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150화]난장판
* * *
"아무튼, 일단 미안하다는 말하고 싶소."
도미닉 경이 판데모니아에게 말했다.
"아직은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말이오."
"아, 역시나."
판데모니아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
"대신."
도미닉 경이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판데모니아는 그 단호함에 놀라 도미닉 경과 시선을 마주쳤다.
도미닉 경의 눈은 거절하는 사람의 시선 치고는 꽤 호의적인 느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만일 내가 클랜에 가입한다고 한다면... 그 첫 번째는 탱커 노조가 될 거요. 기사로서 약조하리다."
판데모니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비록 원하던 말은 아니었지만, 그에 따르는 약속이 도미닉 경의 입에서 나왔다.
판데모니아는 잠시 말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에야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약속한 거다?"
판데모니아가 활짝 웃었다.
적어도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을 얻었으니까.
...
"웃어?"
그리고 이 장면을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여기 한 명.
히메는 지금까지 도미닉 경과 판데모니아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보고 있었다.
입 맞추듯 얼굴을 포갠 이후부터 도미닉 경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판데모니아가 다시 환하게 웃는 모습까지.
어째서인지 히메의 가슴이 아렸다.
사랑인가? 도미닉 경을 사랑하는 마음에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것인가?
그럴 리가.
사실, 이건 히메가 스스로 분을 이기지 못해 혈압이 과도하게 상승해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질투라고 단정 지은 히메에게 그 의학적인 정보가 무슨 소용일까?
이제 히메의 표정은 오히려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변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이렇게 고요히 분을 삭히는 상태가 더 위험한 법이다.
그렇게 히메는 고요한 분노를 담은 눈으로 판데모니아를 노려보았다.
...
"음?"
판데모니아가 어째서인지 소름이 돋는 듯 팔을 부여잡고 오소소 떨었다.
"무슨 일이오?"
도미닉 경이 판데모니아에게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냉방이 좀 과한가?"
판데모니아가 에어컨을 바라보았다.
24도. 적정온도 안이었다.
이상하네. 라고 생각한 판데모니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가차라떼를 들이켰다.
마지막 한 모금.
판데모니아가 열심히 빨대를 쪽쪽 빨아봤으나 이제 남은 것은 없었다.
"흠. 다 마셨네. 도미닉 경은 어느 정도 남았어?"
"이미 다 마신 상태요."
도미닉 경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판데모니아가 도미닉 경과 룩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고. 도미닉 경에게 대답도 들었겠다, 이제 용건은 다 해결했으니까."
무엇보다도... 아직 과제를 덜 끝냈단 말이야. 라고 판데모니아가 중얼거렸다.
도미닉 경은 과제? 라고 의문을 품었으나, 이내 이와 비슷한 말을 하던 이들을 생각했다.
가차업지의 개발자들.
아무래도 그녀는 대학 생활을 영위하는 모양이었다.
작은 정보를 얻었군. 하고 도미닉 경이 스스로 대견해했다.
이제 도미닉 경은 다른 이들에게 묻지 않아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가차랜드에 익숙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아직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장족의 발전이라는 건 변함이 없으리라.
"그럼, 이제 헤어지도록 하자."
판데모니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여전히 온몸에 진액이 흘러내리는 상태였지만, 그녀가 앉은 자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했다.
도미닉 경이 그 기묘한 상황에 호기심이 생겨 판데모니아에게 물어보았다.
"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실례가 될 것 같은 일은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아."
판데모니아가 강한 어조로 도미닉 경의 질문을 막았다.
"그게, 여자에게 상처를 줄 것 같으면 더더욱."
판데모니아가 몸에 흐르는 진액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무언가 비밀이 있군.
도미닉 경이 생각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판데모니아의 말대로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 아니던가.
사실 자기만의 장원을 가지고 싶었다거나, 혹은 마을 한두 개를 몰살 시켰다거나, 혹은 협정을 어기고 포로에 대한 과도한 고문을 한다던가...
그 간단한 진리를 떠올린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후 판데모니아에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상처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소."
"뭐, 괜찮아. 익숙하니까. 처음엔 거절도 못하던 때가 있었지."
판데모니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용건은 다 끝났으니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자고."
메이드장 룩이 가장 먼저 가게를 빠져나갔다.
