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7화]레미 VS 히메
* * *
"헛?"
히메는 번쩍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긴 어디지?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처음 보는 공간.
아니, 생각해 보니 어제 들린 가게다.
숙취로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히메는 생각했다.
"깼네요?"
"경이로운 회복 속도입니다. 박사님과 비교하면 말이죠."
이게 무슨 소리지?
히메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엔 길고 폭신폭신한, 마치 양과 같은 소녀가 딸기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그 소녀의 옆에는 백금과 금으로 치장한 안드로이드가 박사라고 불린 이를 호위하듯 서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 두 사람은 레미와 제로.
히메는 겨우 기억을 더듬어 어제 필름이 끊기기 전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도미닉 경은 바보야...'
'우리 오빠는, 바보가 아니에요.'
오빠?
히메는 드문드문 끊어진 기억의 조각들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중요한 정보를 캐치해냈다.
히메가 닌자다운 눈썰미로 레미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갈색의 머리카락, 에메랄드빛 눈.
전체적인 분위기나 외모에서 남매라고 부르기엔 부족해 보였으나 누군가에게 도미닉 경과 레미가 남매라고 말하면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수준.
레미가 도미닉 경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서일까?
히메는 레미의 얼굴 너머로 도미닉 경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런 순간에도 도미닉 경에 대해서나 생각하다니.
히메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제 도미닉 경과 이어질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히메가 자기 앞에 반쯤 남아 있던 물을 홀짝였다.
"그나저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히메의 옆자리에 앉은 레미는 탁. 하고 딸기 우유가 든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째서 저희 오빠의 이름을 그렇게 애타게 불렀던 거죠?"
풉 하고 히메가 고개를 돌린 채 마시던 물을 뿜었다.
다행스럽게도 레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애애애애애애타게 불렀다니 무슨 소리를"
누가 봐도 당황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변명.
"숨기지 않아도 돼요."
레미는 빨대로 딸기 우유를 푹푹 찔렀다.
"사실, 나도 오빠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니까."
원하면 오빠에 대한 정보를 먼저 드릴까요? 라고 레미가 속삭였다.
히메는 레미의 제안에 순간 솔깃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미닉 경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는 찰나에 정보는 무슨.
흐응하고 히메의 반응을 살피던 레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오빠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건 느티나무예요. 낭창낭창 휘는 게 좋다나."
굶주릴 때 껍질이 연해서 먹기도 좋다고 했던가? 라며 말을 끝마친 레미.
순간적으로 히메의 귀가 쫑긋거렸다.
빙고.
일부러 별 상관없는 정보를 던져 본 것이 정답이었다.
레미는 계속해서 떡밥을 던졌다.
"그다음에 좋아하는 게... 아마 단 거일 거예요. 꿀을 그렇게 좋아해서 온종일 산을 탄 적도 있거든요."
히메의 귀가 더욱 솔깃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 뒤를 쫒다가 알아낸 건데, 요즘 흥미를 가진 게"
레미가 중요한 정보를 꺼내기 직전에 입을 딱 멈췄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며 딸기 우유를 쪽쪽 빨아먹었다.
지금까지 떡밥을 던졌으니 이제는 입질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
"흥미를 가진 게...?"
그리고 히메는 그 떡밥을 훌륭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히메는 지금까지 도미닉 경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도미닉 경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미의 말들은 현재 히메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유일한 통로였고, 그 통로를 따라가던 히메는 저 멀리 소통의 문이 닫힐 것 같자 미칠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한 세력을 이끄는 이의 딸로서 살아온 히메가 부족할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원하는 건 어떻게든 얻을 수 있었고, 하고픈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 히메였기에 이런 단순한 떡밥도 덥썩 물어 버리는 것이다.
"일단, 왜 우리 오빠를 그리 애타게 불렀는지 먼저 말해주실래요?"
초조하게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는 히메를 보며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레미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면 자기 대답을 듣기 위해 거래를 수락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노림수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사실 듣고 좀 웃길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다면..."
"얼마든지요. 남의 이야기를 듣고 비웃을 정도로 제가 잘 살아온 것도 아니라서."
히메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물이 든 잔만 양손으로 들고 매만질 뿐이었다.
마침내 마음을 정리했는지, 히메는 잔에 든 물을 한 번에 주욱 들이키고 말했다.
"저는... 저는... 도미닉 경을 사랑했어요."
"세상에."
레미가 깜짝 놀랐다.
그 맹한 오빠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레미가 일곱 살에 한 번 들은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다.
