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 [155화]태그 매치
* * *
소용돌이 치는 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도미니카 경이 방패를 앞세운 채 걸어 나왔다.
"넌...!"
박춘배가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으나 상태 이상으로 인해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황.
박춘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도미니카 경을 노려보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혼자였다면 말이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말레이의 산탄총이 격발했다.
총구에서 발사된 쇠구슬들이 도미니카 경에게 쇄도했으나, 도미니카 경은 능숙하게 방패를 들어 올려 피해를 경감시켰다.
"2 대 1이라니, 비겁하기도 하지."
방패 너머로 도미니카 경이 씨익 웃었다.
"숫자는 맞춰야 공평하지 않겠어?"
도미니카 경이 검을 꺼내 들었다.
특수 기술은 코스트를 써서 발동해야 했기에 함부로 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박춘배가 스턴에서 깨어나기 전에 정당하고 합법적인 한 방을 먹여주기엔... 충분한 시간이 있기도 했다.
원래 멀리서 소리치는 사람보다는 가까이서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이 더 무서운 경우가 있지 않은가.
도미니카 경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도미니카 경이 박춘배의 앞에서 검을 들어 올리며 말없이 씨익 웃었다.
말레이가 폭탄을 던지거나 산탄총을 쏘아내며 견제했지만, 도미니카 경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박춘배만 집요하게 노렸다.
어떻게 해야 전장에서 공포를 심어 줄 지 알고 있었으니까.
...
"여긴...?"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고, 어째서 나는 여기에 있는가?
도미닉 경이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곧 나타난 시스템 창에 의해 고민은 바로 해소되었다.
[현재 태그 매치 시스템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페어로서 언제라도 자리를 스위칭 할 수 있습니다.]
[체력은 공유되지 않지만, 한쪽이 죽을 경우 다른 쪽도 사망한 것으로 처리됩니다.]
[현재 전투를 진행하는 쪽은 도미니카 경입니다.]
과연. 이것도 가차랜드의 시스템의 일환인 모양.
궁금증이 해소된 도미닉 경은 바로 도미니카 경의 전투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
"음?"
그때였다.
도미닉 경은 문득 자기 옆에서 꾸물대며 나타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놀랍게도 도미닉 경을 배려해 안대를 하지 않은 쪽... 그러니까 도미닉 경 기준으로 오른쪽에서 접근한 무언가.
도미닉 경은 그 무언가의 배려로 바로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슬라임이었다.
"!"
슬라임이 화면 너머로 보는 도미닉 경이 아닌, 너무 화질이 좋은 현실의 도미닉 경의 모습에 놀라 꾸물거렸다.
도미닉 경은 멍하게 슬라임을 바라보다가 자기 폰을 꺼냈다.
폰을 잠시 뒤져 보던 도미닉 경.
S.P.Y앱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도대체 이건...?"
도미닉 경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S.P.Y앱은 사라지고, 슬라임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도미니카 경과 자신이 전투에서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다.
도미닉 경은 정보를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이 앱 때문에 태그 매치 시스템이 활성화 된 건가?
도미닉 경의 추측은 옳았다.
실제로 시스템에서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따로 취급하면서도 슬라임의 존재로 인해 둘을 하나의 존재로 보고 있었다.
둘이서 하나, 하나가 둘.
이 황당하면서도 가차랜드니까 있을 법한 상태를 확인한 중앙 시스템은 회장의 말에 따라 둘을 하나로 엮었다.
슬라임을 매개체로 태그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닉 경이 슬라임을 톡톡 건드렸다.
슬라임은 그 손길이 마음에 드는 듯 말랑말랑한 푸딩처럼 흔들거렸다.
"적어도 우리에겐 나쁠 것은 없어 보이는군."
도미닉 경이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니카 경은 현재 집요하게 박춘배를 따라붙으며 공격하고 있었는데, 너무 가까운 나머지 특수 기술 [충격과 공포]가 빗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미니카 경은 피해 감소 효과를 가진 기술이 없었기에 말레이의 지원사격에 너무 취약하게 노출된 상황.
도미닉 경은 잠시 전투의 흐름을 살폈다.
[스위칭 하시겠습니까? [Y/N]]
[스위칭에는 상대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혹은 위급한 상황에서 긴급하게 쓸 수도 있습니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싸우는 것이라면 몰라도, 가까이서 붙어서 싸우는 개싸움은 도미닉 경의 특기니까.
