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99화]겸허
* * *
"거미! 거미다!"
"전능하신 심연의 아귀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전능하신 심연의 아귀시여"
유령선의 해적들이 거미전차를 보고 혼비백산한 상황에서 도미닉 경은 거미전차에 매달려 유령선의 벽면을 오르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도미닉 경은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앨리스에게 말했다.
앨리스는 난간을 꼭 붙잡고 매달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에 떠 있는 해적선의 벽면에 붙어 있었기에 지상까지 대략 11미터는 되어 보였다.
떨어지면 크게 다치겠지. 사실 장비화된 앨리스는 절대 다칠 일이 없었으나 그래도 생리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은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움직여 벽면을 기어올랐다.
엔진이 굉음을 내며 비명을 질러댔다.
분명 도미닉 경과 거미전차는 유령선의 충각에 밀려 지뢰를 밟았다.
그런데 어떻게 유령선의 벽에 붙어 기어오르는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도미닉 경이 유령선의 충각에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가차랜드는 보이는 것과 실제 겪는 것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령선의 잠복 충각은 CC기에 가까워 피해량보다는 넉백에 중점을 둔 기술.
도미닉 경은 밀려날지언정 큰 피해를 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충격을 받아 비틀거린 도미닉 경은 조종간을 놓치고 말았다.
조종간이 제멋대로 움직이자 제어를 잃고 쓰러지기 시작한 거미전차.
여기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지뢰 위로 쓰러진 거미전차.
지뢰는 그 거미전차에 반응해 폭발을 일으켰고, 그 폭발의 여파로 쓰러지던 거미전차가 다시 일어났다.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
도미닉 경도, 앨리스도 차마 알아차리지 못한 짧은 순간에 일어난 상황은 더 황당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폭발의 여파로 일어나던 거미전차의 다리가 유령선의 용골 근처 판자에 박혀 같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어? 스승님! 지금 저희 난다요!"
앨리스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혀를 씹고 말았다.
도미닉 경은 점점 위로 떠 오르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거미전차의 다리를 뽑아내려고 노력했으나 폭발의 여파와 거미전차의 엄청난 무게가 합쳐져 깊게 박혀 버린 다리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도미닉 경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다리를 어떻게든 뽑아내어 11미터 지상으로 떨어지느냐.
아니면 갑판 위로 올라가 정중하게 내려달라고 부탁하느냐.
적어도 도미닉 경은,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도미닉 경이 가진 특수 능력 [기수]로 인해 낙하 피해도 줄어들 테지만, 이미 지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낙하 피해까지 입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생각한 도미닉 경은 바로 엔진의 회전수를 높여 유령선의 옆면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거미처럼.
그리고 마침내 도미닉 경의 간절함과 노력이 결실을 맺어 유령선의 갑판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스승님? 다들 떨고 있어요."
"거미! 거미다! 가라앉는다! 살려 줘!"
유령 해적들은 거미를 광적으로 무서워했다.
거미는 벌레가 많은 곳에 집을 짓는다.
배에서 벌레가 많다는 말은, 이미 어딘가 썩어들어가는 곳이 있다는 뜻이다.
그게 식량이든, 목재든.
그리고 마침내 배가 가라앉는 순간, 거미는 본능에 의해 집을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고 한다.
그래. 배가 가라앉기 직전에 벽과 갑판을 가득 메운 거미떼를 본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유령선의 선원들처럼 행동하리라.
"저기..."
"끝이다! 죽음이 도래한 거야!"
도미닉 경이 해적들에게 말을 걸어 봤으나 PTSD에 빠진 선원들에게 닿지 못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 실수한 것 같구나."
도미닉 경은 마치 종말이 도래한 듯 비명을 지르며 도망다니는 해적들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게 말이오. 이런 하자가 있는 물건을 팔다니, 돌아가면 바로 항의해야겠소."
"에?"
앨리스는 저음에 예의 바르지만 끈적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다.
거미전차의 난간에 기대있던 앨리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기엔, 엄청난 크기의 소라게가 도미닉 경과 앨리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
앨리스는 머리만 해도 거미전차와 비슷한 소라게를 보며 멍하게 서 있다가 숨을 들이쉬었다.
"스승님!"
엄청난 비명과 함께 앨리스는 도미닉 경을 향해 뛰쳐나갔다.
도미닉 경도 이미 이 거대한 소라게를 보았기에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지만, 소라게의 크기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 경계할 건 없소. 나도 면허를 보러 온... 생명체요."
소라게는 해적선의 옆면을 뒤져 따개비와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장식된 낡은 탑 햇을 꺼냈다.
그리고 눈과 눈 사이, 그러니까 머리로 추정되는 자리에 그 모자를 올린 소라게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반갑소.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해적선의 주인인 '미스터 허밋'이라고 하오."
