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6화]벤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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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것 튜토리얼이 완료되었습니다.]
[탈 것에 타면 보이지 않는 스탯인 크기, 돌파력, 공격과 방어 타입의 변화 등이 있다는 사실을 늘 유의하세요.]
"세상에! 엄청나요!"
앨리스가 빨갛게 상기된 볼을 매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튜토리얼은 그저 간단한 조작과 지형 적응, 그리고 내구도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운용 차이 정도만 알려 줬으나 도미닉 경은 그 정도로도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행복함이 피어올랐다.
"이 맛에 기사들이 말을 타는 모양이구나."
"도미닉 경은 말을 타본 적이 없어요?"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척박한 페럴란트에서는 말이 굉장히 귀했고, 귀족 자제 출신의 기사들이 체면치레 용으로 사서 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농노 출신 징집병이었던 기사가 사기엔 말은 굉장히 비싸고 유지하기 힘든 생물이었으니까.
글쎄. 어느 순간부터, 도미닉 경의 마음에 탈 것에 대한 열등감과 부러움이 샘솟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미전차를 운전하며 느낀 감정은 감히 말을 탄 기사들은 느끼지 못할 새로운 감각이리라.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귀족들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군. 도미닉 경이 씨익 웃었다.
"연습이 끝나셨나보네요."
도미닉 경이 멈춰 서자 떠다니는 나룻배를 탄 직원이 오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거미전차 운전석과 나룻배의 높이 차이가 제법 있었기에 나룻배에 매여 있던 오리가 날아올라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정도였소."
도미닉 경은 운전석 안전 난간 너머로 보이는 직원을 향해 잇몸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탈 것을 처음 타시나 보네요. 그런 분들이 보통 여기서 그런 표정을 지으시던데. 하지만 아시죠? 아직 면허 딴 건 아니에요. 가끔 이 상태로 뛰쳐나가 탈 것을 타려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래요."
그런 분들 때문에 면허가 생긴 거기도 하지만요. 라고 직원이 펜으로 자기 옆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다음 탈 것에 대한 연습하실래요, 아니면 이번 탈 것 실전으로 넘어가실래요?"
도미닉 경은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것도 좋지만 지금, 이 감각을 이어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시험을 보겠소."
"좋아요."
직원은 언젠가부터 손에 있었던 서류철을 들어 무언가를 끄적였다.
몇 가지 사항을 적은 직원이 고개를 들어 도미닉 경에게 미소 지었다.
"마침 5분 뒤에 시험이 있어요. 바로 넣어드려요?"
"부탁하오."
도미닉 경의 말을 들은 직원의 나룻배가 멀어졌다.
그리고 허공에 무언가를 조작하더니, 이내 용이나 신화 속 괴수들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큰 포탈이 나타났다.
"이 포탈 너머로 가시면 시험장이에요. 아마 가시자마자 바로 시험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 단단히 드시구요"
"당장 가요, 스승님!"
앨리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방방 뛰며 도미닉 경을 재촉했다.
도미닉 경도 마찬가지였기에 조종간을 잡고 거미전차를 전진시켰다.
엔진의 굉음이 굉장히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처럼 들렸다.
"여긴...?"
도미닉 경은 포탈을 타자마자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재밌게도, 그나마 트랙이 멀쩡했던 연습장과는 달리 여기저기 부서지고 망가진 트랙과 엉망진창인 지면 상황, 그리고 험난한 지형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가 다르네요."
앨리스가 이 암울한 아포칼립스적 트랙을 보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뭐야, 신참인가?"
도미닉 경은 옆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엔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모히칸 머리를 한 불량배가 있었다.
무려 프테라노돈을 타고 말이다.
"보아하니 첫 시험 같은데. 맞지?"
불량배는 왼손에 든 도끼를 들어 자기 모히칸 머리를 다듬으며 씨익 웃었다.
그가 탄 프테라노돈도 까악 거리며 불량배의 말을 거들었다.
"굉장한 머리네요..."
앨리스는 거의 불량배의 키만큼이나 큰 모히칸 머리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미닉 경은 이 면허 시험의 베테랑처럼 보이는 이를 바라보며 정보를 얻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소. 처음이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당신은 여러 번 이 시험을 본 거요?"
"그렇지."
불량배는 머리를 다듬던 도끼날에 혀를 가져다 대려다 문득 날이 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가죽 재킷의 주머니에서 숫돌을 꺼내 도끼날을 갈기 시작했다.
"스피드를 위해 이것저것 했더니 말이야. 취소도 당해 보고, 새로운 종류의 탈 것도 구해 보고 하다 보니 벌써 30번째 시험이지."
