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06화]??? VS 히메
* * *
도미닉 경은 말없이 히메를 바라보았다.
사실, 도미닉 경은 이런 경우를 몇 번 겪어보기는 했다.
애초에 기사라는 직업은 상위 10%에 속하는 고급 인력.
경우에 따라서는 돈과 명예가 따라오는 직업.
그래서인지 나름 전도유망한 기사를 보면 여러 직위의 여성들이 다가오고는 했다.
그러나 기사라는 직업이 어디 꿈과 낭만만 가득한 직업이던가.
기사의 현실을 알아차린 이들은 바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도망가기 일쑤.
기사는 가난한 직업이다.
몇몇 운 좋은 이들은 부와 명예를 얻지만, 정말 극소수.
대부분의 기사는 벌어들이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식비와 장비 유지비로 써야 했다.
여기에 말까지 있는 기사들은 건초 값과 말 유지비, 그리고 말을 돌볼 종자 일급까지.
괜히 말을 타는 기사의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 아닌 것이다.
도미닉 경은 여전히 히메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있었다? 왜 과거형이지?"]
수화기 너머 도미니카 경의 의문이 들렸다.
도미니카 경은 지금 당장에라도 도미닉 경이 처한 상황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도미니카 경을 더 미치게 할 일이 일어났다.
"...이번엔 물러나겠습니다. 도미닉 경."
"응? 아. 그러네. 오늘은 사실 인사만 하러 온 거니까요."
히메는 도미닉 경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도미닉 경에게 무언가 말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문득 도미닉 경이 앨리스를 구하려고 몸을 던진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게임 시스템으로 인한 버그성 플레이였으나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히메는 그런 걸 따질 생각조차 없었다.
"가죠. 조제프 준장."
"그래요. 아. 다음에 봅시다, 도미닉 경!"
탓.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히메는 쿠노이치였기에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 이는 조제프 준장의 발소리일 것이다.
["뭐야? 왜 과거형인지 알려주고 가!"]
수화기 너머에서 도미니카 경이 드라마에 과몰입한 사람처럼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앨리스가 멍하게 서 있는 도미닉 경을 향해 달려왔다.
"글쎄다..."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물음에 생각의 흐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은 히메가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미닉 경이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츠키 공이 뭘 어쨌다는 거요?"
도미닉 경은 역으로 도미니카 경에게 지금까지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도미닉 경도 호기심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니까.
...
바 올드 월드 블루스.
바텐더가 취미로 하는가게였기에 평상시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으나, 오늘은 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아니, 손님들이라고 해야 하려나.
천재 과학자인 밴시 박사는 바텐더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언제나처럼 곰돌이 컵받침 위에 놓인 딸기 우유를 홀짝였다.
그리고 새롭게 찾아온 두 여성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두 여성은 검은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한쪽은 토끼 귀, 다른 한쪽은 여우 귀가 달려 있었다.
수인들일까? 요즘은 수인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딸기 우유에 꽂힌 빨대로 쪽쪽 빨아먹던 밴시 박사...아니, 도미닉 경의 여동생 레미가 실없는 생각했다.
알아차리셨겠지만 군복을 입은 두 여성의 정체는 바로 히메와 조제프 준장.
몇십 분 전, 도미닉 경의 집에서 나온 히메와 조제프 준장은 거리를 걸었다.
비밀결사 요한 양치기 원정대는 가입하려는 인원에게 고작 수제 초코 쿠키 하나와 바나나 우유 하나밖에 못 줄 만큼 가난한 상태였으니 조제프 준장은 그렇다 쳐도, 히메는 그저 걷고 싶어져서 걸을 뿐이었다.
히메는 지금 마음이 너무 복잡한 상태였다.
술이라도 마실까? 라고 히메는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는 무언가 생각할 일이 있을 때마다 독한 술을 한 잔 마시셨다.
아버지는 현명한 분이시니까, 분명히 그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히메는 문득 꽤 눈에 잘 들어오는 바를 발견하고 들어왔다.
그게 바로 이 둘이 여기 바 올드 월드 블루스에 있는 이유였다.
히메는 바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연신 독한 술을 들이켰다.
맛은 상관없었다. 그저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있잖아요, 조제프 준장."
"네."
술을 전혀 못하기에 안주, 그중에서도 소시지 야채 볶음에서 소시지만 골라 먹던 조제프 준장이 나쁜 일이라도 들킨 듯 화들짝 놀라며 히메를 바라보았다.
