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15화]사건의 발단
* * *
가차랜드에는 양산박이라고 불리는 조직이 있다.
판에 박힌 양산형 게임을 만들며 세를 불려 나가던 이 조직은 한때 가차랜드를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시스템의 규제와 성좌들의 개입으로 전성기의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차랜드의 뒷골목의 지배자를 말할 때, 양산박은 무조건 나오는 이름이었다.
"대형, 오늘은 다섯 개의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좋아. 내일은 여섯 개를 목표로 하자고. 가능하겠지?"
신기하게도 양산박은 겉으로 보기에는 꽤 건실하고 합법적인 기업이었다.
가끔 불법과 합법을 줄타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선을 넘지는 않는 이들.
양산박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양산박을 그렇게 생각했다.
"아, 조금 힘들지도 모릅니다, 대형. 다들 맛이 가 버려서..."
"뭐야. 설마 정량보다 더 써버린 거냐? 야! 노동자보다 '그게' 더 비싼 거 몰라? 가성비를 봐야지, 가성비를!"
대형이라고 불린 자가 노동자들의 상태를 보았다.
눈 밑은 퀭하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으며 시선과 손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 씨. 이거 완전히 맛 갔네. 새로 받아와야겠다."
"그거... 그거 주세요...헤...그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대형이 손가락으로 맛이 간 사람을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헤실헤실 웃는 모습은 섬뜩할 정도였다.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위장.
그 속은 이미 불법으로 가득 차다 못해 완전히 검게 썩어 버린 곳.
그것이 바로 양산박의 실체였다.
불법과 합법의 사이를 넘나드는 것도 불법적이고 뒤틀린 일을 처리할 때 '실수였다.'라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차랜드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철저한 악.
그러나 중앙 시스템은 이들을 추방하거나 제재할 수 없다.
가차랜드의 특성상 가치가 필요하고, 가치를 위해선 위기와 극복이 있어야 하는 법.
위기와 극복에 있어 온전한 악은 아주 좋은 소재였다.
악을 극한으로 담아 오히려 가치를 가져 버린 케이스.
양산박은 그런 곳이다.
"야, 가서 비품 좀 달라고 해. 3번 라인 2개. 1번 라인 1개."
열악한 환경을 돌아다니며 노동자의 상태를 확인하던 대형이 옆에 있던 조직원에게 말했다.
조직원은 수첩과 펜을 들고 열심히 대형의 말을 적었다.
"대형! 큰 건수 들어왔습니다! 지금 의견이 반반이라 수주 받을지 말지 대형이 결정해야 한답니다!"
공장의 뒷문이 열리고 새로운 조직원이 들어왔다.
대형이라 불린 이가 움찔하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조직원을 보았다.
"아, 또 뭔데."
"아무래도 보안이 중요해서..."
조직원이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긁던 손을 내려놓으며 검지 손가락을 반쯤 펼쳤다.
"...간다고 전해. 뛰어!"
대형은 화를 내듯 조직원에게 말했다.
조직원은 그 말에 바로 공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후배야. 가서 탈 것 좀 대기시켜라."
대형이 수첩과 펜을 들고 있던 조직원에게 말했다.
그 조직원도 아까 그 조직원처럼밖으로 뛰쳐나갔다.
대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은 평범한 상황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양산박에서 쓰는 암호였다.
멋쩍은 웃음은 돈과 연구의 중간 단계.
뒷머리를 긁은 건 절도와 강도. 특히 야간.
그리고 손을 내리며 반쯤 펼친 검지는 최우선 상황.
불법적인 일을 당당하게 말할 수 없기에 조직원들끼리 수신호를 통해 일을 전달하는 것이다.
대형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채 천천히 걸어 공장을 나갔다.
끼룩끼룩하고 갈매기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담배를 피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끼익소리와 함께 금주법 시대에서나 볼 법한 클래식 카가 멈춰 선다.
"대형! 어디까지 모실까요?"
후배라고 불린 조직원이었다.
"본사."
대형은 후배의 차 뒤에 고리를 걸고 자기 탈 것을 걸었다.
시스템상 탈 것은 1인당 한 명만 태울 수 있기에 생긴 촌극이었다.
용 모양 풍선을 매단 대형이 그 풍선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앞 차량의 트렁크를 두 번 쳐 신호를 주자 앞에 탄 후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넵! 출발하겠습니다!"
차량이 출발하고 용 모양 풍선이 살짝 떠올랐다.
여전히 대형은 담배를 입에 문 채였다.
...
양산박의 본사에 도착한 대형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했다.
최상층이라고 해도 3층짜리 건물이었으나, 3층에 도착한 대형은 다시 2층, 3층, 1층, 3층을 반복적으로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모든 패널이 꺼지더니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 102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대형은 그 축축하고 기분 나쁜 통로에 발을 옮겼다.
"언제 와도 기분 나쁜 곳이란 말이지..."
마침내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 끝에 있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불이 켜지더니 여섯 개의 관이 보였다.
"할배들, 나 왔소."
대형의 말에 관이 열리고 여섯 명의 젊은 남녀가 나타났다.