도미닉 경은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 아니, 검을 뽑아 들기 전 방패를 든 채로 슬라임을 한 번 쓰다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묵묵히 3인칭의 시점에서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니카 경이 자기 교체 요청을 수락하길 바라면서.
...
"큭. 이거 좀 위험한데."
도미니카 경은 제법 아프게 들어오는 산탄총의 피해에 실소를 머금었다.
도미닉 경의 라이벌인 두 사람의 일격은,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인 도미니카 경에게도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탱커로서 각성한 이후, 이렇게나 위기에 처한 '느낌'을 또 언제 느꼈었더라?
글쎄. 적어도 최근 일주일 이내로는 겪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도미니카 경은 방패 뒤에 머리를 숨겼다.
방패에 산탄총의 탄환이 부딪쳐 생기는 반발력이 느껴졌다.
도미니카 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위험한데.
도미니카 경의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따라붙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후 추격타를 실패하며 다시 박춘배와 말레이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상태.
다행스럽게도 아직 박춘배를 따라붙기는 했으나, 마무리하기에는 도미니카 경이 가진 패가 조금 부족했다.
그때였다.
[도미닉 경이 당신과 자리를 바꾸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도미닉 경의 요청이 눈앞에 떠올랐다.
도미니카 경은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자리를 바꾸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그러나 도미니카 경의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상황대로 흘러가다간, 주도권을 다시는 찾아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어도 변수를 만들 수는 있겠지. 라고 생각한 도미니카 경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그랬듯 도미니카 경은 슬라임이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
퉁! 하고 하늘에서 깃발이 떨어져 땅에 꽂힌다.
갈색의 배경에 하얀색으로 그려진 주목과 까마귀가 바람을 따라 펄럭이기 시작한다.
"...도미닉 경!"
박춘배가 으르렁거렸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도미닉 경의 짝퉁... 도미나카 경을 피해 요리조리 도망다니던 박춘배는 진짜 도미닉 경이 나타나자 더욱 급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대처가 더 빨랐다.
도미니카 경이 있던 자리는 박춘배의 바로 앞.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과 자리를 바꿨기에 바로 박춘배의 앞에서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박춘배의 가슴팍을 밀어 쳤다.
"윽!"
박춘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일단 거리를 벌리고 보자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건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다시 한 걸음 움직이며 방패로 한 방.
그러나 이번엔 방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어느새 도미닉 경의 왼쪽 다리가 박춘배의 두 다리 사이로 들어간 상황.
자연스럽게 안다리를 걸며 방패를 밀어친다.
박춘배의 상체가 충격으로 인해 뒤로 넘어가고, 하체는 도미닉 경이 붙잡아 앞으로 당겨진다.
"어어?"
필연적으로 박춘배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넘어진 박춘배의 위로 도미닉 경이 지그시 발을 올리고 지르밟는다.
박춘배는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도미닉 경이 조금 더 힘을 주자 할 수 있는 일은 두 손으로 도미닉 경의 발목을 잡거나 발로 걷어차려는 애처로운 몸짓밖에 없었다.
도미닉 경은 조용히 박춘배를 내려다보았다.
이로써 박춘배의 기동성은 완전히 봉인된 상황.
"박춘배!"
말레이가 당황하며 산탄총을 쏘며 다이너마이트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현재 11.25%의 피해 감소가 적용된 상황.
아무리 피해 증가가 적용되었다지만 성급과 스펙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도미닉 경이 곤란함을 느낀 것은 박춘배와 말레이에게 일방적으로 당한다는 것이었지, 이렇게 도미닉 경이 주도권을 가져온다면 말이 달라지는 것이다.
도미닉 경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지어 보는 행복한 미소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도미닉 경의 그늘진 얼굴이 썩 싸늘하게 보여 박춘배는 발버둥을 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박춘배의 등줄기에서 서늘한 감각이 식은땀과 함께 흘러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걸 보고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소."
도미닉 경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박춘배에게 말했다.
"체크 메이트. 라고 하던가?"
아. 망할.
박춘배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방패의 모서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인중에 방패를 세 번 맞고 나서부터는 싹 사라졌다.
스턴. 스턴. 스턴.
도미닉 경의 장비 효과로 인한 스턴이 계속해서 터졌다.
방패로 타격 시 12% 확률로 터지는 스턴이, 끊임없이.
대기실에 있던 슬라임이 그 모습이 사뭇 두려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