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132화]행정부 디펜스
* * *
도미닉 경은 슬롯이 복구되며 돌아온 방패와 깃발을 들어 올렸다.
강화 이후로는 처음 느껴보는 서늘한 감각.
도미닉 경은 그 미묘한 차이에서 어색함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기 위해 방패를 몇 번 휘둘렀다.
[치명타! 공기 분자 ACTX0773이 2초간 스턴에 걸립니다!]
"어... 잠시만요. 약간 더 조율해야겠네요."
레오나르도가 갑자기 공기를 스턴시키는 버그에 놀라 도미닉 경의 방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몇 코드를 재정렬한 레오나르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나을 겁니다."
"고맙소."
도미닉 경이 다시 방패를 휘둘렀다.
어째서인지 실제 방패보다 공격 범위가 조금 넓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곧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방패를 휘두르는 데 집중했다.
도미닉 경의 왼쪽 벽에 스치지도 않은 방패 자국이 생겨났으나 도미닉 경이 인지하기도 전에 흔적은 사라졌다.
행정부의 복원력 덕분이기도 했으나 도미닉 경은 왼쪽에 안대를 끼고 있었고, 방패도 왼손으로 장착했기에 생긴 시야각 문제였다.
그렇게 몇 번을 휘둘렀을까?
도미닉 경은 마침내 새롭게 강화된 방패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스승님! 히메 공께서 깨어나셨어요!"
마침 도미닉 경이 새로운 장비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앨리스가 호재를 몰고 왔다.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는 앨리스의 옆에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는 히메.
"여긴...?"
"깨셨소, 히메 공?"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손을 뻗었다.
히메는 자연스럽게 도미닉 경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도중 어지러웠던지 잠시 비틀거리긴 했으나 닌자다운 균형감각으로 곧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도미닉 경? 여긴 어디죠? 저흰 분명 폭발에 휩쓸려서..."
"행정부 안입니다."
도미닉 경 대신 레오나르도가 대답했다.
"오랜만이네요. 히메 씨."
"...?"
히메가 레오나르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는지 놀란 표정으로 레오나르도에게 소리쳤다.
"레오나르도 씨? 당신이 여긴 어떻게?"
"아, 그... 말하자면 깁니다."
레오나르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히메에게도 말했다.
자신이 시스템 인더스트리로 이적해 행정부에 보안 프로그램을 깔러 파견나온 일.
양산박의 습격으로 혼란해진 탓에 도미닉 경을 오해한 이야기...
인간은 자기 보호의 동물이었고, 이는 뱀파이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기에 약간의 잘못이 축소되기는 했으나 맥락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러니까... 결국 레오나르도 씨의 오해로 우리가 피해를 입었다는 거네요?"
"어... 네.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죠."
레오나르도는 바짝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코더는 세상에 간섭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해지기도 하지만 정작 가차랜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 비하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었다.
만일 히메가 불만을 품고 쿠나이라도 던지는 순간 자신은 죽음을 한 번 경험하리라.
그러나 히메는 문명인이었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나가는 사람이었다.
"3,000 가차석."
"네?"
죽음까지 각오하던 레오나르도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3,000 가차석만큼 화나네요."
"...그게 무슨 뜻이오?"
옆에 있던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물었다.
얼마만큼 화난다니, 분노가 가격으로 잴 수 있는 것이던가?
"아, 도미닉 경. 이건 가차랜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아는 마법의 문장이에요. 자. 따라 해 보세요. '3,000 가차석 만큼 화난다.'"
"어... 3,000 가차석 만큼 화나오."
"바로 그거예요."
레오나르도는 그제야 히메의 말을 알아차렸다.
히메는 보상에 대한 협상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협상에서 3,000 가차석 만큼 화난다는 뜻은...
"알겠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는 즉시 두 분께 1,200 가차석을 드리겠습니다. 기존 보상에 더해서요."
"그럼 됐어요."
"잠깐, 3,000 가차석만큼 화난다면서 1,200 가차석을 받아들이는 건 도대체 뭐요?"
도미닉 경이 이 알 수 없는 대화법에 예의가 아닌 걸 알고 끼어들었다.
"아, 그건 말이죠"
히메가 빙글빙글 웃으며 도미닉 경과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잠깐, 마주 잡은 손?
히메의 시선이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자기 손으로 향했다.
도미닉 경의 손.
히메가 잡은 것은 도미닉 경의 손이었다.
히메는 문득 자신이 도미닉 경의 손을 잡고 일어난 이후 손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
히메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냉정함 속에 숨어 있던 여우 귀와 꼬리가 뿅 하고 나타나 히메의 마음을 대변하듯 혼란스럽게 마구 흔들렸다.
"갑자기 왜 얼굴을 붉히는... 아."
도미닉 경도 히메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서로 꼭 잡고 있던 손이 하나 남은 눈에 들어왔다.
도미닉 경이 황급하게 손을 떼었다.
히메도 손을 뗀 후 양손을 등 뒤로 숨기더니 그 무의식적으로 그 감촉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도미닉 경이 어색한 기류에 숨이 막히는지 두어 번 헛기침했다.
히메도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가 보더라도 핑크빛 가득한 달달한 분위기.
"염병하고 있네."
"네?"
"아, 아니야. 보기 좋다고."
레오나르도의 중얼거림에 앨리스가 되물었다.
레오나르도는 황급하게 변명하듯 말했다.
이 달달한 상황 속에서, 코더 레오나르도만이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어색한 시간이 길어지자 도미닉 경은 이 어색함을 깨기 위해 레오나르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양산박의 습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은 어떻소. 혹시라도 밀리고 있다면 도움을 좀 드리고 싶은데."
