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127화]킹 오브 로그라이크
* * *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앨리스는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여전히 안개 속에는 요사스러운 여인들이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며 세 사람을 농락하고 있었다.
"계획이라도 있소?"
도미닉 경이 날아오는 칼날을 본능적으로 쳐 내며 히메에게 물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히메가 세 개의 쿠나이를 던져 네 명의 양산박 여인을 쓰러뜨렸다.
직접 맞은 셋은 그대로 절명했고, 치명타가 터져 관통된 쿠나이를 맞은 또 하나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도미닉 경은 그 모습을 보며 과연 딜러는 다르다는 생각했다.
그도 이제 가차랜드식 사고방식이 익숙해진 것이다.
히메와 도미닉 경은 무의식적으로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벽이 나타나자마자 그 벽을 등지고 서서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던 앨리스는 두 사람 사이로 들어가 배낭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 무기나 꺼내 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도미닉 경의 '평타'로 인식되었다.
딜러만큼은 아니지만 기본 스텟이 꽤 높은 도미닉 경이었기에 그 무기 하나하나가 꽤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앨리스는 수세에 몰린 이후 처음으로 다시 공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만."
그때였다.
황후의 복장을 입은 조제프 준장이 나지막이 말하자 여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너희로서는 역부족이다."
조제프 준장이 연기 속에서 나타나 도미닉 경과 히메를 마주 보았다.
"조제프 준장...? 어째서 여기에?"
히메는 설마 여기서 조제프 준장을 볼 줄은 몰랐다.
설마 이게 다 조제프 준장의 계략?
혼란에 빠진 히메는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이만 빠지도록 하죠, 도미닉 경. 하지만 다음은 없어요."
조제프 준장은 떠오르는 선택지 중 [퇴각하기]를 눌렀다.
페널티가 조금은 있겠지만, 지금처럼 소모전을 벌이는 것보단 싸게 먹히리라는 계산이었다.
물론 이것도 조제프 준장의 의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황후의 모습을 한 조제프 준장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수십 명의 여성들이 뒤따랐는데, 그중 세 명 정도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페럴란트의 상식으로도, 가차랜드의 상식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
도미닉 경과 히메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건 양산박이라서 그런 모양이오."
"네? 아. 네. 그런 모양이네요."
그러나 여기서 둘의 성격이 바로 드러났다.
도미닉 경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물어볼 정도로 호기심이 넘치는 성격이었으나, 생각이 많아질 것 같으면 바로 선을 그어 버리는 단호함도 있었다.
그러나 히메는 도미닉 경과 정반대의 성격.
그녀는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결론을 도출하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왜 조제프 준장이 도미닉 경을 습격했는가에 대해서 끝없이 생각하고 분석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히메는 아직도 깊은 생각에 빠져 엉뚱한 길로 나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도미닉 경이 연기가 조금 가라앉은 골목을 둘러보았다.
양산박의 습격이 끝나자 신기하게도 옅어지기 시작한 연기는 곧 다른 길목으로 나아가는 길이 보일 정도로 흩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골목 너머에는 연기가 가득한 상황.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어디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을 또 느꼈다.
"스승님. 이거 언찬트랑 비슷하지 않아요?"
앨리스가 땅에 떨어진 무기를 주우며 말했다.
"저 스승님이 나온 게임 해봤거든요. 오빠가 사와서..."
배낭을 열어 무기를 하나씩 다시 집어넣기 시작한 앨리스의 말에 도미닉 경과 히메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이건 마치... 로그라이크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연기가 흩어진 것도 이해가 되네요."
히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불길은 보스전일까요?"
앨리스가 맞장구쳤다.
"글쎄. 확실한 건, 이제 우린 룰을 알았다는 거요."
도미닉 경이 대답했다.
도미닉 경은 세 갈래로 열린 길목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방향을 따라 움직이면 새로운 상황이 일어나리라.
만일 이게 로그라이크 룰을 따른다면 그래야 한다.
"일단 이동 해봅시다. 로그라이크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면 되겠지."
도미닉 경이 검을 들고 앞장섰다.
목표는 불길이 치솟는 곳이었기에 길도 불길이 치솟는 방향으로 정했다.
히메와 앨리스는 묵묵히 도미닉 경의 뒤를 따랐다.
어째서인지 소풍 전날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한 앨리스였다.
...
"역시나."
도미닉 경은 흩어지기 시작한 안개를 바라보았다.
이번 골목에서는 이벤트가 일어났는데,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형식이었다.
그중 가장 무난하게 주변의 지도를 얻은 도미닉 경은 이 골목이 언찬트의 맵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단 우리는 여기로 가야겠네요. 행정부와 가장 가까우니까요."
히메가 지도의 일부를 손으로 짚었다.
불의 문양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저기 불타오르는 장소가 바로 이곳일 것이다.
