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139화]복각
* * *
가차랜드 외곽에 위치한 황무지 개척지대.
"조금 있으면 이매진 빌더 이벤트네요."
"응? 너 이매진 빌더 없던가? 아. 맞다. 2포인트 모자라서 교환 못했다고 했지."
황무지 차고 앞 흔들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소년과 소녀.
보랏빛 머리카락의 소년이 검은 머리에 안경을 낀 소녀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너 오랜만에 아바타 바꾼다? 하긴. 보라색 괴물보다는 그래도 인간다운 소년이 낫지."
"뭐라는 겁니까. 저도 아바타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보라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소년의 정체는 바로 총독.
이 황무지의 개척자였다.
"그런데 왜 모습을 바꾼 거야? 너 평생 예전 커스터마이징으로 살겠다고 했었잖아."
"부관에게 도미닉 경 뽑으려고 쓴 금액을 들켰거든요."
아. 하고 탄식을 내뱉은 소녀가 소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조금 여윈 듯한 소년의 씁쓸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나저나, 왜 여기 오신 겁니까, 클랜장?"
여기서 소녀의 정체가 드러났다.
소녀는 바로 총독이 소속된 클랜의 클랜장이었다.
총독이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장교 모자를 꺼낸 소녀가 모자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뭐,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오나? 그냥 잡담이나 나누러 온 거지."
"그 모자나 벗고 말하십쇼. 누가 봐도 공적인 일로 왔구만. 레이드 문제입니까?"
"...응."
클랜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는 네 도미닉 경의 파견을 요청하러 왔지."
클랜장의 도움 요청에 총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황무지는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황무지는 하나의 차원이 수천, 혹은 수만으로 쪼개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차원을 관리하는 것이 총독이라는 지위.
당연하게도 쪼개진 다른 차원에도 총독들은 존재했다.
클랜장도 그런 총독들 중 하나였고.
"저도 이매진 빌더 이벤트하려면 도미닉 경이 필요합니다만."
총독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매진 빌더 이벤트는 적의 공세를 막아 내고 역습을 가해 이매진 빌더를 포획하는 스토리.
사막의 공포 이벤트가 나름 쉬운 이벤트인 만큼 그 반동으로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벤트였다.
심지어 총독의 부대는 유리 대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몸이 약한 상태.
도미닉 경이 없다면 저번처럼 제대로 깨지 못해 2포인트가 부족한 상황이 재현될지도 몰랐다.
"이번 레이드 보스가 진짜 미친 듯이 강해서 말이야. 잘못하면 우리 길드 순위가 골드로 내려갈 수도 있어."
"...골드 말입니까?"
가차랜드의 클랜은 랭킹에 따라서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지금까지 총독의 클랜은 혹은 플래티넘 등급을 꾸준히 유지해왔었다.
다이아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골드는 가기 싫은 정도의 위치.
"알다시피 총독들의 부대는 전부 유리 대포잖아.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방어력을 깎거나, 공격력을 늘리거나, 추가적인 피해를 주거나.
지금까지 레이드 공략법은 그래 왔었다.
그러나 이번 레이드 보스는 달랐다.
'기믹'을 파훼하지 못하면 피해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
그 기믹을 파훼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가 점수의 갈림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도미닉 경이 필요해. 도미닉 경의 피해 감소로 어떻게든 버티면... 어쩌면 다이아 등급도 노릴 수 있을지도 몰라."
총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은 말 그대로 버티는 데 특화된 캐릭터.
무엇보다도 유리 대포인 부대원들이 조금 더 살 수 있는 기술 마저 보유하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도미닉 경이 필요한 상황.
그러나 총독은 고민에 빠졌다.
이매진 빌더와 레이드.
사실, 이매진 빌더는 총독에게 딱히 필요 없는 상황이었으나 도감작이 문제였다.
이매진 빌더를 포획하면 3시즌 도감을 100% 채워 그 업적 보상으로 전용 무기 선택권과 다량의 가차석을 받을 수 있는 상황.
저번 이매진 빌더 이벤트부터 복각까지 약 1년이 걸렸으니, 다음 기회는 1년이 지나야 되리라.
레이드의 경우 그가 얻을 수 있는 건 레이드 보상과 길드의 등급에 따른 혜택.
무엇보다도 다이아 혜택은 플래티넘 혜택보다 약 1.2배 정도 좋았기에 충분히 이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총독이 고민에 빠진 동안, 클랜장은 모자의 챙을 매만지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죄송하지만"
마침내 총독이 결정을 내리고 클랜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총독의 전화기에서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받고 말해줄래?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야."
"...죄송합니다. 그럼 잠시."
