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156화]새로운 세상
* * *
도미닉 경은 쉴 새 없이 방패를 휘둘렀다.
그의 방패 모서리는 자비심도 없는지 박춘배의 약점이란 약점을 사정없이 두드려댔다.
박춘배는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도미닉 경의 공격이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강하고 거센 것도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터지는 스턴으로 인해 몸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말레이는 감히 도미닉 경을 저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박춘배가 공격당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엔 말레이도 도미닉 경을 방해하려고 온갖 수를 썼으나, 이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박춘배는 미칠 것만 같았다.
도미닉 경의 스턴도 스턴이었지만, 도미닉 경의 공격력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것이 제일 문제였다.
1성 딜러인 박춘배의 체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개편 전의 여파가 남아 1성 딜러들 중에서는 조금 높은 편에 속하기는 했으나, 미약한 것은 변함없었다.
그런 박춘배가 도미닉 경에게 지금까지 맞은 횟수는 대체 얼마일까?
그 누구도 세어보지는 않았으나, 박춘배는 본능적으로 수백 번은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체력은 절반이나 남아 있는 상태.
단순한 계산을 통해 죽음으로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앞으로 수백 대는 더 맞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박춘배가 애처로운 눈으로 말레이를 바라보았다.
당장 항복하고 싶었으나 항복이라고 외치려고 할 때마다 도미닉 경의 방패가 그의 인중과 입술에 부딪쳤다.
자기 입으로는 항복 선언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춘배가 말레이에게 대신 항복을 외쳐달라고 눈빛으로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레이는 박춘배의 눈빛을 전혀 읽지 못했다.
도미닉 경의 타격으로 인해 두 눈이 눈동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퉁퉁 부어 버렸기 때문이다.
도미닉 경은 때리고, 박춘배는 맞는다.
그리고 말레이는 멍하게 그런 둘을 구경한다.
마치 반복되는 영상처럼 이어지는 상황.
도미닉 경이 다시 한번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눈을 질끈 감기는 했으나 이미 수백 번을 휘두른 방패는 정확하게 박춘배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였다.
[TIME OUT!]
[10분의 시간이 지나 판정으로 승부의 향방이 결정됩니다.]
[도미닉 경&도미니카 경의 남은 체력 98%.]
[박춘배&말레이의 남은 체력 78%.]
[판정 결과, 도미닉 경&도미니카 경 페어의 승리입니다.]
도미닉 경의 방패가 무언가에 막힌 듯 허공에서 멈췄다.
"...승부가 났구려."
도미닉 경이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방패를 거둬들이고는 박춘배의 배에 올린 다리를 치웠다.
박춘배는 엉망이 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노력했으나, 너무 심하게 맞은 나머지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말레이가 다가와 부축을 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된 박춘배.
말레이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절뚝 걷던 박춘배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도미닉 경을 노려보았다.
"다음번엔 이렇게 허망하게 지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외친 박춘배는 말레이와 함께 천천히 골목으로 사라졌다.
도미닉 경이 황당한 표정으로 박춘배와 말레이가 사라진 골목을 바라보았다.
저 의지만큼은 인정해야겠군.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도미닉 경은 방금 전, 도미니카 경과 번갈아 가며 싸운 것을 기억했다.
어째서 도미니카 경이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도미니카 경이 나와 있었을 때 도미닉 경이 있었던 공간은 대체 무엇일까?
그 말에 대답하듯, 도미닉 경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태그 매치 시스템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하나의 페어가 되어 서로 번갈아 가며 싸우게 됩니다.]
[전투를 진행하지 않는 쪽은 대기실에서 전투 상황을 보게 됩니다.]
[대기실을 꾸며보세요!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 하고 도미닉 경이 탄성을 내질렀다.
슬라임이 있던 그곳은 대기실이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판정으로 이길 수 있었던 건 대기실의 회복 능력 때문이지."
도미닉 경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미닉 경과 비슷하게 삼색의 깃털을 머리에 달고 기사복을 입은 채 방패를 들어 올린 여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도미니카 경이었다.
"그리고... 이 녀석이 도움이 되었고."
도미니카 경이 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 안쪽에는 슬라임이 통통 튀어다니고 있었다.
도미닉 경도 그것을 보고 자기 폰을 꺼내 들어 화면을 켜자, 방금 전까지 사라져 있던 S.P.Y 앱이 다시 돌아온 상태였다.
