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119화]장비 슬롯
* * *
오후 3시 5분, 상업 지구 입구.
"늦네..."
히메는 주변을 둘러보며 도미닉 경이 오고 있나 확인해 보았다.
그녀가 아는 도미닉 경은 이렇게 늦게 올 사람이 아니다.
어디선가 엇갈렸거나, 아니면 사건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미안하오, 히메 공. 늦었소."
아, 역시나. 어디서 엇갈렸던 모양이네. 라고 생각한 히메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멈칫했다.
도미닉 경의 옆에 앨리스랑은 다른 여성이 서 있었다.
"도미닉 경...? 옆에 분은..."
"아, 그렇군. 히메 공. 여기는..."
그리고 그 여성은 히메가 잘 아는 이였다.
모를 리가 없었다.
방금 전 인상적인 만남을 가졌던 여성이었으니.
"어? 또 뵙네요?"
도미닉 경의 옆에 있던 여성.
"히메 공, 여기는 아임 낫 리틀 씨요. 아임 낫 리틀 씨? 여긴 히메 공."
"아,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히메는 애써 웃으며 아임 낫 리틀에게 인사했지만 지금 상황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도대체 도미닉 경은 왜 저 여성을 '데이트'에 데려왔단 말인가?
히메는 차마 도미닉 경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머리만 굴렸다.
그때였다.
"어? 리틀 도미닉 경?"
앨리스의 배낭이 갑갑했던지 리틀 도미닉 경이 튀어나와 말랑말랑 걸어가더니, 성좌 아임 낫 리틀의 다리를 꼭 안았다.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여길 상황.
"도미닉...경?"
그러나 아무런 내막도 모르는 히메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미닉 경과 그가 데려온 여자.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도미닉 경을 닮은 아이.
사실 아이가 아니라 봉제 인형이었지만, 방금 전까지 흙먼지에 뒹굴었던 탓인지, 아니면 그저 완성도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오해를 할 법도 했다.
생각해보자, 히메. 생각해.
눈을 굴려 가며 생각을 정리하던 히메는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또 내 마음을 속였구나.
히메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어, 어어? 왜 우세요?"
"히메 공?"
그리고 그 내막을 알 리 없는 도미닉 경과 아임 낫 리틀은 히메를 달래느라 진땀을 쏟아야만 했다.
...
"그러니까, 사실 여기 있는 리틀 도미닉 경은 인형이고, 여기 있는 아임 낫 리틀 씨가 주인이라는 거죠?"
오해는 풀렸으나 여전히 코를 훌쩍이던 히메가 말했다.
"네. 그리고 이 아이를 정식 상품으로 등록 하기 위해 제련소로 향하는 중이었구요."
아임 낫 리틀이 그런 히메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도미닉 경이 크게 그려진 손수건이었기에 아임 낫 리틀은 쓰지 않고 포교용으로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손수건을 받아 든 히메가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미안해요.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드릴... 아."
히메가 예의 상 그렇게 말했으나 생각해 보니 아임 낫 리틀의 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
그 전에 둘은 오늘 처음 본 사이였다.
"괜찮아요. 가지셔도 돼요. 포교용이라."
주머니를 뒤져 비슷한 손수건 여러 개가 있음을 보여 준 아임 낫 리틀이 방긋 웃었다.
제련소.
장비의 성장을 담당하는 곳으로, 공업 지구에 위치한 시설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업 지구 입구 보다는 상업 지구 입구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공업 지구 중심지에 있었으나, 강화를 위해 돈을 쏟아부어야 했던 시기에 빠르게 돈을 찾기 위해 상업 지구 가까이로 이전한 것이다.
이전하는 비용이 그들이 움직이는 비용보다 더 싸게 먹혔으니까.
아무튼 상업 지구 입구에서 조금 더 걸어가 공업 지구에 도착하자 거대한 용광로와 굴뚝들이 보였다.
수많은 대장간과 공장. 수공업과 대량 생산 체제.
여러 개의 톱니 바퀴가 모여 큰 기계처럼 돌아가는 하나의 지구.
공업 도시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넓은 이곳이 바로 공업 지구였다.
"그래서."
히메와 아임 낫 리틀의 뒤에서 따라가던 도미닉 경이 물었다.
"제련소가 어디쯤이오?"
도미닉 경은 아까부터 폰으로 지도를 찾아보았지만 이미 도착했다는 문구만 떠 있을 뿐, 정작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라고 하셔도..."
그리고 이 제련소를 가장 자주 찾는 사람인 아임 낫 리틀이 난감한 듯 말했다.
"여기가 모두 제련소인걸요."
그렇다.
지금까지 도미닉 경이 공업 지구라고 착각한 곳은 사실 제련소였고, 공업 지구는 이 제련소를 기준으로 지하를 향해 수천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였으나,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공업 지구 리소스 잡아먹는 소리'라며행정부를깔 때 쓰는 곳이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십 억 개의 장비와 수백 억 장의 설계도가 오가며, 찾아오는 사람마다 수 천의 장비와 수 만의 설계도를 소모하는 곳.
그야말로 규모의 경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업 지구였다.
도미닉 경은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 입일 떡 벌린 채 말을 잊었다.
"다들 처음엔 그런 반응이죠. 저도 집 밖으로 처음 나왔을 때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아임 낫 리틀이 도미닉 경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쪽으로 가야 해요. 정식 제조권을 얻어야 하니까요."
