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95화 (95/528)

〈 95화 〉 [94화]면허

* * *

"그러니까, 이게 버그가 아니라는 말이오?"

행정부 산하 민원 소통 창구, 이른바 고객 센터를 찾은 도미닉 경은 시큰둥하게 앉아 있는 직원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자주 찾는 질문란을 찾아보세요. 저도 위에서 버그가 아니라는 말만 들어서. 다음 손님!"

행정부 직원은 의문이 가득해 보이는 도미닉 경의 표정을 보고 일이 귀찮아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괜히 귀찮아지기 싫은 직원은 도미닉 경을 무시하며 다음 손님을 불렀다.

직원의 예상대로 도미닉 경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바로 뒤에 선 다음 손님이 눈치를 주는 바람에 아무 소득 없이 자리를 떠났다.

"버그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까요?"

도미닉 경이 민원을 제기하는 사이 손님 대기용 의자에 앉아 솜사탕을 뜯어먹던 앨리스가 말했다.

"글쎄. 일단 자주 찾는 질문란을 찾아보는 것이 우선이겠지."

도미닉 경은 그래도 유용할 만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벽에 큰 글씨로 '자주 찾는 질문들'이 적힌 곳이 있었기에 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벽엔 수십 명의 사람이 수십 권의 책을 뒤적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구도자들이 책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모습같기도, 혹은 어느 귀족과 척을 진 귀족이 약점을 찾으려 눈에 불을 켠 모습같기도 했다.

도미닉 경이 벽에 다가가자 도미닉 경의 앞에도 책이 한 권 날아와 저절로 펼쳐졌다.

마법과도 같은 이런 효과는, 가차랜드에서 당연한 것이다.

도미닉 경도 이제 가차랜드에서 어느 정도 적응한 시민. 이젠 이런 것 정도로는 놀라지 않았다.

"보자... 목차가..."

도미닉 경은 목차부터 살폈다.

시민에 대한 것. 파티에 대한 것. 클랜에 대한 것. 사랑에 대한 것. 세상의 진리에 대한 것. 그리고 장비에 대한 것.

도미닉 경의 시선이 장비에 대한 것에서 멈췄다. 아마 여기서 자기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미닉 경은 '장비에 대한 것' 아래에 있는 작은 목록들을 훑었다.

개인 장비. 탑승 장비. 장신구. 연인 장비.

또다시 수많은 목록을 지나쳤으나 도미닉 경이 원하는 목차는 없는 듯싶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남은 '예외 사항'과 '희귀 판례'에 있을지도.

도미닉 경은 목차에 적힌 대로 책을 펼쳤다.

그리고 한참 동안 사항과 판례를 읽고 나서야 도미닉 경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희귀 판례 #177]

[인간이 장신구 슬롯에 장착되는 일은 버그가 아니라 정령 장비나 에고 웨폰과 비슷한 일종의 기믹입니다. 뜻밖에 이 기믹은 가차랜드 초창기부터 대놓고 있던 기믹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 그 사람에게 종속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며, 이를 계약으로 남겨 이행할 때 이 기믹이 발동됩니다. 이때, 장신구가 된 사람은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에테리얼 상태로 전환됩니다.]

[이때, 장착된 사람은 계약에 명시된 기간 동안 해제할 수 없는 귀속 상태를 유지합니다. 만일 장착된 사람이 더 이상 장신구로서의 삶을 이행하고 싶지 않다고 원할 때, 상호 합의 하에 귀속 상태를 없앨 수 있습니다.]

[장신구 상태가 된 사람의 옵션은 원래 모습의 능력치가 반영됩니다.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을 서포트 할 수 있습니다.]

도미닉 경은 책을 닫았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거의 모았다고 여긴 것이다.

"뭐래요?"

앨리스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아직 아이다운 호기심을 참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버그는 아니라는구나. 일종의 계약인 듯한데..."

어느 현자가 말하길, 진정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머리로 이해하기만 한 지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던가.

도미닉 경은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설명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앨리스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계약이라는 말만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그가 아니라면 괜찮아요. 도미닉 경을 도울 수 있다면 어떤 상태라도 좋은걸요!"