"아."
커플은 다 죽어야 된다며 구시렁거리던 레오나르도가 도미닉 경의 말에 눈을 굴렸다.
도미닉 경을 막으러 오기 전까지 상당히 힘겹게 막아 내던 상황.
지금이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레오나르도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연락을 좀 해 보겠습니다."
레오나르도가 전화기를 꺼내 단축키를 눌렀다.
그러자 신호음으로 평화로운 새 소리와 시냇물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누군가가 받았다.
"어. 춘식아. 레오나르도. 아, 난 괜찮아. 도미닉 경하고 문제가 있었는데, 해결되었어. 아니, 내 쪽 잘못. 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거기 상황 좀 알려줄래? 아니, 도미닉 경하고는 내가 해결한다니까? 일단 거기 상황 좀 아. 그러네. 지금 바쁜 모양이구나. 아니, 별 건 아니고 도미닉 경하고 거기 지원갈까 해서. 응. 응. 오케이. 알았어. 끊을게. 파이팅!"
귀에 수화기를 대고 열심히 대화하던 레오나르도가 통화를 끊고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저희 망했답니다. 막긴 했는데 1차 방어선이 뚫렸대요."
레오나르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그 내용은 굉장히 대수로웠다.
"...그걸 그렇게 담담하게 말해도 되는 거요?"
도미닉 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야..."
레오나르도는 문득 왜 자신이 이렇게 담담한지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다.
도미닉 경과 싸울 때는 미친놈처럼 여기저기 날뛰었지 않은가.
그리고 마침내 레오나르도는 도미닉 경을 보며 답을 알아차렸다.
"도미닉 경이 워낙 듬직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도미닉 경이 지원을 가는 이상, 1차 방어선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라는 생각.
그만큼 가차랜드에서 도미닉 경이 가지는 위상이 대단해졌다는 이야기리라.
"그건... 맞네요."
"스승님이라면..."
히메와 앨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탱커, 높은 스탯, 훌륭한 스킬.
가차랜드의 사람들이 도미닉 경을 판단하는 근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세 가지만 보더라도 도미닉 경이 얼마나 든든한지 알 수 있는 상황.
심지어 여기 있는 이들은 도미닉 경이 장비를 강화함으로서 더 고차원적인 강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생겨난 심리적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과적인 분석가 레오나르도, 깊은 생각의 히메, 그리고 해맑은 앨리스가 머리를 맞대어 낸 결론이니 이는 사실이리라.
도미닉 경은 내심 그런 믿음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용기를 북돋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기사였고,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흠. 아무튼. 방금 1차가 뚫렸다고 하지 않았소? 이럴 시간이 없소. 바로 지원을 갑시다. 더 늦기 전에."
도미닉 경이 계면쩍은 듯 검으로 방패를 두드렸다.
탁탁. 거리던 과거와 달리 상당히 맑은 깡깡소리가 났다.
"아. 그렇죠. 이럴 시간이 없었군요. 빨리 갑시다. 길을 안내할게요."
레오나르도가 도미닉 경이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레오나르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앨리스가 뒤따랐다.
...
"뒤쪽에 적이다! 측면을...억!"
"적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 데나 범위 마법을 캐스팅 해라! 어디에 쏘더라도 고위 마법사급 공로다!"
행정부의 로비.
행정부의 좁은 입구를 지키던 1차 방어선이 뚫리고,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지키는 2차 방어선으로 물러난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양산박의 습격자들을 막아 내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나타난 거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던 머슬만 의원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간호사 복장을 입은 이가 그런 머슬만 의원을 만류했다.
"다 나을 때까지는 안정을 취해야 해요!"
"하지만 지금 전황이"
"어설프게 움직이다간 복귀가 더 늦어질거예요! 차라리 온전하게 회복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구요!"
간호사가 신경질적으로 머슬만 의원을 침대에 뉘었다.
간호사도 현재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탱커의 부족.
그로 인해 한 번 밀리면 끝없이 밀리는 처참한 유지력.
탱커로 참전한 이가 머슬만 의원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머슬만처럼 크게 부상당해 회복 중이거나 부상 직전까지 몰린 상황.
"탱커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요."
머슬만은 입맛이 쓴 듯 턱을 움직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의 말대로 빨리 회복해야 다시 전장에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간호사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최대한 빠른 회복을 위해 한 장에 200 가차석이나 하는 15분 짜리 단축권을 회복장치에 마구 집어넣는 중이었다.
"우리가 누구냐!"
"우리는! 가차랜드의 창!"
"...지금은 창보다 방패가 필요한데 말이지."
회복실 밖에서 사기를 올리기 위해 외치는 소리가 비명과 함께 섞여 들렸다.
머슬만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외침들을 하나하나 듣기 시작했다.
"제길! 후방에 적이다! 후방에 적!"
"적이 너무 많아서 로비가 보이질 않습니다! 바닥이 3! 적이 7! 반복합니다! 바닥이 3! 적이 7!"
전황은 점점 행정부의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회복실이 점점 북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 머슬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그들의 절규를 들으며 회복실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 줄 뿐.
이대로라면 행정부가 양산박의 손에
"도미닉 경이다!"
그때였다.
머슬만은 누군가의 외침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설마.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게 사실인가?
"도미닉 경이 도착했다!"
"도미닉 경이 1차 방어선에서 적들을 밀어내고 있다!"
머슬만은 그 말을 듣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기쁨을 표현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도미닉 경이 이 전장에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