역시 슬라임이 통통 튀어다니고 있었고.
"슬라임의 복구 능력 덕분에 더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거든."
[[슬라임]이(가) 대기실에 존재합니다. 대기실에 특성 [회복]이 부여됩니다.]
도미니카 경의 말에 부연 설명이라도 하는 듯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도미닉 경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도미니카 경은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상당히 피해를 많이 입었던 상황.
그러나 마지막에 판정을 할 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체력의 합은 98%였다.
처음엔 그 숫자에 의문이 들었으나 대기실에 회복 능력이 있다고 하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나저나, 다시 만나서 반갑소. 도미니카 경."
도미닉 경이 검을 들어 올리며 도미니카 경에게 인사했다.
"나도."
도미니카 경도 검을 들어 올려 도미닉 경에게 인사했다.
참으로 엄숙한 모습.
"저기"
그때,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후배, 여기 이 여성분은 누구야? 누나? 동생?"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눈이 돌아간 왈록이었다.
...
도미닉 경이 인사할 때 방어구 관통이 15% 감소되는 이슈가 있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가까운 술집에서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S.P.Y 앱으로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 보는 것 자체가 각별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여기 있다면 당신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요?"
도미닉 경이 갑자기 든 의문을 도미니카 경에게 물었다.
"아, 그거."
도미니카 경이 오징어 다리 하나를 뜯으며 말했다.
"평행세계라고는 했지만, 사실 우린 정식으로 인가된 세계는 아니야."
도미니카 경이 씁쓸하게 말했다.
속이 타는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킨 도미니카 경이 다시 말을 이었다.
"관측 될 수 없다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세계인 거지."
"그 말은?"
"회귀한 지금, 평행세계는 존재하지 않아."
도미니카 경이 쓰게 웃었다.
"아마 관측된 부분의 일부만 이 세계에 통합되고, 나머지는 사라졌겠지."
도미니카 경이 반쯤 남은 맥주를 바닥까지 남김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도미닉 경은 그런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 그래도 나는 꽤 괜찮은 편이야. 관측에 성공한데다가, 슬라임 덕분에 '정사'에 편입된 거니까."
"정사?"
"그래. 정사."
도미니카 경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너야."
도미니카 경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네 영혼의 복사본에 가깝다고. 아니, 복사본이지."
도미닉 경이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평행세계는 만들어진 세계야."
도미니카 경이 빈 맥주잔을 매만졌다.
"원본을 복사하고 붙여넣은 뒤, 이랬으면 어땠을까? 라며 망상을 끄적이는 것에 가깝지."
도미닉 경은 말없이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수많은 평행세계가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있어. 이건 확실해."
회귀 때 우리 세계가 사라지면서, 진실을 조금 봤거든.
도미니카 경이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몸을 살짝 떨었다.
"나도 그랬어. 나도 하마터면 삭제되는 평행세계에서 사라질 뻔했지만..."
도미니카 경이 힐끗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네 덕분이야."
"내 덕분이라고?"
도미닉 경이 도미니카 경의 말에 반문했다.
"네가 가차랜드에서 인지도를 충분히 쌓은 상태에서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언급한 덕분에 내 가치도 덩달아 올라갔지."
가차랜드의 기치는 가치. 알지? 라며 도미니카 경이 환하게 웃었다.
"내게 '가치'가 생겨 버린 거지. 버리기에 아까운 패가 되어 버린 거야. 덕분에 난... 이렇게 정식으로 존재하게 된 거고."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환한 웃음을 바라보았다.
그 웃음엔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표정과, 사라진 평행세계에 대한 씁쓸함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할게."
도미니카 경의 슬픈 눈이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나에게 가치를 줘서, 생명을 줘서 고마워.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말없이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는 둘.
어색한 침묵.
...그리고 이 침묵을 깬 것은, 도미닉 경이었다.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
"뭔데? 물어봐."
도미니카 경이 언제 슬픈 눈을 했냐는 듯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미닉 경의 말에 무엇이라도 대답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별 건 아니오."
도미닉 경이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평행세계 이벤트가 복각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이미 평행세계의 우리가 이렇게 같이 있는데 말이오."
"아."
도미니카 경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도미닉 경의 질문은 누구나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정작 그 누구도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