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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112화 (112/528)

〈 112화 〉 [111화]도미닉 AND 히메

* * *

"누구요?"

현관으로 나선 도미닉 경은 문밖에 선 이에게 말했다.

"사료... 아니, 택배입니다."

도미닉 경이 그 말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의문스럽다는 듯 하나 남은 눈을 찌푸렸다.

평소의 택배는 천국 택배에서 담당했다.

그러나 지금 온 택배 기사는 천사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커다란 뿔에 붉은 피부.

박쥐 피막같은 날개.

로고도 붉은 오망성안에 택배가 있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지옥 택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택배죠!"

대신 안전 따윈 개나 줬지만요. 염소 수염을 기른 붉은 피부의 악마가 사악하게 웃었다.

"아무튼 오늘 잠깐 서버가 불안정해 임시 점검이 있었습니다. 이건 그 보상이죠."

"임시 점검?"

도미닉 경은 오늘 비밀 결사 요.양.원이 찾아온 것 외에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나 도저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런 게 있었소?"

"아, 맞다. 2성이셨지. 아직 못 느끼시나보다."

악마가 광대뼈까지 입꼬리를 주욱 찢으며 웃었다.

"임시 점검 동안은 시간이 잠깐 멈추거든요. 아무튼 여기 서명하시고 수령하시면 됩니다."

악마가 여기저기 찌그러진 서류철을 건넸다.

도미닉 경은 무의식적으로 서명을 하려고 했으나, 이내 이 택배원이 악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류를 꼼꼼히 읽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그 어떤 불평등 조항도 존재하지 않는 정말 평범한 서류였다.

"다들 그렇게 한 번쯤 확인하죠. 혹시나 악마의 계약이 아닌가 하고."

악마가 끔찍하게 웃었다.

"이미 대가는 다 받았으니 걱정 하지 마시죠. 지금의 저희는 계약을 이행하는 입장이지, 계약하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한 악마가 도미닉 경을 보채듯 시선을 보냈다.

도미닉 경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내 서류에 서명을 적었다.

서류는 불타듯 사라져 버렸다.

"자, 이제 이것은 당신 것입니다. 코더들의 영혼이 제 것이듯 말이죠."

약간의 휴식이면 영혼을 파는 코더들이 수두룩한데, 왜 힘들게 계약을 합니까. 라고 작게 중얼거린 악마는 모자의 끝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부디, 다음번엔 지옥 택배가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땅이 오망성으로 불타며 순식간에 악마가 사라졌다.

불길마저 사라진 뒤엔 그을음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퇴장.

그저 도미닉 경의 손에 들린 검은 보따리만이 악마가 왔다 갔다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

도미닉 경은 자루를 슬쩍 풀어보았다.

안에는 웬 이상한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뭐지?"

도미닉 경이 그 자리에서 그중 하나를 꺼내 하나 남은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아무래도 이건 달팽이의 화석인 모양인데...

"Tier3 재료? 이게 무슨 뜻이지?"

도미닉 경은 또 알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오자 호기심이 가득 피어오름과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차랜드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정말 알아야 될 것이 산더미 같은 곳이라는 찬사를 내뱉으며.

도미닉 경은 일단 이 알 수 없는 검은 보따리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히메가 도미닉 경의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라. 장비 성장용 재료네요."

히메는 가차랜드 토박이 출신.

그만큼 도미닉 경이 모르는 가차랜드의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장비 성장용 재료?"

도미닉 경은 아까 꺼내둔 달팽이 화석을 꺼내며 말했다.

"이게 말이오?"

장비 제련도 아니고 성장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게다가 장비를 제련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이런 화석이 재료가 된다고?

"장비를 이렇게 만든다는 거요?"

"...? 원래 이걸로 만드는 거잖아요?"

혼란을 느낀 도미닉 경의 물음에 오히려 히메가 되물었다.

히메의 처지에선 태어났을 때부터 이 방식이었으니 히메의 의문은 정당했다.

"이걸로 만들지 않으면 장비를 뭘로 만들고 성장 시켜요?"

가차랜드의 장비 제조 방식은 특정한 재료를 모아 제작하는 방식.

그리고 성장에도 특정한 재료가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재료를 얻기 위해서 스토리 모드를 밀 필요가 있는 법이고.

지금까지 스토리 모드는 그냥 즐기러 가는 줄 알았던 도미닉 경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히메도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설마... 장비 성장을 하나도 하지 않은 거예요?"

