는 난 그 외견에 속아넘어가지 않네! 죽더라도 하얀 까마귀님께서 날 굽어살피시니"
아르쿠스가 마기로 된 칼날에 겁을 먹고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오그레손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마, 마왕은 잔혹하게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을 죽이겠지.
마족들은 인질로서의 가치도 없는 이들을 그렇게 죽여 왔을 테니까.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은 서로 방식은 달랐지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준비는 헛된 노력이 되었지만 말이다.
"?"
마왕이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사실 마왕은 둘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마왕의 관심사는 오로지 머리 셋 달린 치와와였고, 자기 마력을 떼어내 치와와에게 심음으로서 치와와를 보상 테이블에 넣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의 오해였다.
마왕은 거대한 마수에게 자기 마기의 일부를 집어넣었다.
이제 이 마수는 스테이지가 끝날 때 마왕의 보상 테이블에 들어가 있으리라.
"잘하셨습니다, 마왕님. 당연히 마왕님이 마수에게 밥도 주시고, 씻겨 주시고 하시겠죠?"
"?"
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탐욕스러운 마왕이니 귀엽고 흐뭇한 것만 즐기면 되지 그런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과연 마왕님! 그 사악함은 전대 마왕님도 깜짝 놀랄 겁니다."
참모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마왕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야말로 무책임한 쾌락!
"!"
마왕이 다시 마수의 등 위로 올라탔다.
마수에게서는 약간 젖은 개 냄새가 나긴 했지만, 뜻밖에 포근한 면이 마음에 든 마왕.
참모장의 허락도 받았겠다, 이 마수를 최대한 빨리 집으로 데려가고픈 마왕 뚜 르 방은 당장 언덕을 점령하러 가자고 참모장을 졸랐다.
"물론입니다, 마왕님. 이 스테이지에 파괴와 혼돈을 가져다 줍시다!"
참모장이 그 늠름한... 물론 전혀 늠름하지는 않았으나, 나름 늠름한 모습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마왕과 참모장은 순식간에 숲의 외곽에서 언덕을 향해 날아가듯 달려갔다.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을 남겨두고서.
"...우린 이제 어쩌면 좋겠소?"
오그레손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마왕이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묻지 말게.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
아르쿠스가 빨개진 얼굴로 역정을 내었다.
지금까지의 추태가 그대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아르쿠스 주교가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말을 돌렸다.
"저 언덕을 점령해야 이 전쟁이 끝나는 모양이로군."
아르쿠스가 괜히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어이구, 세상에. 방금 전까지 질질 짜던 사람 맞소?"
오그레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아르쿠스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르쿠스의 얼굴이 다시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세!"
아르쿠스가 오그레손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저길 보게! 저 언덕을 보게나! 뭔가 있지 않나!"
아르쿠스는 대충 둘러댈 생각으로 손가락으로 언덕을 가리켰다.
뭔가가 있겠지. 라는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뭐가 있다고 그러시... 있군."
오그레손이 아르쿠스가 말을 돌리려한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으나, 언덕을 바라본 오그레손은 정말 언덕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거... 굉장히 익숙한데..."
오그레손이 눈을 찌푸리며 언덕 위의 무언가를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갈색 배경에 하얀 주목과 까마귀 문양.
오그레손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오그레손이 익히 아는 문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주교? 어떻게 저걸 찾았소? 눈이 독수리만큼이나 좋은 걸요? 아니면 성령의 속삭임이오?"
오그레손이 아르쿠스 주교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뭐, 뭐?"
아르쿠스 주교는 오그레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아르쿠스 주교가 가리킨 방향에 뭐가 있었단 말인가?
"페럴란트 변경백의 문양이오!"
오그레손이 외쳤다.
"그것도 구 백작령의 문장이란 말이오!"
오그레손의 외침에 아르쿠스 주교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오그레손의 말의 속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페럴란트 백작령은 대침공 전과 후의 문양이 달랐다.
대침공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재건한다는 뜻에서 문장이 한 번 바뀐 것이었다.
그렇기에 과거의 문장이라고 함은, 대침공 이전의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아는 한 구 페럴란트 문장을 쓸 수 있는 이들은 대침공 당시 페럴란트 백작의 혈족과 가신들, 그리고 기사들밖에 없었다.
아르쿠스는 여기가 전사들의 전당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그 말인 즉, 이곳에서 페럴란트의 문장을 쓰는 이는 기사일 확률이 높았고, 전사들의 전당에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페럴란트 출신의 기사는 단 한 명.
바로 도미닉 경이었다.
아르쿠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페럴란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