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151화]난장판
* * *
가차랜드의 지하에는 하수도가 존재한다.
일반적인 생활 하수, 오폐수, 방금 전 관리자에게 삭제된 게시글, 프로젝트가 엎어지며 필요 없어진 코드들과 더미 데이터가 잔뜩 엉켜 악취를 풍기는 하수도.
얼마나 더러운지 중앙 시스템의 시선마저 피할 수 있다는 도시 전설이 있는 이 하수도에 몇 명의 사람이 나타났다.
너덜너덜한 넝마를 머리끝까지 푹 눌러쓴 이들은 램프를 들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갈림길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다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일종의 신호였다.
접선을 위해 상대가 말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27번째 갈림길을 꺾었을 때 반대편에서 수상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참 보기 힘들구만."
넝마를 쓴 사람 중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이 이죽거렸다.
그가 손에 든 램프를 뒤에 있는 이에게 넘기며 후드를 벗었다.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 박춘배였다.
"뭐, 당연한 것 아닌가? 왕의 앞에 서는 영광을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는 일이지."
반대편에 있던 남자가 거만하게 말했다.
양산박의 간부, 왕이었다.
그의 뒤에는 조제프 준장이 황후의 복장을 입고 죽은 눈을 한 채 박춘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박춘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좋아. 그런 거는 다 이해한다고 치자고."
어디에서 꺼낸 건지 모를 발리송 나이프를 뱅글뱅글 돌리기 시작한 박춘배.
"그런데 말이야..."
박춘배가 발리송 나이프를 탁하고 닫았다.
그리고 왕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해킹 툴, 엉터리더라고."
"저런."
왕이가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설마 막혔을 줄 누가 알았겠나."
왕이는 이미 해킹 툴이 막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자금 확보를 위해 일성 동맹에게 거짓말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박춘배.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었기에 그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불량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박춘배의 뒤에 서 있던 말레이가 앞으로 나섰다.
램프를 들고 으스스한 표정을 지은 말레이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환불은 못한다고 쳐도, 적어도 약간의 보상은 해야 할 것 아니야?"
왕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감히 1성짜리들이 양산박의 간부인 이 왕이에게 말대꾸를 한다고?
"감히..."
왕이가 이 염치 없는 천민들에게 불만을 품고 주먹을 꽉 쥐었다.
"마스터. 참으셔야합니다. 아직 대의를 위한 명분을 쌓지 못했습니다."
조제프 준장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왕이를 말렸다.
"...그래. 그렇지. 맞아."
왕이의 분노가 풀렸다.
왕이는 꿈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가차랜드를 자기 손아귀에 넣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했다.
물론 지금까지 세력을 모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행정부 습격 당시 있었던 대부분이 사로잡혀 행정부 지하에 감금된 상태.
왕이가 일성 동맹을 힐끗 바라보았다.
1성 답게 떨거지들이었지만, 왕이는 지금 찬 물 더운 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런 녀석들이라도 있어야 할 만큼, 왕이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지..."
왕이가 완전히 흥분을 가라앉히고 박춘배에게 유혹하듯 말했다.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 어떻든 간에, 네놈들이 원하는 것은 탱커의 몰락. 아닌가?"
박춘배가 왕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의 눈에 가득한 의지를 확인한 박춘배가 무심코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왕이가 멋있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수도의 더럽혀진 더미 데이터가 첨벙하고 밟혔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우린 도미닉 경 하나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알 바 아니지. 라고 왕이가 중얼거렸다.
사실, 이미 왕이는 엄청난 자본력으로 탱커 노조를 회유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탱커 노조는 이름값을 하듯 단단하기 그지없었고, 회유는커녕 잔뜩 치욕만 당한 채 돌아왔던 것이다.
그 이후, 왕이는 탱커 노조에 대한 강렬한 악의를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도미닉 경이라."
박춘배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일성 동맹이 처음 발족되었을 때에는 지금처럼 탱커를 혐오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성급 사이의 인식이나 대우가 너무 차이가 나던 시기였다.
1성들은 노예나 다름없을 정도로 차별받았고, 이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서 발족했던 것이 이 일성 동맹.
그러나 행정부가 바뀌고 성급 사이의 차별이 점점 사라지면서 일성 동맹은 방향성을 잃었다.
