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120화]장비 강화
* * *
사실, 도미닉 경이 장비 슬롯을 모두 결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두 개의 슬롯이 이미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어 있음]
[장신구 : 낡은 깃발(T1)]
[장신구 : 앨리스()]
이제 도미닉 경은 고작 3개만 생각하면 되었다.
무기를 선택해 공격적인 탱커가 될 것인가?
방어구를 선택해 온전한 탱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장신구를 선택해 지원형 탱커가 될 것인가?
도미닉 경의 선택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의 성미는 매우 공격적이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무기 슬롯을 고르고 결정을 눌렀다.
[무기 : 낡은 방패(T1)]
[장신구 : 낡은 깃발(T1)]
[장신구 : 앨리스()]
[장비 슬롯 설정을 마쳤습니다. 이제 강화에 도전해 보세요!]
설정을 마친 도미닉 경의 눈앞에 보이는 메시지.
"설정을 마쳤다면 이제 가게. 강화는 여기가 아니라 한 블록 아래에 있다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각각의 설명을 읽어보았다.
[낡은 방패(T1) : 세월의 흔적과 전장의 잔혹함이 곳곳에 묻어 있습니다. 방패로 타격 시 기절 확률 3% 증가]
[낡은 깃발(T1) : 깃발은 명예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명예가 있을까요? [기수] 효과 50% 증가]
[앨리스 () : 꼬마 아가씨는 여자와 아이를 숨기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숨겨야하죠. 시대 착오적인가요? 아무튼 기사도가 충만해집니다! 앨리스의 성장에 따라 특별한 보상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스탯 상태가 많았지만 도미닉 경은 불안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이 도미닉 경과 같이 오지 않았던가.
"오?"
도미닉 경이 히메와 앨리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앨리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녀도 자신이 '감정' 당했다는 것에 혼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슬롯은 잘 여셨나요?"
히메가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도미닉 경은 자신이 어떻게 뚫었는지에 대해 히메에게 말해주었다.
"무기장신구장신구로 뚫었소. 이미 장신구 슬롯이 두 개가 뚫려 있더군."
"아."
히메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종자로 들였다고 했으니 하나는 저 아이라고 쳐도,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었을까?
히메는 내심 그 사실이 궁금했으나 너무 깊게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방어구라던가 장신구를 고를 줄 알았는데 무기라니."
"공격적인 성향일수록 아군을 잘 지킬 수 있는 법이오."
도미닉 경이 말했다.
"오히려 방어적인 성향일수록 공세에 능하지."
적의 전술을 잡아먹고 전진하거든. 도미닉 경은 작게 중얼거리며 페럴란트 시절을 떠올렸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전술의 달인이었고, 그녀의 아래에서 일하던 참모 덱스터는 전략의 달인이었다.
두 사람의 전략과 전술은 방어적이었으나, 그 어떤 이들보다도 빠르게 영토를 수복하고 마족들의 목 아래에 검을 겨누었었다.
물론, 도미닉 경은 그 둘을 한 번 이상씩 구해 준 경력이 있었고.
"아무튼"
도미닉 경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모처럼 이렇게 도미닉 경을 위해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가 있는데, 그런 사람 앞에서 멍하게 서 있기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닐 테니까.
대신 도미닉 경은 궁금함의 다음 스텝을 밟아가기로 했다.
"강화를 할 수 있다던데, 그렇다는 말은 저기 적힌 T1이 강화 수치요?"
"비슷하긴 하죠."
도미닉 경의 물음은 정당했다.
가차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이들은 자연스럽게 가차랜드의 요소들을 모두 알고 있었으나 도미닉 경은 외부에서 온 사람.
가끔 '현지인'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감안 하면 도미닉 경이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T는 티어(Tier)의 T예요. 장비의 등급을 나타내죠. 뒤의 숫자가 높을수록 좋은 장비라는 뜻이에요. 강화는 더 좋은 장비를 얻기 위한 의식이에요. 우리의 성급을 올리듯, 장비의 등급을 올리는 거죠."
히메의 설명에 도미닉 경은 숫자가 클 수록 좋은 장비라고 되새기며 머리에 새겼다.
다만 역시 설명으로만 들으면 다소 알기 어려운 것도 사실.
도미닉 경은 실전을 통해 머리에 넣은 지식을 몸으로 체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이제 강화를 하러 가봅시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군."