주차해 뒀던 탈 것을 빼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미리 움직인 것이다.
그다음 도미닉 경과 판데모니아가 같이 가게를 나왔다.
"날씨 좋네. 시간이... 아직 점심이구나. 점심 뭐 먹지? 도미닉 경. 추천하는 거 있어?"
판데모니아는 살갑게 도미닉 경에게 질문했다.
도미닉 경이 탱커 노조에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호감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자연스럽게 친해지려고 도미닉 경에게 사소한 질문을 던진 판데모니아.
도미닉 경은 그 자연스러운 질문에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나는 미트볼을 먹을 생각이오. 크랜베리 잼을 곁들인 미트볼."
"그거 좋지. 나도 오늘은 미트볼을 먹을까..."
판데모니아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실례합니다."
아니, 자연스럽게 이어졌었다.
"도미닉 경."
히메가 나타나기 전까진.
...
"실례합니다. 도미닉 경."
히메의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도미닉 경이 히메를 바라보았다.
히메의 등 뒤에서 어두운 아우라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히메의 등 뒤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형상화한 듯한 어둡고 끈적한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옆에 여성분은 대체 누구신지?"
히메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표정이 미소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얇게 휜 눈이며, 기괴할 정도로 솟은 입꼬리에서 위화감이 느껴졌으니까.
도대체 히메 공이 왜 저러는 거지? 또 비밀 결사 요.양.원.에게 넘어갔나?
도미닉 경이 히메의 상태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사이, 판데모니아는 이 상황을 바로 파악해냈다.
아, 이거 치정 싸움이네.
판데모니아가 도미닉 경과 히메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아침 드라마.
판데모니아는 아침 드라마를 참 좋아했다.
엉망진창인 인간관계, 그만큼 꼬여 버린 인과관계...
물론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잘생겨서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그 난장판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을 좋아했다.
그런데 눈앞에 아침 드라마 급 상황이 떡 하니 펼쳐진 상황.
판데모니아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지금도 충분히 자극적이었지만, 판데모니아를 만족시키기에는 조금 아쉬운 상황.
아침 드라마를 좋아하는 시청자, 판데모니아는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판데모니아의 결정은 바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판데모니아가 도미닉 경의 팔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라? 누구신데 우리 도미닉 경에게 질.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다.
판데모니아의 결정은 바로 '더 심각한 난장판을 만든다.'였다.
"판데모니아 경?"
도미닉 경이 갑작스러운 판데모니아의 태도 변화에 놀라 하나 남은 눈을 부릅떴다.
도미닉 경의 눈 만이 아니었다.
히메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어 올랐다.
글쎄. 지금까지 히메가 겪은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히메의 질투로 보아 그녀는 확실하게 도미닉 경을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히메.
히메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판데모니아의 말 중 하나가 히메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헤집었기 때문이었다.
'누구신데 우리 도미닉 경을'
그렇다.
히메는 도미닉 경을 사랑하기는 했으나, 아직 도미닉 경과 관계성이 어정쩡한 상태.
어떤 관계나고 물어본다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참 동안 판데모니아를 노려보던 히메는 차마 대답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상황이 너무 서러워 히메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친구요."
히메는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어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가차랜드에서 가장 먼저 사귄... 친구요."
도미닉 경이 히메를 도와주려는 듯 판데모니아에게 말했다.
"그리고 장난은 그만두시오, 판데모니아 경. 히메 공이 오해하지 않소."
"흐흥."
도미닉 경의 경고에 판데모니아가 팔짱을 풀고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도미닉 경이 오해가 풀렸는지 확인하려고 히메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히메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친구..."
히메의 머리에서 여우 귀가 튀어나왔다.
꼬리와 함께.
"여성 친구..."
히메는 생각했다.
친구 사이라니.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답니다. 친구라는 말은, 곧 연인으로 발전하거나 헤어진다는 뜻이지요.'
스승님 들 중 하나의 조언.
'가차랜드에서 가장 먼저 사귄...'
호의적인 도미닉 경의 말.
히메는 오랜만에 너무나도 깊고 어두운 생각에 도달했다.
귀와 꼬리가 맹렬하게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
펑. 하고 얼굴이 새빨개진 히메.
그 모습을 바라보던 판데모니아가 생각했다.
재밌는 사람이네. 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