아임 낫 리틀이 제조 신청서를 들어 올렸다.
신청서에는 이미 도미닉 경의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이는 히메와 만나기 전 합의된 내용이었다.
"두 분께서는 제작 및 강화니까... 저쪽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도미닉 경, 나중에 봐요!"
그 말을 끝으로 리틀 도미닉 경을 끌어안은 아임 낫 리틀이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임 낫 리틀의 품 안에서 리틀 도미닉 경이 마지막까지 인사하듯 짧은 팔을 휘둘렀다.
아임 낫 리틀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앨리스만 남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갈까요?"
"그럽시다."
도미닉 경과 히메는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 내고 말을 이어 나갔다.
앨리스는 가방 가득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소녀답게 주변의 장비에 정신이 팔렸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정도 설명은 필요할 것 같소."
"네?"
"장비 말이오."
도미닉 경이 방패를 퉁퉁 쳤다.
"아."
히메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별 건 아니에요. 그저 장비를 얻고 강화하면 되는 거죠. 이것도 시즌마다 다르긴 한데... 아마 이번 시즌은 세 부위일 거예요. 국룰은 갑옷, 무기, 장신구"
"시즌? 세 부위? 국룰?"
아, 거기부턴가. 하고 히메가 생각했다.
"가차랜드의 장비 시스템은 행정부 관할이라서요. 행정부가 교체되는 시기를 한 시즌이라고 하는데, 시즌이 바뀌면 장비 슬롯이 바뀌기도 해요. 국룰이라는 것은... 어떻게 말해야 하나..."
히메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기의 카드를 꺼내 장비칸을 보여 주었다.
무기장신구장신구로 이루어진 세 개의 칸.
"이렇게 각 시즌 별로 처음 장비 시스템을 활성화하면 자기가 원하는 슬롯을 뚫을 수 있어요. 저는 최대한 딜과 유틸로 승부하는 편이기에 생존력을 포기하고 극딜셋으로 맞췄죠."
도미닉 경은 그동안 배운 것이 있어서인지 히메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난하게 뚫어도 되는 슬롯은 보통 무기방어구장신구를 1:1:1 비율로 뚫는 거죠. 이 비율을 보통 국룰이라고 불러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지만."
국룰이라는 단어는 가차랜드의 초기부터 존재한 신비한 고대의 언어.
히메는 그 단어가 뜻하는 의미만 어렴풋이 알 뿐 그 기원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서로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어색함도 조금 사라지고, 무엇보다도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왔네요. 이제 여기서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죠."
히메가 도미닉 경 대신 번호표를 뽑아주었다.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3번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히메가 건네준 종이에는 3번이라고 적혀 있으니, 별일 없다면 바로 자기의 순서가 되리라.
"3번 고객님! 1번 창구로 가시면 됩니다!"
도미닉 경처럼 아직 장비 슬롯을 개방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던지 바로 호명되는 번호.
"다녀오겠소. 앨리스? 히메 공 옆에 꼭 붙어 있어라."
"네! 스승님!"
도미닉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1번 창구로 향했다.
거기에는 수염을 멋지게 땋은 드워프가 앉아 있었다.
"세상에, 수염에 맹세코 지금 슬롯을 뚫으러 온 사람은 처음 봤네."
드워프는 천연기념물이라도 본 눈으로 도미닉 경을 쳐다보았다.
"슬롯을 뚫으러"
"알지, 알아. 우리들 눈엔 다 보여. 자네의 장비의 질이나 슬롯이 훤히 보인단 말일세. 그래서 내가 아까 말했지 않나. 이제서야 슬롯 뚫으러 온 사람은 처음이라고."
드워프가 투덜거렸다.
"앉게. 레벨은 충분한 듯하니 3개의 슬롯을 한 번에 열 수 있겠군."
도미닉 경은 드워프의 말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팔을 내어보게. 싫다면 다리나 골반, 혹은 쇄골이나 두개골을 내어도 좋고."
도미닉 경이 순순히 오른팔을 내밀었다.
방패를 주로 쓰는 도미닉 경은 오른팔보다 왼팔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잘못된다면 오른팔이 없는 게 더 나았다.
"흠. 오른팔이라."
보통은 왼팔인데 말이지. 라고 흥미로운 눈으로 도미닉 경을 쳐다본 드워프가 책상 아래에서 정과 망치를 꺼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오른팔에 정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조금 따끔할 수도 있네."
그리고 도미닉 경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망치를 내리쳤다.
깡! 하고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도미닉 경은 그 찢어질 듯한 금 속성 울림에 몸을 움찔했다.
"참게."
깡! 깡! 하고 나머지 두 번의 소리가 들렸다.
"자, 되었네. 안 아프지? 이상한 데는 없고?"
도미닉 경은 오른팔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소. 이게 맞는 거요?"
"맞아."
드워프가 말했다.
"카드를 열어 보게. 장비란이 생겼을 거야."
도미닉 경이 카드를 꺼내 확인해보니 과연 장비라는 항목이 생겨 있었다.
"그 항목에 들어가면 세 칸이 있어. 거기서 원하는 대로 조합해서 설정해. 다만 설정 후 동의는 신중하게. 기회는 한 번밖에 없다고."
내가 아는 사람 중 누구는 장비 슬롯 설정 동의를 잘못한 이후로 후회를 몇 번이고 했다더군.
드워프가 무언가 말했으나 도미닉 경은 생각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설정한 이후 동의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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