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172화]황무지와 가차월드
* * *
빛 하나 없이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
가차월드의 불빛과 삼 박자의 음악.
대파되어 갈라진 틈 사이로 증기를 뿜어대며 틈새를 막고 있는 거미 전차.
그리고 아직도 끝없이 밀려오는 좀비들과 습격자들의 공세.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어울리는 광경.
비행선의 아래에 장착된 전조등이 일제히 켜진다.
도미닉 경이 비행선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제 때 도착한 모양이오."
"이런 건 얼마나 하려나..."
도미닉 경은 비행선의 내부를 보며 감탄하는 총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살 난 거미 전차로 막힌 출입구.
거미 전차의 위력을 잘 아는 도미닉 경으로서는 그만큼 지금 상황이 급박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총독?"
"응? 아. 그렇군요. 잠시 정신을 팔고 있었습니다."
총독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지금 총독은 근육 마초맨이 아니라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비행선 내부의 의자가 작아 도저히 마초맨의 모습으로는 제대로 앉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총독이 말을 돌리기 위해 비행선의 외부를 바라보았다.
출입구를 중심으로 몰려드는 좀비들과 하늘을 향해 총과 포를 쏘는 습격자들의 모습.
다행스럽게도 총알과 포탄이 쉽게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이 떠 있던 비행선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많군요."
"그 정도를 한 번에 정리하셨잖소."
그랬지. 총독이 머쓱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전장은 창백한 좀비들로 바글바글한 상태였다.
얼마나 좀비들이 많은지 땅이 어디인지도 모를 지경.
"거래는 잊지 않았겠지요?"
총독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그들은 비행선을 타고 오면서 한 가지 거래한 상태였다.
"물론이오."
도미닉 경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믿지요."
총독이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화려한 장교 모자를 눌러썼다.
이제 거래를 이행할 차례였으니까.
...
도미니카 경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던 비행선이 점점 고도를 낮췄다.
비행선의 아래에 장착된 전조등이 내뿜는 빛의 선들.
그 흐릿하면서도 선명한 빛의 선이 가차월드와 이어진다.
아니, 그건 빛의 선 뿐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비행선에서 수십 개의 밧줄이 내려와 땅과 맞닿았다.
그리고... 그 밧줄을 타고 수백의 안드로이드가 지상으로 강림한다.
순식간에 지상에 내려온 안드로이드들은 순식간에 진지를 구축하더니, 도미니카 경에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도미니카 경!"
검은 장교복에 분홍색 머리를 한 맹한 표정의 안드로이드가 더블 배럴 샷건을 어깨에 맨 채 경례를 올린 안드로이드.
"지금부터 저희 황무지 총독부의 근위대가 도미니카 경을 지원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안드로이드는 뒤의 안드로이드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순식간에 진지 참호에 기대어 출입구를 향해 총구를 향하는 안드로이드들.
"잠시 저와 같이 뒤로 피신하시죠. 총독님과 도미닉 경이 곧 도착할 겁니다."
도미니카 경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들이 도미닉 경의 비행선을 타고 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단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놀랍게도 도미니카 경이 자리를 벗어나자, 상대가 일제히 쏘아낸 폭발물들이 거미 전차를 날려 버렸다.
수리비는 좀 나오겠지만, 도미니카 경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입구가 뚫렸다! 다들 위치로!"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중기관총을 설치하던 안드로이드가 모두에게 입구가 뚫렸음을 전파했다.
그 말은 순식간에 모든 안드로이드에게 전파되었고, 모든 총구가 입구를 향해 겨눠졌다.
그리고...
첫 좀비가 가차월드 안에 발을 내딛자마자 받은 것은, 총알로 된 환영 세례였다.
"이거나 먹어라!"
"장전 중! 엄호해 줘!"
도미니카 경은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을 딱 맞춰 온 것 같소."
도미니카 경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미닉 경이었다.
도미닉 경의 곁엔 장교 복장을 한 채 어깨에 코트를 걸치고 있는 훤칠한 남성이 있었는데, 도미니카 경은 그가 이 안드로이드 군대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사실, 이건 통찰력이나 눈썰미가 없어도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총독이 입은 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도미니카 경은 왜 저런 인물이 도미닉 경과 같이 있는지 궁금함이 가득했으나 일단 통성명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반가워요. 도미니카 경이에요."