"사랑이란 건 뭘까요?"
히메는 이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취한 것이다.
"사랑이라."
조제프는 대충 히메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취한 사람에게 조언해봤자 뭘 하겠는가.
이는 그녀의 상사를 모시며 배운 삶의 지혜 중 하나였다.
어차피 취한 사람이 원하는 건 동조지, 조언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 예상이 적중이라도 한 듯, 히메는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말하셨어요. 사랑은 쟁취해야 한다고. 여우같아야 한다고."
"그런데 또 누구는 남자가 다 늑대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교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히끅. 하고 히메가 딸꾹질했다.
"사랑 참 어렵네요. 쟁취하려고 여우도 되어 보고, 교제를 진지하게 고민도 해 보고... 그런데 결국 손에 쥔 것이 없잖아요."
히메는 도미닉 경을 떠올렸다.
과연 이 감정이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에 대한 호감이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감정은 뭐였을까?
이게 사랑이라면 어떨까?
더 빨리 다가갔더라면?
더 빨리 고백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플 일이 있었을까?
히메는 점점 생각의 호수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독한 술로 인해 둔하고 멍해진 감각이 머릿속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히메는 젓가락을 들어 소시지 야채 볶음을 한 젓가락 집었다.
이미 소시지는 조제프가 다 먹었기에 야채만 가득 집혀 있었다.
"어쩌면 말이에요...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전, 이 소시지 야채 볶음의 야채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있으면 좋지만, 없더라도 상관없는"
취했군. 조제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했다.
지금 히메는 너무 취한 나머지 취객 특유의 생각과 말이 따로 노는 화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그때였다.
엄청나게 복슬복슬한 긴 머리를 가진 여성이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을 찾아왔다.
얼마나 복슬복슬하던지 조제프는 양이 걸어 다닌다고 착각하고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아는 사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에요."
"아는 사람? ...아. 도미닉 경 말이군요?"
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사람이네요?"
레미가 히메를 바라보았다.
평행세계 이벤트 당시 만났던 기억이 있었다.
"도미닉 경은 바보야..."
히메는 이제 완전히 취했는지 이젠 주정만 부리고 있었다.
이래선 말이 통하지 않겠네. 레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미는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그저 자기가 할 말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 당신의 말에는 한 가지... 아니, 방금 전 그 말까지 두 가지 허점이 있어요."
히메를 향해 손가락을 두 개 펼쳐보인 레미가 말을 이었다.
"하나는 소시지 야채 볶음에 야채가 없으면, 그저 소시지 볶음일 뿐이라는 점이고"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름에 당당히 '야채'가 들어가지 않던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은 틀린 논리였다.
"그리고 우리 오빠는 바보가 아니에요."
레미가 가운의 주머니에 양손을 쑤셔 넣으며 말했다.
과연. 오빠라고 하는 걸 보니 가족 욕은 못 참는 것인가? 조제프 준장이 눈을 반짝이며 레미를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에게 가족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리고 그 가족이, 오빠에 대해서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 정보도 스토리에 언젠가 유용하게 쓰이리라.
물론 이 정보가 쓰일 일은 없었다.
"바보가 아니에요. 아주 심각한 바보지."
조제프 준장은 레미가 바로 다음에 말한 말에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남매.
남매간의 무언가... 그래.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조제프 준장은 레미가 아주 작게 '그런 오빠라서 좋지만.'하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말이 맞네요."
히메가 헤실헤실 웃었다.
"아주 심각한 바보. 뭔가 어감은 유치해 보이는데 마음에 들어요."
히메는 머릿속에 도미닉 경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상상으로 도미닉 경의 이마에 바보라고 적어두고, 안대에 멍청이라고 적은 뒤, 마구 낙서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상상이었으나 히메에게 있어서 이 행동은 도미닉 경을 잊기 위한 발버둥.
어쩌면, 히메는 여전히 도미닉 경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심각한... 바보..."
텅. 하고 탁자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히메가 완전히 취해 책상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레미는 갑자기 쓰러진 히메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조제프 준장을 바라보았다.
조제프 준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가뜩이나 비밀결사는 가난한 편이었고, 조제프는 돈이 없었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조제프 준장이 밖으로 사라졌다.
레미는 다시 바텐더 앞 자리에 앉아 남은 딸기 우유를 홀짝이기 시작했고
히메는 여전히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볼이 눌리도록 코를 골며 자고 있을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