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129화 (129/528)

〈 129화 〉 [128화]킹 오브 로그라이크

* *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도미닉 경이 히메... 로 추정되는 얇은 선에게 물었다.

"잠시만요."

히메가 잠시 도미닉 경의 말을 끊고 무언가를 시도했다.

그러자 얇은 선이 팔랑이더니 슬쩍 히메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

"아, 역시."

히메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의 처지에선 그저 선이 팔랑거리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잠시만 더 기다려 줘요."

히메는 무언가를 하려는 듯 격하게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히메로 추정되는 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기다려 달라고 부탁받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때였다.

쑤욱­하는 효과음과 함께 갑자기 히메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히메 공!"

도미닉 경은 이 이상한 세계에서 다시 만나게 된 히메가 퍽 반가웠다.

"역시 레이어가 나뉘어 있네요."

히메의 모습은 마치 종이 인형처럼 팔랑거리고 있었는데, 앞에서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옆에서 보면 아까처럼 선으로만 보였다.

도미닉 경은 문득 2D라는 것에 대해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혹시 이 종이 인형 같은 상태가 2D라는 거요?"

"네."

히메는 좀 더 복잡한 설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도미닉 경의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약간의 설명만 덧붙였다.

"정확하게는 성좌들의 처지에서 볼 때에만 멀쩡한 상태죠."

"아! 됐다! 스승님! 저 성공했어요!"

히메의 옆에 앨리스가 나타났다.

도미닉 경은 문득 앨리스의 옆에 L03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았다.

혹시나 히메의 옆에도 있을까 싶어 바라보니 역시나 L02라고 적혀 있는 글자가 있었다.

그는 문득 이 글자가 히메가 말한 레이어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히메에게 물었다.

"혹시 이게 바로 레이어요?"

도미닉 경은 둘의 레이어 표시가 일정한 높이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자기 레이어 표시가 있을 곳에 손을 올렸다.

"네. 맞아요."

히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한 번에 소환되더라도 레이어는 나눠진 채로 소환될 텐데 이렇게 레이어가 합쳐져서 나오다니, 이상한 일이네요."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레이어를 합쳐 버린 것처럼... 이라고 말한 히메가 고개를 저었다.

자기 캐릭터 카드를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소개해준 예술가 성좌는 레이어를 고의로 합쳐 버리는 행위는 그야말로 죄악의 끝이라고 말했다.

레이어 병합이 간단한 클릭 하나로 즐기는 세계 최악의 악의, 책임 없는 쾌락이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성좌의 표정을 히메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히메는 설마 누군가가 일부러 레이어를 병합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다시 기괴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인상적이구나! 이렇게나 빨리 첫 함정을 알아차리다니, 과연 닌자란 말인가?]

[그러나 이는 우주의 악의에 비하면 그저 일부에 불과할 뿐. 너희는 이 자그마한 단서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냈으나, 혹시 무언가를 잊지 않았던가?]

기괴한 목소리는 히메가 내놓은 추리를 칭찬하는 듯 비웃었다.

"그게 무슨­"

목소리가 한 말에 대해 히메가 무언가를 물어보려고 하는 그 찰나.

도미닉 경은 본능적으로 레이어를 바꿔 검을 들어 올렸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1번 레이어에서 쇠가 긁히는 효과음이 나타났다.

[치명적인 일격... 농담이로다. 하하! 흥미롭군, 흥미로워! 여기 아직 망각을 모르는 이가 남아 있었구나!]

"괜찮소?"

"...아! 네!"

도미닉 경은 뒤를 돌아보며 히메에게 물었다.

굉장히 멋있는 장면이었으나 히메가 보는 것은 그저 가느다란 선.

그 묘한 인지의 부조화에서 벗어난 히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미닉 경은 레이어가 나뉜 이후부터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 레이어는 선으로 보이지만, 다른 레이어는 각도로 인해 멀쩡하게 보이는 상황.

그로 인해 자기 라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다른 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엉망진창인 세상을 바라보며 신기해하던 도미닉 경은 문득 히메의 라인에서 수풀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듯 자연스러웠으나 2D의 특성상 픽셀 단위의 움직임도 눈에 띄는 법.

도미닉 경은 다가오는 수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풀 사이에서 반짝이는 단검이 히메를 향해 쇄도하는 것을 보고 급하게 레이어를 변경해 막아 낸 것이다.

[치명적인 함정도, 비열한 기습도 통하지 않았으니, 이제 다시 '정정당당'할 때가 도래했도다.]

목소리의 말과 함께 레이어가 사선으로 기울었다.

그제야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앨리스는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역병의 비수를 막아 내다니, 숨겨진 한 수는 있다는 건가?"

온몸에 고름이 가득한 붕대를 감고 한 손에는 녹슨 단검을, 다른 한 손에는 역병이 흐르는 향로를 든 이.

"힠.히힉.히히힉."

연미복을 입고 얼굴에 형광물질로 해골을 그려 낸 마술사.

