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135화]행정부 디펜스
* * *
"선공을 양보하지."
트롬이 오만하게 도미닉 경을 향해서 말했다.
도미닉 경이 탄 거미전차의 앞다리가 제자리에서 땅을 박차며 투레질을 시작했다.
도미닉 경이 트롬의 발언을 파악하느라 조종간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도미닉 경은 당장에라도 공격할 것처럼 굴다가 선공을 양보하는 트롬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도미닉 경의 감이 그렇게 속삭였다.
"스승님! 선공을 양보한다니까 먼저 공격해요!"
그러나 앨리스는 그저 선공에 집중한 나머지 이상함을 캐치하지 못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석궁에 화살을 장전한 앨리스.
"안 돼, 앨리스! 당장 멈춰!"
아. 하고 무언가 알아차린 히메가 앨리스에게 외쳤다.
그러나 이미 화살은 앨리스의 손을 떠나 트롬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틱. 하고 트롬의 몸에 닿은 화살.
별다른 피해 없이 화살을 맞은 자리를 탁탁 털어낸 트롬이 비열하게 웃었다.
"으흐하하하! 걸렸습니다! 나의 Trap에!"
앨리스는 그제야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너무 급하게 공격을 한 것이 문제였다.
평범한 졸개를 상대하기에 앨리스의 공격은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트롬은 명색이 보스.
그것도 레이드 보스인 신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앨리스의 공격으로 인해 트롬은 두 가지 이점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벼, 벽이다! 들어가지 못하게 결계가 생겼어!"
"그 말은, 도미닉 경이랑 트롬이 1:1을 해야 한다는 소리야?"
그렇다.
보스전을 시작하면 생성되는 결계.
트롬이 바라는 첫 번째가 바로 이것이었다.
트롬은 한 때 잘못된 방향으로 재능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의원을 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수재.
분명히 이 상황에서는 도미닉 경이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도미닉 경 하나만 상대할 경우에는?
그리고 도미닉 경을 먼저 처리할 경우에는?
그럴 때 절대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해진다는 사실도 이미 인지한 상태.
그가 세운 첫 번째 계획은 바로 도미닉 경과 주변의 단절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계획의 연장선인 두 번째 계획.
"먼저 공격해 줘서 고맙다, 나리.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대부분의 보스는 어그로가 끌리기 전까지 선공하지 못한다.
트롬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1:1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하다, Sir 도미닉."
도미닉 경에게 볼을 푸들거리며 비열한 웃음을 터뜨린 트롬이 엉망진창인 문법으로 말했다.
도미닉 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서인지 히메는 결계를 손으로 치며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고, 저 멀리 사람들이 결계가 열리기를 바라며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분명 결계가 외부와 내부를 분리시킨 것이리라.
"...죄송해요, 스승님. 제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바람에..."
앨리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사과는 나중에 하거라. 지금은 눈앞에 있는... 저 보스를 해결해보자꾸나."
도미닉 경이 거미전차를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그러자 대검을 들고 돌진하던 트롬이 거미전차의 옆면을 긁고 지나갔다.
"하! 탱커치고 민첩하다, 나리."
트롬이 거만한 표정으로 도발하듯이 말했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내밀어 거미전차의 옆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거대한 늑대가 햘퀸듯 깊고 굵게 긁힌 자국이 보였다.
도미닉 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거미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검과 방패를 들고 트롬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앨리스는 그런 도미닉 경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앨리스가 생각하기에 레이드 보스인 트롬을 상대하기 위해선 거미전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도미닉 경이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린 것은 아니었다.
도미닉 경이 방패를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트롬을 노려보았다.
검은 언제라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팔은 살짝 긴장을 푼 채로 늘어뜨린 상태.
트롬은 그나마 크기와 질량의 이점을 포기한 도미닉 경을 비웃었다.
"차라리 빨리 죽고 다시 살아나려고 한다? 나리, 너무 안일합니다."
역시나 엉망진창인 문법으로 말한 트롬의 날개가 펼쳐지며 땅에서 약간 날아올랐다.
그리고 대검을 앞으로 내미는 자세를 취하며 그대로 도미닉 경을 향해 날아오는 트롬.
도미닉 경은 마치 점처럼 보이는 대검을 노려보며 속으로 타이밍을 쟀다.
하나. 둘. 반!
챙! 하고 대검이 튕겨지며 중심을 잃은 트롬.
도미닉 경은 손에 가까운 쪽의 검 면으로 대검의 검 끝을 쳐 냈다.
그리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트롬을 향해 방패를 내밀었다.
방패의 면이 트롬의 흉부를 강타하며 트롬이 뒤로 두 걸음 물러갔다.
운이 좋군. 도미닉 경이 트롬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트롬이 웃었다.