도미니카 경은 평소와 달리 조금은 격식을 차려 인사했다.
"총독입니다. 이름은... 글쎄요. 그냥 총독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이 근방에서 총독이란 칭호를 쓰는 건 저 하나거든요."
"그래요. 총독."
도미니카 경은 총독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차랜드는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니, 이름을 숨기려는 사람 정도는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도미니카 경이 출입구를 힐끗 바라보았다.
수백 명의 안드로이드들이 벌써 수천 마리의 좀비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화할 시간에도 안드로이드들은 적어도 35마리는 더 죽인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사람의 협력을 받은 거야?"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그 말에 도미닉 경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카드에 싸인을 해주기로 했소."
"...고작 그거?"
"물론 당신 것도."
도미니카 경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엄청난 도움에 대한 대가가 고작 싸인 몇 장이라면 남는 걸 넘어 양심이 없다고 느낄 정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당당한 표정으로 도미니카 경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애초에 도와달라고 한 건 자신이었지만, 이 보상을 달라고 한쪽은 총독이었으니까.
도미닉 경이 제안했었던 것이라면 도미닉 경도 양심에 찔렸겠으나, 총독이 제안한 보상이었기에 그저 도미닉 경은 총독이 의인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다들 저격 조심해!"
"상대가 폭발물을 쏘아낸다! 간이 역장을 활용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서로를 마주 보든 말든, 총독은 안드로이드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며 전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장의 흐름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하나가 박살 났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바로 옆에 있던 돈 카르텔로가 몸을 움크린 채 움찔했다.
"망할, 망할, 망할!"
보스와 Z, 그리고 돈 카르텔로가 있는지휘 텐트.
박살 난 책상 너머로 보스라고 불리는 자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책상을 내려친 주먹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 그가 얼마나 강하게 책상을 내려쳤는지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까지는 변수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황무지의 총독이 왜 거기서 나오느냔 말이야!"
"뭐,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좀비들로는 부족해."
보스의 역정을 들으면서도 Z는 느긋하게 머그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여전히 돈 카르텔로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계획이라도 있나?"
보스가 Z에게 물었다.
"일단 내가 가진 패로는 어림도 없어. 황무지의 총독은 그만큼 가차랜드의 고인물이니까."
Z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눈과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보스가 Z에게 물었다.
"네가 가진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통한 계획은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눈치는 빠르군. 맞아."
"말해."
"화내지 않는다고 말하면."
"...화내지 않을 테니, 말해."
확답을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말을 꺼내는 Z.
"우리가 가질 지분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양산박을 끌어들여."
"...뭐?"
보스는 Z의 말을 듣자마자 역정을 내었다.
그러나 Z는 진지한 표정으로 보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리의 힘만으로도 이길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럼 이득을 보는 쪽은 누구일까? 양산박 아니겠어?"
"양산박이 우리를 흡수하려고 함정을 판 것이다...?"
"그렇지. 애초에 우린 이 거래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채 계획을 세웠어. 그렇지만 지금은 어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물론이고 황무지의 총독까지 모였어. 이제 우리가 수습할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났다고.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린 이기든 지든 파멸이야."
"..."
보스가 Z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잠시 침묵에 잠겼다.
Z는 쐐기를 박아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던지, 이 계획의 좋은 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양산박이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면, 양산박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니 우린 여기서 손을 떼는 것이 맞아. 그리고 도와준다고 해도 우리가 손해 볼 것이라곤 약간의 보상금이 전부지. 어느 방향을 선택해도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오는 거야."
보스가 무의식적으로 Z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양산박과 다시 접촉하도록 하지. 하지만 공세는 계속 시도해. 상대가 우리의 계획을 알지 못하게끔 위장하라는 말이야."
"당연한 말이야."
보스와 Z는 이 계획이 제법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
"..."
이거 줄을 잘못 선 것이 아닐까. 라고 돈 카르텔로가 생각했다.
돈 카르텔로가 고개를 돌려 가차월드를 바라보았다.
이제 절반을 갓 복구한 가차월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돈 카르텔로는 무슨 생각하고 있을까.
글쎄. 표정을 봐선 굉장히 복잡한 듯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