금발의 엘프는 헤드셋을 끼고 열심히 방송을 보고 있는 중이었고, 그 옆에서 마법사가 화면을 같이 보는 중이었으며 진지하지만 잘생긴 남자는 그 모습을 아니꼽게 쳐다보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왕의 옷을 입은 자가 폰을 들고 선택지를 고민하고, 젠가로 탑을 쌓아 그 사이에 고블린 모형을 놓는 남자와 이마에 'IQ 150 이상'이라고 적힌 모자를 쓴 여자가 있었다.
하나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인물들.
그러나 그 본질을 깨달은 자들은 이들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할배들."
대형이 각자 할 일 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긴급한 일이라던데. 무슨 일입니까?"
"별 건 아니야."
방송을 보고 있던 엘프가 말했다.
이 엘프는 수천 개의 엉터리 게임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노괴였으나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남아 영생에 가까운 가치를 얻은 자.
"가지고 싶은 게 생겼거든."
엘프가 들고 있던 폰을 뒤집어 대형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거기엔 성좌 아임 낫 리틀의 방송이 틀려져 있었다.
"...성좌는 납치하기 쉽지 않은데."
"그게 아냐."
엘프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말했다.
이 자는 엘프보다 더 나이가 많았지만, 역시나 영생을 누리고 있었다.
판타지의 근본 클래스라는 특징과 시원한 광역 피해, 그리고 화려한 이펙트.
하루에도 수십 개 씩 나오는 엉터리 게임들에 꼭 들어가는 클래스.
"필요한 건 바로... 인형이야."
마법사가 손가락으로 화면의 일부를 가리켰다.
그 사이 쓸데없이 노출도가 높은 가슴이 출렁거렸다.
정말 쓸데없이.
"인형이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대형이 물었다.
"저 인형은 '인격'을 탑재한 인형이니까."
두 여자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미청년이 말했다.
쓸데없이 화려한 갑옷과 대검을 장착한 이 남자는 역시나 이들과 한 세트로 나오는 근본 클래스.
그러나 남캐라는 특징과 이펙트가 좀 밋밋하다는 단점으로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콤플렉스였다.
"인격을 탑재했단 말이오?"
대형의 인상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게 뭐? 라는 표정.
"알아. 개척자용 안드로이드 구해서 인스톨하면 되지 않느냐는 거겠지. 나도 그 마음 동의해. 하지만 어쩌겠어."
미청년이 엘프와 마법사를 힐끗 노려보았다.
"저년들이 귀엽다고 가져오라는데 말이야. 저게 뭐가 귀엽다고. 멋진게 낫지."
미청년이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미청년은 이 일에 반대하는 모양.
찬성이 둘, 반대가 하나.
"하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모자를 쓴 여자가 말했다.
"이미지 개선에 좋을지도 몰라. 솔직히 우리가 짜증 난다는 소리를..."
말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멍한 눈이 되었다.
5초 정도 지나자 다시 눈에 생기가 돌아온 여자가 말을 이어갔다.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귀여운 마스코트가 있다면 덜하지 않을까?"
라고 말을 끝낸 여성은 다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15초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 여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즉 무료 게임에서 돈을 뽑아내는 실력자.
그러나 너무 일에 심취한 나머지 자기 자신마저 실험체로 쓰는 괴짜.
이로써 찬성이 셋, 반대가 하나.
"우린 반대야."
"찬성하기를 눌렀더니 좌천당해서 백수로 퇴보했거든."
각각 탑을 쌓던 이와 왕의 옷을 입은 자가 말했다.
왕의 옷을 입은 자가 현실과 선택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말하자 탑을 쌓던 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아니잖아. 우리에겐 이득이 될 것이 없다는 거지."
물론, 본체로 오면 다르겠지만. 하고 탑을 쌓던 이가 말했다.
탑을 쌓던 이의 본체는 꽤 건실한 기업의 수장.
수집형 카드 굿즈를 만드는 회사였으니까.
어찌 보면 양산박의 돈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이로써 찬성이 셋, 반대도 셋.
대형은 마침내 왜 자신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이제 선택은 자기 몫이었다.
...
그날 밤.
성좌 아임 낫 리틀의 거처.
"헤헤."
아임 낫 리틀은 방송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 리틀 도미닉 경을 끌어안았다.
리틀 도미닉 경은 바둥거리더니 이내 익숙해진 듯 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임 낫 리틀은 리틀 도미닉 경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성좌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지 아임 낫 리틀은 리틀 도미닉 경의 솜이 빵빵한 볼을 만지작거리며 행복함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복면을 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꺄악! 누구세요?"
아임 낫 리틀은 이불을 끌어안고 구석진 곳으로 몸을 옮겼다.
도둑? 강도? 연쇄살인마?
아임 낫 리틀은 이 무시무시한 상황에 놀라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아, 안심하세요. 도둑입니다."
"네?"
도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물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 사실 저희가 당신의 인형을 훔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가져가도 될까요?"
"네?"
"네라고 하셨군요. 동의하신 겁니다."
도둑은 바닥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아임 낫 리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있던 인형을 빼앗아 문밖으로 나섰다.
참으로 황당한 상황.
그리고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던 아임 낫 리틀은 한참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리틀 도미닉 경을 빼앗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