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41화]복각
* * *
"왜 안 떠? 왜 안 떠?"
"도미닉 경... 획수가 17획... 마침 17번째 카드팩... 이번엔 뜬다!"
"도미닉 경 카드는 사석포 한 방에 안 죽어."
"모든 개척자는 어느 정도 정신병이 있는 것 같아."
"와! 도미니카 경 아시는구나!"
"황금 투구게가 여기서 왜 나와...?"
"사나이가 좌절감을 키우는 것이다!"
"어흐흑... 맛있었다. 오늘 가챠도..."
언제나 그렇듯 희노애락으로 가득한 카드 팩 교환소.
사람들이 내뿜는 부정적인 감정이 모여 소용돌이치며 더 많은 사람을 광기로 몰아넣는 곳.
"아, 광기. 내 오랜 친구여."
그리고 카드 팩 교환소의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장소에서 죽엽청 술병을 손에 든 셴롱이 광기에 빠진 어린 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휴가가 남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나도 저기 휩쓸릴 뻔했군."
셴롱이 죽엽청을 주욱 들이켰다.
목을 태우려는 듯 독하면서도 달달한 액체가 목구멍을 통해 벌컥벌컥 들어간다.
마침내 입에서 불을 뿜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만족한 후에야 술병을 내려놓은 셴롱.
"안 그런가, 도미닉 경?"
술에 취해 그냥 용에서 적룡이 되어 버린 셴롱의 말에 도미닉 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미닉 경은 셴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 하는 상태였다.
도미닉 경은 지금 로비에서 도미닉 경의 카드를 뽑으려는 이들의 광기와 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집중해서 말이다.
"...나름 명성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셴롱이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있던 죽엽청은 이미 빈 병이 된 상태였다.
"역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구려."
도미닉 경의 카드를 뽑고 환호하는 사람들.
도미닉 경의 카드를 뽑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들.
뽑지 못한 이들을 놀리는 사람들.
뽑은 이들에게 분노를 노출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도미닉 경의 카드가 만들어낸 여파였다.
도미닉 경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런 도미닉 경을 보며 셴롱이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셴롱이 도미닉 경에게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계획한 일이었다.
셴롱이 보기에, 도미닉 경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평범함보다는 소심하다고 평할 수 있을 정도.
가차랜드가 아니라 다른 차원이었더라면 도미닉 경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겸손한 것이겠지만, 가차랜드에서는 너무 '재미없는' 성격이었다.
셴롱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보아왔고, 당당하게 캐릭터 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가차랜드에서 성공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은 이.
그가 보기에 도미닉 경은 더 나아질 수 있음에도 현실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행한 업적이 대단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성능과 캐릭터성은 다른 문제.
조금만, 조금만 더 개성이 강하다면...
그래서 사람들에게 확 와닿을 캐릭터 성을 구축한다면...
그때야말로 도미닉 경이 가차랜드의 1티어에 올라서는 날일 것이다. 라고 셴롱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한 번에 확 바뀌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셴롱은 가벼운 한 걸음, 그 한 걸음을 위해 등을 살짝 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자존감'이라는 한 걸음을.
셴롱이 보기에 도미닉 경이 부족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었다.
당당하고 진취적인 성격이지만, 어째서인지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극도로 낮은 도미닉 경.
셴롱은 그런 도미닉 경의 평가, 정확하게는 도미닉 경 스스로 내린 평가를 수정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도미닉 경의 카드를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을 내려다보는 것.
이것이 바로 도미닉 경의 자존감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키가 되리라.
"...이 광경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요?"
도미닉 경이 셴롱에게 물었다.
도미닉 경은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도미닉 경 스스로 내린 평가와 세간의 평가의 괴리감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네의 성장."
딸꾹. 하고 용이 작은 불을 뿜었다.
죽엽청의 도수가 꽤 높은 탓에 셴롱은 조금... 아니, 많이 취한 듯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셴롱은 말을 이어 나갔다.
"가차랜드에서 오래 살다 보면 사람들이 몇몇 부류로 나뉘지. 양산박처럼 힘을 탐하거나, 개척자들처럼 컨텐츠를 찾아 떠돌거나... 혹은 나처럼 후배를 키우거나."
말이 후배를 키운다는 거지, 일종의 뉴들박이지, 뉴들박. 이라며 셴롱은 도미닉 경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내뱉었다.
"후배를 키우는 이유도 여러 가지 일세. 그냥 호의를 베풀거나, 아니면 나중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거나, 자기 클랜에 초대할 명분을 쌓는다거나..."
셴롱의 말이 잠시 멈췄다.
알콜 성분이 돌면서 그의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는 간단해.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물었을 때, 내가 도미닉 경을 키웠노라. 도미닉 경 지분의 1% 정도는 내가 주장할 수 있노라. 하고 자랑하려는 속셈이지."