불량배는 낄낄대며 이제 온전히 갈린 날을 혀로 핥았다.
쇠맛이 나겠군.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시험에 대해 잘 알겠구려. 초보를 위해 무언가 조언해 줄 생각은 없소?"
"하. 뉴비는 언제나 존중받아야 마땅하지."
모히칸의 불량배가 사악하게 웃었다.
"우선 실격패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 내구도가 다 닳거나, 탈 것에서 떨어지면 바로 실격이야. 적극적으로 공격 운전을 하는 것이 좋아. 애초에 이 시험은 전장에서 움직일 것을 전제로 시험을 보니까."
프테라노돈 위에서 낄낄 웃은 모히칸의 불량배는 다시 비열하게 말했다.
"결승 지점까지만 가면 바로 시험 합격이지만, 명심해. 저번 시험에서 합격자는 고작 2명이었다는 걸."
아. 이제 곧 시작이군. 행운을 빌지. 라는 말을 끝으로 프테라노돈을 탄 불량배는 출발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스승님."
"그렇구나."
앨리스는 친절한 듯 비열한 듯 도와준 모히칸의 불량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미닉 경은 전에도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던 것을 기억했지만 굳이 앨리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저런 식의 시민들도 많은 모양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운전 면허 시험까지 1분 남았습니다. 모두 시작 지점으로 모이세요.]
시스템이 시작 직전을 알리는 메시지를 띄웠다.
도미닉 경은 거미전차를 움직여 시작 지점으로 향했다.
시작 지점엔 수십 명의 탈 것을 탄 이들이 각자의 탈 것을 뽐내고 있었는데,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서로의 탈 것을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도미닉 경도 주변에 있는 탈 것들을 바라보았다.
랩터를 탄 이, 사이버 펑크 스러운 호버 바이크를 탄 이, 이족보행 로봇에 탄 이, 자기 형의 등 위에 탄 이...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으나, 도미닉 경은 자신이 탄 거미전차가 시험장 지상에 있는 탈 것 중 가장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렇게 크다니. 느리지만 확실하게 하겠다는 건가?"
"내 바이크는 내구가 약하니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는 것이 좋겠어..."
주변에서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최대한 도미닉 경이 탄 거미전차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경계어린 시선도 오래가지 않았다.
곧 시스템이 알림을 보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운전 면허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결승지점을 표시합니다. 부디, '안전히' 면허를 따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동시에 출발지점에 세워진 신호등이 빨간불, 노란불, 초록 불로 바뀌며 출발 신호음을 내뱉었다.
그 신호음을 시작으로 모든 탈 것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스승님! 우리도 빨리 움직여요!"
앨리스가 재촉하며 발로 거미전차의 바닥을 탕탕 굴렀다.
연습장에서 했던 운전도 그렇게나 재밌었는데, 이렇게 험난한 길에선 얼마나 재밌을까!
아이다운 천진난만한 행복함에 물든 앨리스는 위험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 가보"
도미닉 경은 엔진의 회전수를 올리며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문득, 시험장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할 정도로 어두워진 시험장의 모습에 급하게 말을 끊고 상황을 파악하던 도미닉 경은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각양각색의 고룡들로 구성된 편대와 우주 전함 함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
"으. 진짜 왜 대형 면허를 따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다니까."
딕 스테이시는 아버지가 선물로 준 우주 전함에 탄 채 달콤한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이번 성급 심사에서 단일 진급이 폐지될지도 모른다더구나. 이런저런 걸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라며 사준 이 우주 전함 '아포칼립틱 아포크리파 MK.III'는 나름 최신예 기종이었기에 딕 스테이시는 그 부분에 불만은 없었으나, 정작 불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의 특성을 살린 듯 전 지역에 걸쳐 방송할 수 있는 거대한 스피커들이 가득 달린 이 우주 전함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으니, 바로...
"어째서! 핑크색 리본을 단 거냐고!"
그렇다. 아래서 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나, 위에서 보면 이 우주 전함이 여아용 선물이라는 걸 그대로 드러내듯 선명한 핑크색의 리본이 달려 있었다.
전장의 장교인 딕 트레이시로서는 절대 마음에 들지 않는 장식이었다.
그렇다고 저 장식을 떼자니 아버지가 준 선물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호의로 받은 선물을 마음대로 개조해 버리면, 아버지가 얼마나 그걸 가지고 우려먹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아... 일단 시험에나 집중하자. 이 일은 나중에. 전 승무원, 진수."
딕 트레이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전함을 전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핵융합 추진체가 달아오르며 그녀가 탄 우주 전함이 천천히 결승점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래, 도미닉 경이 거미전차를 탄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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