그렇다.

도미닉 경은 시스템의 도움 따위 없는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가차랜드에 도착해 이것저것 알아갔지만, 아직도 알아야 할 게 많은 사람.

도미닉 경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요소가 수두룩한 것이다.

도미닉 경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히메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장비 없이 싸웠다고?

사실 가차랜드에서 주어진 무기는 일종의 스킨이었다.

실제 추가 스탯은 장비의 성장이 담당하고 있다.

그 말은,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아무런 성장 없이 싸워왔다는 뜻이다.

히메는 왜 도미닉 경이 너프를 두 번이나 당했는지, 그중 한 번은 출시도 전에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장비 성장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겠소?"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물었다.

"좋아요."

히메가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답을 내놓았다.

사실 이는 히메가 고안한 고도의 술책이었다.

방금 전 도미닉 경이 택배를 받으러 나갔을 때, 히메는 극심한 허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백을 위해 텐션을 억지로 끌어냈지만, 실패한 순간 그 텐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째서 난 이렇게 엉망인 걸까.

그렇게 자신을 자책하던 히메는 이내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여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로의 말이 기억났다.

'여우처럼 요망해지라는 뜻입니다.'

그래.

이건 히메에게 있어서 차라리 기회다.

이제 도미닉 경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고백을 조금 미뤄도 된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이렇게 급하게 고백할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여우짓으로 도미닉 경을 홀려야 한다.

그게 바로 고백의 성공률을 올리는 방법이었고, 그게 바로 아버지와 제로의 가르침이었으니까.

히메는 차라리 고백이 실패해서 잘되었다고 자신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보다는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 더 나은 법 아니겠는가.

히메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일단 장비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부위가 필요한지, 그리고 어떤 재료가 필요한 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나 히메의 책략은 시작부터 장애물을 만나 좌초되었다.

히메는 대장장이나 분석가와 관련된 특성이 없었기 때문에 도미닉 경의 장비를 알아볼 수 없다.

이건 그냥 도미닉 경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히메가 도와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미안해요. 그 부분은 혼자서 해도 될 것 같네요. 대신 다른 것이라도 설명해 드려요?"

히메는 애써 환하게 웃으며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사실 히메는 도미닉 경을 속이고 같이 움직일 수도 있었으나 차마 도미닉 경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여우처럼 굴기로 마음먹었으나, 아직 히메는 여우가 되기엔 마음이 너무 여렸다.

하지만 도미닉 경도 그런 히메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약간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히메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도미닉 경의 눈치가 대단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히메에게 달린 여우 귀와 꼬리가 시무룩하게 쳐저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레이디에게 그리 야박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네?"

도미닉 경이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히메가 되물었다.

시무룩하게 내려가 있던 여우 귀가 쫑긋 제자리를 찾았다.

"내일 장비에 대해서 알려주시오. 내가 설명만 들어선 이해를 잘못 하는 성격이라서."

도미닉 경이 환하게 웃었다.

히메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도미닉 경을 바라보면 늘 빠르게 뛰던 심장이었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째서인지 다른 때보다 더 즐겁게 뛰고 있었으니까.

"그게... 어... 그러니까..."

"그렇다면 일단 집으로 갔다가 내일 다시 만나는 것이 좋겠구려. 언제가 편하오? 오전? 오후?"

아. 오전은 앨리스와 훈련이 있으니 힘들겠군. 이라고 말한 도미닉 경이 턱을 쓰다듬었다.

"내일 오후 3시, 상업 지구 입구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준비하고 바로 나오면 그쯤 될 것 같소."

히메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도미닉 경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속을 맴돈다.

도미닉 경의 말이 흐릿하게 들리지만, 어째서인지 머리는 이해하고 계속해서 되뇌이고 있다.

오후 3시, 상업 지구 입구. 오후 3시, 상업 지구 입구.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히메는 어느새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다녀온 건 잘되었어?'

마음속 친구인 토끼 인형 우사기 상이 히메에게 물었다.

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일 약속이라도 잡았어? 어째 열이 조금 있어 보이는데.'

히메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과의 약속?'

토끼가 물었다.

히메는 그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뭐야. 데이트네?'

"뭐야. 데이트네?"

마음속의 우사기 상과 히메의 말소리가 겹쳤다.

히죽히죽 침대에 누워 웃던 히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트?"

그렇다.

히메는 그제야 도미닉 경이 한 제안이, 세간에서는 '데이트'라고 부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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