불의 문양이 찍혀 있는 곳은 히메의 말대로 행정부와 인접한 장소였다.
"여기서 행정부로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일단 도미닉 경이 온전한 컨디션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기, 여기를 거쳐 이곳으로 가는 것으로 합시다."
도미닉 경이 히메가 말한 곳으로 향하는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다.
두 개의 칼이 교차한 문양이 둘, 물음표가 하나, 다시 두 개의 칼이 교차한 문양이 하나.
네 개의 골목을 지나면 마침내 불꽃 문양이 있는 곳이었다.
"위험할 것 같은데... 조금 돌아서 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히메는 도미닉 경의 제안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생각하는바를 말했다.
히메가 원하는 길은 물음표가 다섯, 칼이 하나인 길이었다.
도미닉 경은 두 개의 골목을 더 지나야 한다는 사실에 자기 계획과 히메의 계획을 저울질했으나 곧 히메의 계획이 더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미닉 경은 말 그대로 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지만, 히메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경로를 선택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도미닉 경은 사실 기사임에도 전략과 전술에 약했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바로 히메의 계획을 수락했다.
"그 말도 옳군. 그럽시다."
도미닉 경은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지도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
처음에 만난 양산박과의 싸움이 너무 격렬해서였을까?
도미닉 경과 히메는 뜻밖에 맥빠지는 이벤트 골목을 지나 마침내 불꽃 문양이 있는 곳 바로 전, 전투 골목에 도착했다.
기껏 해야 어린아이도 풀 수 있는 퍼즐과 소소한 보상들.
앨리스는 도트로 된 선글라스를 끼고 수류탄 모양의 병에 담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머리에 월계수 관을 쓰고 있었다.
"뜻밖에 유물을 막 퍼주네요."
"로그라이크니까."
앨리스가 힙하게 양팔을 들며 말하자 히메가 답했다.
사실 앨리스가 장착하는 저것들은 로그라이크 형 게임에 자주 나오는 수집형 유물들.
시야가 1 늘어나는 8비트 선글라스와 전투 후 체력을 폭발적으로 회복시켜 주는 레모네이드 그레네이드, 그리고 공격력과 방어력을 1 증가시키는 챔피온의 월계관.
"설마 이런 것까지 구현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
"정말 언찬트를 직접 하는 기분이 들어요."
이게 바로 증강현실일까요? 라며 배시시 웃은 앨리스.
그녀의 미소는 매력적이었으나, 그녀가 쓴 도트 선글라스 때문인지 왠지 좀 열이 받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튼, 이제 곧 전투 골목이오. 이만큼 쥐어 주는 것을 보니 전투가 매우 힘들 것이 틀림없소."
도미닉 경은 검이 교차된 문양이 그려진 골목을 바라보았다.
골목의 길은 도트 선글라스의 효과로 훤히 보였으나, 어째서인지 그곳에 있는 이들은 흐릿한 검은 형체로 보였다.
아니, 여럿인가? 하나인가? 그마저도 헷갈린다.
"저기 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우리에겐 아무런 정보가 없소."
도미닉 경이 검을 들고 어깨를 빙글 돌리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직접 알아봐야겠네요."
히메가 도미닉 경의 말을 거들었다.
도미닉 경과 히메는 나란히 골목을 향해 섰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인 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골목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갑자기 세상이 변하더니 가로로 길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미닉 경! 2D! 2D예요!"
히메가 황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2D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
그렇게 도미닉 경은 몸으로 2D가 무엇인지 알아가야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히메 공? 앨리스? 다들 어디있는 거요?"
도미닉 경은 시야가 이상하게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도미닉 경의 시야는 일반인의 절반이었으나 그 사실을 감안 하더라도 과하게 좁았다.
[아. 보거라, 아이야. 또 새로운 혼돈을 방황하는 자들이 여기 도착했나니.]
"누구요! 어디서 말하는 거요?"
갑자기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스템의 무기질적인 소리와는 사뭇 다른 낮고 음산한 목소리.
도미닉 경은 이 이상한 공간에서 들린 이상한 소리에 반응해 무심코 소리치고 말았다.
[겁에 질린 것인가? 아니면 그저 혼란에 빠진 것인가? 확실한 건, 두 무리 중 하나는 여기서 뼈를 묻는다는 사실이다. 혹은, 둘 다거나.]
[과연 이 피와 광기가 가득한 서커스... 아니, 축제에서 살아남아 경품을 탈 자는 누가 될 것인가?]
하늘에서 들린 목소리는 미친 듯이 웃으며 멀어져갔다.
도대체 이 이상한 공간은 어디이며, 저 목소리는 대체 누구의 목소리란 말인가?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이 호기심에 가득 차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도미닉 경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히메 공?"
"역시 도미닉 경이었네요. 2D에서는 서로를 확인하기가 어렵거든요."
도미닉 경이 팔랑거리며 뒤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미세한 실처럼 보이는... 히메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