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196화]엇갈린 인연
* * *
아르쿠스 주교와 오그레손은하얀 까마귀의 인도를 따라 골목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으, 세상에. 이렇게 좁고 짜증나는 공간은 처음이오."
오그레손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골목을 돌아보았다.
페럴란트에도 제법 발달한 마을과 성이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 개미굴같은 골목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르쿠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것만으로도 지쳐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잠시 저기서 쉬었다가 가세."
아르쿠스가 있는 힘을 모두 짜내 손을 들어 올렸다.
아르쿠스의 손가락이 닿은 곳에는 바 '올드 월드 블루스'라고 적힌 술집이 있었다.
"선술집이로군요."
오그레손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그레손이 저곳이 술집임을 알 수 있었던 건 참으로 간단한 이유였다.
입구에 술병과 술잔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 이렇게 밝은데 술을 마실 생각이 드십니까?"
"뭐 어떤가. 지금 쉬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술을 마셔야하나 말아야 하나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일세."
아르쿠스가 안 그래도 힘든데 뭘 그리 세세히 따지느냐고 투덜거렸다.
아르쿠스의 신실한 투덜거림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하늘이 순식간에 낮에서 밤으로 바뀌었다.
가차랜드에서 가끔 있는 서버 렉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지만, 신실한 아르쿠스에게는 신의 메시지처럼 보였다.
"보게. 낮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니까, 신들께서도 우리에게 쉬었다 가라고 밤의 장막을 드리워주시지 않는가!"
"세상에. 뭐 이런 곳이 다 있담."
아르쿠스의 궤변에 오그레손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르쿠스의 말대로 이 상황 자체는 마치 쉬었다 가라는 계시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에게 설득당해 바 올드 월드 블루스에 들어섰다.
돈은 걱정 없었다.
물물 교환을 위해 페럴란트 특산물을 몇 개 가지고 있었으니까.
...
"아쉽지만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바 올드 월드 블루스의 바텐더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맙소사. 이럴 줄 알았지."
"그, 이걸 보게. 이렇게 완벽한 곰가죽은 흔한 게 아니네. 은화도 은의 함유량이 높은 편이라네."
아르쿠스 주교는 필사적으로 거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바텐더는 어쩔 수 없다는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오그레손은 당연하다는 듯 솥뚜껑같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들이 가진 돈은 가차랜드에서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은화 그 자체에 함유된 은 만큼 가치가 있지 않으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시스템의 인허가를 받지 않은 것들과 환전을 거치지 않은 것들은 가차랜드 내에서 유통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여기 있는 그 누구라도 저 곰가죽과 은화를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르쿠스 주교는 측은할 정도로 바텐더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얼마나 아르쿠스 주교가 측은할지 생각해 보라.
해골처럼 깡 마른, 낡은 예복을 입은 성직자가 곰가죽과 몇 푼의 은화를 가지고 음료 한 잔을 간절히 청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누가 보더라도 측은한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
바텐더도 그랬고, 바 내부의 손님들도 그랬다.
"그러니까 무료로 한 잔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페럴란트에선 공짜란 없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아무리 그래도 공짜로 받진 못하겠네."
"아이구야, 정말 외골수라니까."
그렇다.
사실, 바 내부의 사람들은 이 외부에서 온 티가 팍팍나는 이들에게 호의로 음료 한 잔과 안주 하나를 베푸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하얀 까마귀 신의 저승이라고 생각한 아르쿠스는 이를 교리에 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해 버렸고, 지금의 대치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그, 그만 호의를 받아들입시다. 너무 거절하는 것도 눈치 보이오."
오그레손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은 노망이 난 건가? 라는 표정으로 아르쿠스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고, 바텐더도 호의를 넘어 짜증이 밀려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새롭게 들어온 손님 하나... 아니, 둘. 아니, 셋이 이 상황을 종식시켰다.
"어우, 세상에. 웬 까마귀람. 바텐더, 여기 딸기 우유랑 초코 우유 하나씩."
"그래도 흰 까마귀는 길조잖아."
"머리 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위험 요소는 없었습니다."
레미와 팬텀 박사, 그리고 안드로이드 제로 백이 바 올드 월드 블루스의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들의 머리 위엔 하얀 깃털이 소복이 쌓여 있었는데, 팬텀 박사의 말대로 라면 그 깃털은 하얀 까마귀의 것이었다.
"응? 뭐야. 왜 이리 안이 소란스러워?"
깃털을 털어내던 레미가 어수선한 바 내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게 말이야, 여기 계신 사제 분께서..."