"그놈의 힉힉거리는 소리는 그만둘 수 없어? 노이로제 걸리겠어!"

저격총을 든 군인.

여러분들은 이들을 기억하는가?

도미닉 경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역병을 두른 자와 저격총을 든 자의 이름은 각각 플라기우스와 예카테리나.

도미닉 경이 3지역에서 적으로 만났던 이들이었다.

마술사 복장을 한 이는 도미닉 경이 알지 못 하는 사람이었으나 둘의 공통점을 생각하면 저 사람도 3지역에서 싸웠던 사람이리라.

[정정당당하디 정정당당하다. 셋. 그리고 셋. 양을 뜻하는 하나와 음을 뜻하는 둘. 그리고 그들이 결합하여 셋이 되니 셋은 가장 완벽한 숫자라.]

[내게 영혼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흥분해 소리를 질렀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잠깐."

도미닉 경이 목소리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의 발언에서 이상한 것이 있어서였다.

"앨리스는 내 장비로 취급되오. 결론적으로 2 대 3의 싸움인데, 정정당당하다고?"

[...]

도미닉 경의 말에 목소리가 침묵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침묵 너머, 미약하게 들리는 어떠한 소리를 들었다.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3대3인데 왜 2대3이 성사되는거예요?'

'어... 대충 숫자가 적은 쪽을 탓하고 넘겨 버려. 보통은 납득할걸?'

지금 상황에 대해 회의를 하는 소리.

도미닉 경은 눈 하나가 부족한 대신 청력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도미닉 경이 들었다고 착각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이 소리는...

[흠흠. 애초에 이곳은 셋이 필요한 곳. 하나를 덜 데리고 온 너희의 잘못이요, 너희의 실수로다­]

"혹시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코더요?"

[...네?]

도미닉 경의 말에 기괴한 목소리가 컨셉도 잊어 버리고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 혹시 이거 이벤트인 거요?"

[그,그,그,그걸 어떻게?]

도미닉 경의 물음에 목소리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벤트요, 스승님? 돌발 이벤트 같은 거요?"

앨리스가 아는 단어가 나왔는지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

그리고 여전히 기괴한 목소리는 다시 침묵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카테리나가 저격총을 어깨에 견착하며 스코프를 바라보았다.

"일단 싸워서, 한 팀만 살아남는다는 거지?"

스코프의 십자선이 앨리스를 향했다.

예카테리나가 보기에 가장 취약한 건 앨리스였다.

어설퍼보이는 시대착오적인 갑옷이, 총알을 이길 수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그, 그렇다! 여기는 광기와 혈향이 가득한 서커스... 아니, 축제. 개최자가 만족할 때까지 피와 영혼을 바쳐라!]

기괴한 목소리는 이때다 싶었는지 바로 전투 시작 로고를 들어 올렸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 룰이 적용된 모양이었다.

셋.

둘.

하나.

광기의 축제를 즐겨라!

라는 문구가 지나가자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도미닉 경의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현재 가장 느린 캐릭터를 확인 중...]

[도미닉 경은(는) 가장 느린 캐릭터입니다.]

[공정성을 위해 첫 턴에만 도미닉 경이(가) 선공을 가져갑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히메가 적절하게 조언을 내뱉었다.

"턴제 방식이예요! 실시간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한 사람당 한 번씩 순서대로 돌아가는 방식이요."

아. 그렇군.

도미닉 경은 히메의 조언에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란 말이지.

도미닉 경은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예카테리나를 향해 뻗어보았다.

그러자 예카테리나와 도미닉 경 간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도미닉 경의 검이 예카테리나의 정수리를 찍었다.

"악!"

예카테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다시 거리가 멀어지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둘.

도미닉 경은 다시 공격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어째서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말했잖아요. 한 턴에 한 번이라고."

히메가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첫 공격만 가장 느린 사람이 시작하고 이후는 그대로 속도 순으로 진행되는 룰이었는지, 이번에 움직일 수 있게 된 이는 히메였다.

"실시간 전투가 아니라 제 진짜 실력을 보여드리지 못 하는 건 아쉽지만..."

히메가 손으로 인을 맺었다.

그리고 쿠나이를 꺼내 전방으로 가볍게 던졌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위력은 가볍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며 세 사람을 꿰뚫은 히메의 쿠나이는 어째서인지 등 뒤에서 나타나 요대로 돌아갔다.

"그래도 로그라이크 캐릭터였으니, 자존심은 챙겨야 하지 않겠어요?"

[치명적이고 잔혹한 일격이로다!]

히메는 이 멋진 상황에 스스로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히메를 칭찬이라도 하듯, 기괴한 목소리가 감탄했다.

"그... 미안하오. 못 봤소."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런 히메의 멋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도미닉 경과 히메는 같은 레이어에 있었고, 이로 인해 그저 얇은 선이 팔랑거린 것으로 보였을 뿐이었으니까.

2D가 불러 온 비극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