총독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지휘관.
그의 영원한 숙적 중 한 명이었다.
어째서 지휘관이 총독에게 전화를 건 것일까?
사실, 둘은 서로에게 전화를 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총독은 이 전화를 받아야 할지 고민했으나, 이렇게 전화를 걸 정도면 꽤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신가, 지휘관 씨?"
["이거 봐라?"]
이걸 보라니, 무엇을? 하고 생각하며 잠시 전화기를 향해 고개를 돌린 총독은 이 전화가 사실 영상통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왜 영상통화를 걸었는지 물어보려던 총독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지휘관의 손에 들린 도미닉 경의 카드를 본 것이다.
그것도 두 장이나.
"...어디서 난 거지?"
그가 알기로 지휘관은 도미닉 경의 카드를 뽑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휘관의 손에 들린 카드가 가짜거나, 혹은...
["뽑았지. 방금 전에."]
복각이란 소리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총독 씨."]
지휘관의 방독면이 일렁거렸다.
분명히 비열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중요한 건... 신 카드지."]
지휘관이 마술을 하듯 손등에서 카드 하나를 드러내었다.
[라이더 도미닉 경(★★★)]
총독의 눈이 부릅 떠졌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던 카드.
그 카드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복각과 함께... 신 카드가 출시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엔 내 승리다. 으흐하하하하!"]
뚝. 하고 통화가 끊겼다.
그리고 총독의 이성도 뚝 하고 끊겼다.
"...괜찮아?"
클랜장이 조심스럽게 총독에게 물었다.
그러나 총독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
나름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이가 먼저 앞서가 버린 것에 대한 분노.
새로운 카드가 나왔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혐오.
한, 고통, 절망, 슬픔, 분노, 어둠.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총독을 지배했다.
"저기...?"
"클랜장."
감정이 격해지면 오히려 차분해진다고 하던가.
총독의 상황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어? 응."
"혹시 말입니다. 도미닉 경 파견보내는 대신에 선금을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선금?"
클랜장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받을 혜택과 높아질 클랜의 명성을 생각하면 선불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얼마 정도?"
"120,000 가차석."
클랜장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12만 가차석.
도미닉 경의 집이 약 7,000 가차석인 것을 생각하면 도미닉 경의 집을 무려 17채나 살 수 있는 거금.
그러나 클랜장이 놀란 부분은 다른 쪽이었던 모양이다.
"겨우 그 정도로 괜찮아? 난 또 12억 정도 부를 줄 알았는데."
총독이 어이가 없다는 듯 클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클랜장은 가차랜드 초창기부터 있었던 사람이었지.
가차랜드 초창기는 인세에 강림한 마굴이었다.
가차석을 억 단위로 쓰는 이들조차 도태되었던 세상.
그런 세상을 살아온 클랜장이었기에 아직도 단위가 일반인과 조금 달랐다.
"그럼 이렇게 하자. 1억 2천 정도 줄게. 그리고 남은 10억 남짓은 다이아를 달면 100%. 플래티넘일 경우 90%. 어때?"
총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더 불러도 클랜장은 수락했겠으나, 그 엄청난 단위에 기가 질린 탓에 수락해 버리고만 것이다.
클랜장은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1억 2천 가차석을 총독에게 넘겼다.
놀라울 정도의 자금 동원력.
총독은 그 묵직하고도 서늘한 주머니를 손에 쥐고 잠시 감상에 빠졌다.
아직 저번에 대출받은 가차석도 모두 갚지 못한 상황.
그러나 그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도미닉 경의 새 카드고, 그에게는 새로운 도미닉 경을 뽑을 돈이 있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도미닉 경."
"무슨 일이오? 주군."
총독의 부름에 도미닉 경과 비슷하지만 아직 안드로이드의 느낌이 남아 있는 도미닉 경의 클론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임무를 하달한다. 당분간 클랜장의 명령에 따르도록. 이상."
"과연. 주군의 명에 따르겠소."
도미닉 경의 클론이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탕탕 쳤다.
클랜장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리고 말이야."
장교 모자를 눌러쓰며 몸을 단정히 하던 클랜장이 말했다.
"도미닉 경의 카드 말인데. 나도 좀 가지고 싶어서 말이야. 네 걸 가지기엔 염치가 없고... 만일 중복으로 뽑는다면 내게 하나 팔아주겠어? 뽑기 위해 쓴 돈의 두 배를 주지."
아무래도 난 저주받은 계정 특성 때문인지 원하는 걸 뽑질 못해서 말이야. 라고 말하며 클랜장이 환하게 웃었다.
총독이 약간 큰 코트를 몸에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곳에서, 계약은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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