손님 중 하나가 곤란한 듯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갑자기 들어온 성직자와 용병.
돈이 없는지 물물교환으로 마실 것을 사려고 한 성직자.
그러나 인허가가 나지 않은 물품과 화폐였기에 거래가 불가인 상황.
대신 무료로 음료를 하나 서비스하려고 했으나 성직자가 이상할 정도로 거절하는 상황.
정리하자면 이 정도였다.
"뭐야. 그거 고민할 필요도 없네."
레미가 성직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가죽이랑 화폐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엔 없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가치를 확인하고 와서 값을 치르고, 지금은 그냥 음료 한 잔 받아요."
"그래. 어차피 순서 차이잖아? 돈을 주고 음료를 사 먹든, 음료를 마시고 돈을 지급하든 순서만 다를 뿐이니까."
레미와 팬텀 박사가 이 상황을 명확하게 해결했다.
레미는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에게 다가가 지금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고, 팬텀 박사가 레미를 거들었다.
그제야 지금, 이 상황이 시험도 뭣도 아닌 그저 오해에서 비롯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은 아르쿠스.
아르쿠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으, 그나저나 이 깃털은 왜 안 떨어지나 몰라."
"그러니까. 그래도 이 정도로 하얀 깃털은 희귀한 것 같은데."
"약간의 신성력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해. 실험용으로 몇 개 챙길까?"
레미와 팬텀 박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바텐더 바로 앞의 전용석에 앉았다.
그리고 바텐더가 내어온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를 빨대로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하얀 깃털?"
오그레손이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하얀 깃털. 흰 까마귀. 머리 위를 배회함.
"아."
오그레손은 고개를 돌려 레미와 팬텀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머리에는 아직 떼지 못한 하얀 깃털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알려주려는 듯, 신의 징표처럼 말이다.
오그레손은 황급하게 아르쿠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부끄러움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르쿠스가 오그레손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는가?"
"저길 보시오."
오그레손이 레미와 팬텀 박사를 가리켰다.
아르쿠스가 오그레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저거, 혹시 흰 까마귀 깃털이오?"
오그레손의 말에 아르쿠스의 눈이 부릅 떠졌다.
그 안에 내재된 신성력을 보아저건 하얀 갈까마귀의 깃털이 맞았다.
"어째서 저들에게 갈까마귀의 깃털이..."
아르쿠스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레미와 팬텀 박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에메랄드빛 눈. 이건 페럴란트에서도 흔한 축에 속하는 외형 특징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페럴란트 출신이라는 말인가?
아르쿠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들이 찾는 사람은 도미닉 경이었다. 다른 페럴란트 출신의 사람들이 아니라.
도미닉 경이 아닌 사람에게 붙은 하얀 깃털.
그건 아무래도... 기도가 잘못된 사람을 찾았다는 소리리라.
그러나 아르쿠스 주교는 곧 기운을 차렸다.
한 번 실수한 것으론 페럴란트의 사람들의 고집을 막을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한 아르쿠스 주교가 레미와 팬텀 박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저들이 페럴란트 출신임은 확실해졌으니, 도미닉 경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저기, 실례하외다. 혹시 페럴란트를 아시오?"
...
도미닉 경은 하늘을 나는 하얀 까마귀를 쫓아갔다.
골목은 복잡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이 목적지에 가까워질 때까지 하얀 까마귀는 한 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얀 까마귀의 인도도 방금까지.
도미닉 경이 목적지 근처로 도착하기 직전, 하얀 까마귀는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이젠 정말 주변을 잘 둘러보는 수밖에."
도미닉 경은 다시 한번 경비가 알려 준 페럴란트에서 온 손님들의 외형을 떠올렸다.
한 명은 깡 마른 체구의 성직자였고, 한 명은 오우거처럼 거대한 용병이라고 했었지.
그렇게 생각한 도미닉 경은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도미닉 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도 앱을 켰다.
주변의 길을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곧 사람들이 움직일만한 동선을 확인한 도미닉 경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참 재밌는 사실이 있었다.
하나는 도미닉 경이 방금 전 있었던 곳이 바로 바 '올드 월드 블루스'의 앞이었다는 점이고
"고맙소. 정말 고맙소."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정보를 얻을 줄이야... 정말 감사하오."
"아니, 뭘. 팬심으로 오빠를 찾는다니까 차마 알려주지 않을 수도 없고."
"좋겠다. 누나는 언제 저렇게 열혈 팬들이 생길까?"
또 하나는 도미닉 경이 그곳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이 나와 도미닉 경이 간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이 움직이는 방향은 바로 도미닉 경의 집으로 가는 포탈이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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