소라게가 머리에 쓴 거대한 탑 햇을 집게발로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스승님! 소라게예요! 엄청 큰 소라게!"
"그렇구나. 반갑소.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이럴 수가."
도미닉 경은 해적선을 등껍질 삼아 튀어나온 소라게의 인사에 마주 인사했다.
소라게는 도미닉 경의 말에 깜짝 놀랐다. 꽤 유명한 사람이지 않은가. 최근 도미닉 경에 대한 이슈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도미닉 경? 내가 아는 그 도미닉 경이오?"
거대한 소라게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나를 아시오?"
"알다마다. 언찬트 때부터 팬이었다오. 당신 카드를 얻으려고 별장을 다섯 채나 처분해야 했지. 후회는 없소. 그만한 가치가 있거든."
이 거대한 소라게는 도미닉 경의 열렬한 팬 중 하나였으며, 그의 카드를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별장을 다섯 채...?"
도미닉 경은 여기서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감히 그의 금전 감각으로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이 소라게의 입에서 튀어나온 탓이었다.
페럴란트 기준으로도 별장은 돈 많은 이들의 유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의 말에 의하면, 풍경 좋은 곳에 지어진 별장은 성 하나를 십 년 동안 유지하고도 남을 정도의 비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거대한 소라게는 적어도 성 하나를 오십 년, 즉 웬만한 병사 하나가 입대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자기 카드를 위해 쓴 것이다.
"희귀한 만큼, 가치는 높아지는 법이오."
거대한 소라게가 씨익 웃었다.
자신은 그나마 적게 쓴 덕분에 다른 이들을 놀리는 포지션에 있다고 말하면 기겁하겠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도미닉 경의 카드를 뽑기 위해 제국의 일 년 예산을 쓴 이들도 있었고, 작은 차원계를 살 정도의 돈을 박은 이들도 있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카드가, 그렇게나 비싸게 팔렸다고? 도대체 왜?
페럴란트에서부터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그로서는 이런 대우가 썩 낯설었다.
그 누가 농노 징집병 출신의 기사에게 이토록 관심을 주겠는가.
도미닉 경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기 카드를 겨우 열 장 밖에 찍지 않았었지만, 지금 반응을 봐선 더 찍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면허를 따려는 것을 보니, 라이더로 전직이라도 하려는 거요?"
"라이더?"
"아닌가? 아. 그렇군. 이번 시험은 단일 전직이 아니었지. 실례했소."
소라게는 도미닉 경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단어를 내뱉었고, 도미닉 경은 그 단어를 날름 주워 삼켰다.
마침내 호기심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도미닉 경이 소라게에게 되물으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누군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저"
그렇다. 유령 선장이 중간에 끼어든 것이다.
"그, 저 거미... 그러니까 금속으로 된 거미 말입니다. 좀 치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러다간 저희가 늦을지도..."
유령 선장은 그나마 선원들 보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거미 전차의 두려움을 덜어내고 도미닉 경에게 말을 걸 수 있었겠지.
그러나 이 상황을 바라보던 소라게가 버럭 화를 냈다.
"어차피 열 닷새 달려왔으니 열 닷새 더 늦는다고 큰일이 나진 않네."
"그래도 이렇게 바람이 좋은 날이 드문지라..."
"그러게 누가 조타수와 항해사를 상어밥으로 만들라고 했나!"
소라게의 일침에 선장의 목이 거북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사실, 이 유령선은 이렇게 느린 배가 아니었다.
실제로 속도 스탯을 보면 탈 것 중에서도 굉장히 빠른 편이었으며, 내구도가 낮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름 밸런스가 잘 맞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달팽이 기어가듯 느린 상황이 되었는가?
그건 바로 소라게 때문이었다.
이 커다란 소라게는 웬만한 차원계에서 신령으로 불릴 만큼 똑똑하고 지혜로웠으며, 그 지능과 지혜만큼이나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것이 당연지사.
이른바 과적재 상태에 빠진 유령선의 이동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안 그래도 느린 상황에서 조타수와 항해사가 없으니 더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아. 정말 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소. 대안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소라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나 크게 내쉬었는지 소라게 바로 아래의 언덕 하나가 한숨 한 번에 평지가 되었다.
도미닉 경은 이 소라게가 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건 알았으나 차마 도울 방도가 없어 그저 눈을 굴리고 있었다.
"그, 혹시 그냥 허밋 아저씨가 이 배를 메고 가면 되지 않아요?"
그때였다.
앨리스가 소라게에게 제안 했다.
"저희 엄마도 맞는 게 없어서 손에 들고 다니시는데도 빨라져요. 그러면 안 돼요?"
나름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 그러나 소라게에게는 차마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식이었다.
"그런"
왜 자신이 상식에 매여 있었는가? 가차랜드에서 상식은 쓸모가 없는데!
깨달음을 얻은 소라게가 자기 몸이 끼여 있는 유령선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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