도미닉 경의 기술이 대단해서? 아니다.
도미닉 경의 공격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것도 아니다.
트롬은 비웃고 있었다.
[트롬(BOSS) 99.98%]
트롬의 눈에 보이는 자기 체력 수치.
[트롬(BOSS) 99.99%]
"이를 어쩐다, 나리.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트롬은 순식간에 차오른 체력을 보며 이죽거렸다.
"아이큐 30! 아이큐 30! 멍청하기 그지없습니다!"
트롬이 도미닉 경에게 마음껏 도발을 날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리는 트롬의 것.
고작 일개 탱커가 레이드 보스와 비교될 리 없다.
그의 탱커 혐오가 고개를 들었다.
"으흐하하하! 끔찍하게 죽인다, 나리!"
그리고 검을 들고 다시 돌진을 시도하려는 트롬.
그러나 트롬은 움직일 수 없었다.
"...? 이게 무슨?"
트롬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치 돌처럼 굳어 버린 몸은 전혀 움직일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나."
도미닉 경이 천천히 트롬에게 다가왔다.
트롬은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입 외에 유일하게 움직이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도미닉 경이 트롬의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왔다.
"상태 이상 내성이 없는 모양이구려. 트롬 공."
도미닉 경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트롬에게 말했다.
도미닉 경은 예전에 트롬이 양산박의 힘에 취해 보스가 되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딜러 출신 답게 군중 제어 기술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었다.
보스가 된 다음에도.
처음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많아 잊었던 사실이었으나 트롬을 보고 난 이후 지나간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다.
도미닉 경은 들어 올린 방패의 모서리로 트롬의 얼굴을 후려쳤다.
"컥! 무, 무슨!"
그리고 또다시 들어 올려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악! 그만해! 멈추십시오!"
트롬이 보스라고는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사실적인 보스전을 위해 중앙 시스템은 보스들에게 통각을 남겨두었다.
그렇기에 트롬은 방패로 맞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방패로 맞아야만하지?
트롬은 억울함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생각했다.
도미닉 경은 묵묵히 방패로 트롬의 얼굴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피해 판정 상 꼭 얼굴만 때릴 필요는 없었으나 도미닉 경은 트롬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만 노렸다.
방금 전 도미닉 경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 때를 기억하는가?
도미닉 경이 트롬의 공격을 빗겨내고 방패를 적중시켰던 바로 그때.
트롬의 운명은 거기서 이미 정해져 버렸다.
방패로 트롬을 공격하자마자 도미닉 경의 눈에 하나의 시스템 창이 보였다.
[치명타! 보스 '트롬'이 2초간 스턴에 걸립니다!]
[PVE 상태입니다. 스턴 시간이 5초 증가합니다.]
보스임에도 상태 이상 저항이 없는 트롬.
도미닉 경의 장비, [T4 기사방패]에 붙어 있는 방패 타격시 12% 확률로 기절.
PVP가 아닌, PVE로 내려진 판정.
마지막으로 운 좋게 첫 타에 터져 버린 스턴.
이 모든 것이 얽히고 얽혀 만들어낸 결과가 바로... 이 무한 스턴 상태였다.
이론상 약 8번의 타격마다 한 번의 스턴.
7초 동안 쉬지 않고 때린다면 적어도 한 번은 터질 확률.
도미닉 경은 계속해서 방패 모서리로 트롬을 때렸다.
죄책감은 없었다.
이미 도미닉 경에게 적의를 드러내었으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포기하고 몬스터가 된 상태가 아니던가.
"그만! 그만! 항복, 항복하겠다! 나리! 항복하겠습니다!"
트롬이 소리쳤으나 항복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다.
이건 보스 레이드였지, PVP 대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택권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는 법이지, 몬스터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미닉 경의 방패가 바쁘게 움직였다.
체력이 떨어질 걱정은 없었다.
그는 탱커였고, 또한 방패를 다루는 데 익숙한 기사였다.
이런 단순한 일 만큼은 온종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
[보스 트롬이 쓰러졌습니다!]
['도미닉 경' 님께서 트롬 솔로 플레이에 성공하셨습니다!]
[약속대로 군세가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행정부의 승리입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시스템 창은 도미닉 경과 행정부의 승리를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명예로우면서도 보람찬 전투에 대해서 말하는 이가 없었다.
아니, 지금 그 누구도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의 플레이가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클리어 시간 7시간 33분 47초 33.]
"...성공이로군."
도미닉 경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저 멀리 동이 트며 만신창이가 된 도미닉 경과 다진 고기처럼 되어버린 트롬을 비추었다.
중간에 몇 번 위기가 있었으나 도미닉 경은 마침내 이 대단한 위업을 이루어냈다.
그는 정말 하루 종일 해낸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