외눈의 기사가 발을 구르며 이 친절한 안내인을 향해 흥미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죠, 도미닉 경."
그리고 그 눈빛을 보며 피식 웃은 쿠노이치가 외눈의 기사의 앞에 서서 길을 안내했다.
앨리스는 여전히 '감정'을 당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둘의 뒤를 따랐다.
어째서인지 조금은 더 커진 무기 가방을 달그락 거리면서 말이다.
공업 지구는 상업 지구만큼 평균 유동 인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어쩌면 상업 지구 이상으로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이 있다.
바로 강화를 담당하는 제련소다.
괜히 공업 지구의 가장 외부에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듯 제련소는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장비를 사고팔거나 설계도의 가격을 흥정하고 강화가 붙기를 기도하는 인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강화는 제련소가 존재하는 이유.
장비 슬롯을 여는 것도 제련소의 일 중 하나였지만, 제련소의 진정한 핵심은 강화였다.
강화에 미친 사람들은 매일 같이 제련소에 출근해 슬롯머신을 돌리듯 강화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행정부가 7번은 바뀌기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로, 강화 뿐만 아니라 옵션을 가지고 도박한 이후 장비의 품질을 올려야 하던 때의 이야기.
물론 현재는 새로운 행정부들이 들어서며 강화에 대한 제제 및 개편을 많이 한 상태였다.
지금은 강화시에 들어가는 재화만 수급하면 바로 강화가 되며 대부분 사람은 이 방식에 익숙해진 상황이었으나, 가차랜드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은 오히려 이런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어렵게 얻은 장비를 강화하다가 잃어버리는 아픔.
강화에 성공했을 때 얻는 짜릿함.
뱁새가 황새를 따라오려다가 처참하게 몰락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
그때의 짜릿한 감각을 잊지 못한 일부 시민들은 여전히 행정부에 과거로 돌아가자며 민원을 넣기도 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도미닉 경과 히메는 강화를 담당하는 부서에 도착했다.
도미닉 경은 도착하는 데 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다. 분명 한 블럭 아래라고 했는데.
하지만 드워프도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공업지구의 한 블록은 가로와 세로 모두 300미터에 달하는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이 그 사실을 몰랐을 뿐, 드워프는 정직하게 말을 해 준 것이다.
그때, 문득 도미닉 경의 머릿속에서 어떠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히메에게 의문점을 내뱉었다.
"히메 공, 강화를 할 때 재화가 필요하다고 했잖소. 그런데 오늘 따로 재화를 챙기지 않았는데, 괜찮소?"
그렇다.
도미닉 경은 깜빡 잊고 창고에서 재화를 꺼내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히메는 그런 도미닉 경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괜찮아요. 자동 차감이거든요. 강화에 쓴 재화는 창고에서 바로 사라져요."
시스템의 일이죠. 히메가 그렇게 덧붙였다.
사실 이 방식은 가차랜드의 초창기에 요정의 장난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을 정도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이 편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들 개연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편이었다.
"그렇군."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는 납득이 빨랐다.
외부에서 가차랜드로 들어와 다양한 일들을 관찰했던 만큼, 가차랜드에서는 그 어떤 일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기반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면 바로 강화를 해 보러 가죠. 저도 오늘 강화를 할 생각이라..."
"그럽시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화 구역, 강화 부서, 강화 시설...
정확한 명칭이 없기에 제멋대로 부르는 이 시설에서 도미닉 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님을 응대하는 창구는 이미 가득 찬 상황이었고, 자동으로 제련해주는 장치들로 보이는 곳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이,이히힉! 5강이다, 5강이야!"
"도대체 현 행정부는 왜 재화만 충분하면 반드시 성공하도록 한 거야? 그런 거보다 성공률 0.2% 정도가 더 재밌는데!"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가챠에 미쳐 있기는 했으나 여기 있는 이들 중 일부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처음엔 마을 하나. 다음엔 도시 하나. 그다음엔 대륙 하나. 다다음엔 행성 하나...
그렇게 엄청난 재화를 투입하면서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할 때도 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
"...보통은 건전할 정도로만 가챠를 돌리니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히메가 마치 변명하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그러리다."
도미닉 경은 그런 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현실을 살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 정도로 엉망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도미닉 경이 대기표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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