자연스럽게 일성 동맹의 리더, 박춘배의 발언권도 많이 약해져 버린 상황.
이미 권력의 편린을 맛보았던 박춘배는 이때부터 서서히 타락해가고 있었다.
근접 딜러 연합.
이것도 박춘배가 준비한 카드였다.
트롬 의원의 주도로 거금의 후원을 받은 박춘배는 그 자금을 통해 일성 동맹을 유지했다.
대신, 일성 동맹은 근접 딜러 연합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특정 의원의 집에 불을 낸다거나, 선거 활동을 방해한다거나...
그러나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던가.
박춘배는 이미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근접 딜러 연합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선봉장이 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일성 동맹의 취지도 처음과 달라진 지 오래.
현재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탱커들의 실각이었다.
더 나아가, 탱커라는 족속을 이 가차랜드에서 없애버리는 것이었고.
"우린 모든 탱커를 차별 없이 대하기로 약속했지."
박춘배가 왕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뒷배는 당신들이니, 약간의 타협을 해도 상관없겠지."
박춘배가 비열하게 웃었다.
그렇다.
박춘배는 지금까지 야합으로 살아온 남자.
새로운 주인을 위해 가지고 있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다만, 그 쉬운 일하면서 보상을 받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좋아."
왕이가 거만하게 박춘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거래'의 기본은 된 것 같군."
"아아, 그래."
박춘배와 왕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왕이는 도미닉 경을 얻고, 이후 가차랜드를 얻을 생각이었다.
박춘배는 탱커들을 몰락시키고 추방한 뒤, 가차랜드의 권력을 잡을 생각이었다.
서로가 바라는 것은 조금씩 달랐으나,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꽤... 유익한 시간이었네."
"음. 마찬가지야."
깊고 깊은 하수도에 존재하는 비밀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비밀 조약은 성공적으로 조인되었다.
"우리가 날뛰고, 당신들이 지원한다. 요약하자면 그렇단 말이지?"
박춘배가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하듯 요약한 내용을 말했다.
"물론. 우리의... 최신 기술까지 말이지."
왕이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림자 진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 얼굴은 도저히 순수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박춘배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박춘배도 양산박의 지원을 받고 배신할 기회를 잡고 있었으니까.
양산박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든, 마지막에 웃는 것은 우리일 것이다.
박춘배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왕이도 같은 생각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
며칠 후.
도미닉 경은 오랜만에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경비 부서에 출근했다.
왈록은 여전히 도넛과 함께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의 도넛은 알록달록한 토핑이 올라간 초코 도넛인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여기도."
도미닉 경이 경비복으로 환복한 채 자리에 앉았다.
"응? 무슨 소리야?"
왈록이 의아하다는 듯 도넛 하나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성실하게 일하러 왔었잖아? 중간에 유급 휴가를 한 번 쓰기도 했지만."
"...?"
도미닉 경은 왈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시스템 인더스트리가 열리지 않아 오지 못했는데, 왈록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심지어 중간에 한 번 열렸을 때에도 광고를 찍는답시고 출근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무슨 소리입니까, 선배?"
"갑자기 왜 그래, 후배?"
어째서인지 서로 헛도는 대화.
서로 얼굴 가득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상태에서 왈록이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아."
왈록이 무언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때가 가까워지는구나. 어쩐지."
"그때요?"
도미닉 경이 왈록에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아직은 알 필요 없겠지."
왈록이 도넛 하나를 더 씹어먹으며 말했다.
"그냥 시간 선이 잠시 꼬였다는 것만 이해하면 되는 거야."
"...?"
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왈록.
왈록은 도미닉 경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관측되지 않은 시각은 반드시 그 행동을 완료한 것으로 친다. ■■추정의 법칙이지."
"그리고 이 법칙이 가장 활발해질 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회장이"
"아니, 아니다."
"그냥 넌 지금까지 여기 왔고, 일을 한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지?"
"이건 한 번 겪어야 이해가 될 테니까."
도미닉 경은 왈록의 당부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차랜드에서 꽤 오래 산 왈록의 말이었으니 들어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왈록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초코 도넛 하나를 손에 들었다.
"폭발이... 오늘이었던가?"
왈록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돌려 왈록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왈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때,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렸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상업 지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미닉 경이 다시 왈록을 바라보았다.
왈록의 예언 아닌 예언이 실현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