늙으면 다 주책인 법일세. 라고 말하며 용이 낄낄 웃었다.
"그래서, 자네의 성장을 위해 이 광경을 꼭 보여주고 싶었네. 내가 보기에, 자네의 성장을 막는 건... 자네 스스로인 것 같아서."
용은 그럴듯한 말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나저나, 나도 궁금한 점이 있네."
"무엇이오?"
소파에 앉아 새로운 죽엽청을 뜯은 셴롱이 도미닉 경에게 의문점을 말했다.
"내가 알기로 도미니카 경의 카드는 평행세계 이벤트 때의 카드가 아닌가. 그렇다면 평행세계 이벤트 때 복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옳지."
"그런데 자네는 5만 장의 도미닉 경의 카드와 함께, 5만 장의 도미니카 경 카드도 복각할 수 있더군. 그래. 평행세계에 있어 할 수 없는 일을 해 버렸다는 말일세."
셴롱은 자신의 혀만큼 생각이 꼬여 엉망진창인 말이 튀어나왔으나, 셴롱이 하고자하는 말은 간단했다.
어떻게 도미닉 경이 도미니카 경의 카드를 '복각'할 수 있었는가?
사실, 도미닉 경은 카드 복각을 결심한 날 밤, 도미니카 경과 연락했다.
...
"당신의 카드를 재판하고 싶소."
["재판? 아. 다시 찍는다고."]
도미닉 경은 천사가 돌아간 이후 S.P.Y앱을 통해 평행세계의 도미니카 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도미니카 경도 도미닉 경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생각이었던지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는 모양이다.
["어째서?"]
"사실,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소. 하필 우리 카드를 낸 때가 평행세계 이벤트 때지 않소. 그때 두 카드를 모두 얻은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소. 혹은 당신의 카드만."
["아하. 그러니까, 지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서로의 카드를 다시 찍자?"]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렸다.
["세상에. 내가 먼저 제안하고 싶었는데."]
수화기 너머의 도미니카 경이 말했다.
["사실, 나도 카드를 다시 찍기로 했거든."]
실제로 수화기 너머의 도미니카 경도 이미 천사가 방문을 한 직후였고, 카드를 재판하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소."
["무슨 문제?"]
"서로의 카드를 재판하려면, 서로의 카드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아. 그건 걱정하지마."]
도미닉 경의 걱정은 정당한 것이었다.
실제로 서로의 카드는 서로가 가지고 있었으며, 평행세계 선에 머무르는 한 서로에게 물건을 보내거나 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러나 도미니카 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도미닉 경을 안심시킨 후, 자기 계획을 말했다.
["지금 너와 나 사이에 데이터를 전송시킬 좋은 매개체가 하나 있잖아."]
"매개체...? 설마 슬라임을 말하는 거요?"
["맞아."]
슬라임이 자기 이름이 불린 사실을 알았는지 깜짝 놀라며 화면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있는 방향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 내가 왜?'라는 듯 행동했다.
["슬라임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면, 서로의 세계에서 반대편의 캐릭터를 재판할 수 있겠지."]
도미니카 경의 계획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잠시 이 일에 대해서 고민하던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제안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이것이 바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카드가 같이 나오는 이유였다.
...
도미닉 경은 자기 카드를 복각한 이후, S.P.Y앱에 거주하는 슬라임을 통해 도미니카 경의 데이터를 복제했다.
어쩌면 중앙 시스템을 속인 나쁜 행위가 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중앙 시스템은 이것을 정당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도미니카 경은 괜히 다른 사람이 알았다가 큰일로 번질 수 있다고 염려한 적이 있었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조언대로 이 사실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비밀이오."
"비밀이라. 비밀. 나쁘지 않지. 비밀은 사람을 신비하게 만들어 주거든..."
도미닉 경에 껄껄 웃으며 대답한 셴롱이 소파 위로 털썩 쓰러졌다.
도미닉 경이 깜짝 놀라 셴롱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다행히 그저 취한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자존감이라."
도미닉 경은 셴롱을 제대로 눞히고 소파에 앉아 카드 팩 교환소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셴롱이 한 말이 머릿속에 남아 도미닉 경에게 계속 속삭였다.
'자네의 성장을 위해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네.'
'자네의 성장을 막는 건... 자네 스스로인 것 같아서.'
도미닉 경이 고뇌하거나 말거나 로비는 여전히 광기와 혼돈으로 가득했다.
"도미닉 경... 도미닉은 D로 시작하지... D는 로마 숫자로 500을 뜻하고... 마침 이건 50번째 팩, 즉 500연차... 500번째엔 뜬다!"
"왜 나만 안 떠? 왜 나만 안 떠?"
"도미닉 경은 사석포 한 방에 안 죽어."
여전히 로비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로비를 바라보며, 도미닉 경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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