그러나 레미는 곧 자신이 기억하는 도미닉 경은 어렸을 적, 그러니까 징집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의 노련한 도미닉 경이라면 또 어떨지는 모르지.
레미는 그렇게 스스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과거형이네요. '했다.'라니."
레미는 박사 학위를 여러 개 취득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한 아이.
그 사소한 차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은 마음을 정리하려구요."
"어째서죠?"
그리고 그 사이에 심리학 박사 학위가 하나 끼어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개과에 대한 심리학이었지만.
"도미닉 경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더라구요. 이미 늦어 버린 거죠."
히메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순간 그녀의 머리 위에 축 늘어진 여우 귀가 보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는데."
레미는 혼란에 빠졌다.
오빠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면, 도미닉 경은 허당 중의 허당.
절대로 연애라는 것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다.
어릴 적 촌장 딸 베스와 방앗간집 루시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레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빠에게 누가 먼저 고백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싸움으로 번진 것이었다.
결국 방앗간집 루시가 이겨 도미닉 경에게 먼저 고백했으나, 도미닉 경은 루시의 고백에 이렇게 답했다.
'난 싸움이 싫어. 루시. 너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너의 방식은 잘못 되었어.'
그리고 이어진 폭력의 나쁨에 대한 한 시간 반의 설교는 루시 뿐만 아니라 베스까지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그 이후 도미닉 경에게 고백하는 여성은 없었다.
적어도 징집될 때까지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미닉 경의 본질이었다.
도미닉 경은 남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허당이었고, 이는 가치관이 바뀐 지금이라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순간 레미는 어떠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빠가 그런 허당이니, 만일 오빠와 사귀는 사람은 오빠만큼 허당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미가 황급하게 히메에게 물었다.
"혹시 어떤 사람이었나요, 상대는?"
"상대요?"
히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닌자답게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히메는 레미의 말에 충분히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미닉 경을 스승님이라고 불렀어요."
"머리카락은 시린 빛의 은색이었고... 파랑색이 조금 섞여 있던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마치 만년설을 깎아 만든 미녀였죠."
"다만, 약간 어린애 같은... 면모가 있었어요."
그렇게 말한 히메는 그때가 생각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레미는 히메의 말을 종합해 머릿속에서 조합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온 결론.
일단 히메가 말한 것처럼 오빠는 '애인'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굉장히 심플하고, 또 케케묵은 것이었다.
바로, 어릴 적 도미닉 경의 이상형을 레미가 알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상형 리스트에 의거해 히메가 말한 여성은 절대 오빠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미닉 경의 곁에 있다는 여성은 누구일까?
레미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으나 어딘가 하나 빠진 듯 정보가 모아지지 않았다.
결국 레미는 히메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혹시 추가적인 정보는 없나요? 의상이라던가"
"아."
히메가 탄성을 내질렀다.
가장 간단하고 중요한 정보를 누락했다는 의미의 탄성이었다.
"사슬갑과 튜닉을 입고 있었어요. 도미닉 경의 옆에 서 있으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기사더군요."
빙고.
레미의 머릿속에 마지막 퍼즐 조각이 나타나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위치했다.
레미는 빙글빙글 웃으며 히메를 바라보았다.
"히메 씨가 본 여성은 애인이 아닐 거예요."
"네?"
"오빠는 기사죠. 그리고 페럴란트에선 기사에게 종자를 뽑을 권리가 있어요. 그렇다는 말은..."
레미는 너무 머리를 쓴 나머지 눈이 핑 돌았다.
당분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딸기 우유를 다시 한번 빨대로 쪽 빨아 마신 레미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혈당의 여파를 느끼며 히메에게 말했다.
"오빠의... 종자예요."
"종자?"
히메는 문득 그 말을 들은 기억이 들었다.
그때는 도미닉 경이 그녀를 임신시켰다는 말로 알아들었지만, 히메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히메는 종자라는 단어를 몰랐다.
닌자의 계급은 조닌(上?), 추닌(中?), 게닌(下?).
종자에 대응하는 계급은 게닌. 즉 하급 닌자였다.
"종자란, 기사를 모시며 기사도와 무술을 배우는 사람을 말해요. 아마 당신이 본 것도 그런 사람일 거예요."
"종...자..."
닌자 마을에서 살아온 히메는, 종자라는 말이 설마 기사를 모시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을 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히메는 종자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마침내 자신이 무슨 상황에 부닥친 것인지 알아차릴 때까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