"그, 죄송한데 말이죠. 다 쓰셨으면 자리 좀..."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도미닉 경과 앨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도수가 높은 안경을 낀 작은 키의 학자가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던지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하오. 지금 당장 비켜드리리다."

도미닉 경은 앨리스를 데리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그 길로 행정부 민원 센터를 나와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그, 스승님. 그러고 보니 창고에 있던 걸 말이에요­"

앨리스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면허 따실 거예요? 아니면 그냥 그대로 두실 거예요?"

앨리스의 의문은 극히 개인적이고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자 앨리스는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직 논리가 완성되지 않은 앨리스였기에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 흐르다가 마침내 탈 것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도미닉 경은 이 상황에 맞지 않는 엉뚱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앨리스의 말은 나름 중요해 보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가차랜드 내를 걸어만 다닐 생각인가.

기사라면 무릇, 무언가에 탄 모습이 가장 멋있지 않겠는가.

그건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꼭 기사가 아니라도 말이다.

사실, 도미닉 경도 앨리스와 다를 바 없는 생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가차랜드로 오면서 나름 상식이 생기긴 했으나, 원래 그는 전쟁 밖에 모르던 사람이지 않은가.

가끔은 이런 아이 같은 모습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면허를 따러 가자."

"네?"

도미닉 경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낸 도미닉 경이 가장 가까운 면허 시험장을 검색했다.

시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모른 채, 그저 무작정 전진하는 도미닉 경.

그는 행동하는 것이 더 편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

행정부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면허 시험장.

로비 안 호숫가에서 세 마리의 오리가 끄는 나룻배에 탄 직원이 뭍에 있는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어... 그러니까 시험을 보고 싶으시단 거죠?"

"그렇소."

도미닉 경은 시험장 로비에 있는 직원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오리가 꽥하고 울었다. 직원은 이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찾아온 도미닉 경이 진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눈앞에 손님이 있으니 설명은 해야 하는 법. 직원은 고개를 돌리고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 다음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일단 지상과 지하, 수면과 수중, 그리고 하늘과 이면세계 면허 중 하나를 고르셔야 해요."

"그리고 또 대형인지 중형인지 소형인지도 골라야하구요."

"그런 다음에 자동인지 수동인지, 아니면 자율주행인지도 확인해야 해요."

면허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도미닉 경은 이 자물쇠를 푸는 암호 같은 말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직원은 도미닉 경의 모습에 이해하기까지 한참 걸릴 것이라고 판단하며 사무적으로 종이 하나를 건넸다.

"일단 서류부터 작성하죠. 이름이?"

"스승님은 도미닉 경이에요!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을 모른단 말이에요?"

앨리스가 갑자기 나섰다.

종자의 임무 중 하나는 스승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도 있었고 앨리스는 그 임무를 기억한 것뿐이지만, 사실 지금 상황에선 역효과였다.

진상이 틀림없군. 하고 인상을 찌푸린 직원은 그래도 손님이다. 손님은 왕이다를 중얼거리며 종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름은 여기에 적으시고, 아래 간단한 인적 사항만 적으세요. 그럼 끝... 아. 하늘길 시험보실 건 아니죠? 그건 추가적인 서류랑 시험이 있거든요."

사실 도미닉 경은 스팀펑크 풍 비행선도 가지고 있었기에 조금 고민이었다.

그러나 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기로에선 하는 것이 덜 후회되는 법.

도미닉 경은 내친김에 하늘길 시험도 보기로 마음먹었다.

전혀 시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것도 보겠소. 날아다니는 탈 것이 있소."

무모한 도미닉 경은 서류 하나를 모두 체크한 뒤 새로운 서류를 하나 받아 작성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이 모든 항목을 작성하자, 오리 하나가 다가와 도미닉 경에게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 쓰셨으면 오리에게 제출하세요."

도미닉 경은 오리에게 두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넓은 부리로 그 서류를 받아 든 오리가 호수를 건너 직원에게 서류를 건넸다.

서류를 받아 든 직원은 크게 한숨을 내쉬듯 숨을 뱉고는 서류를 꼼꼼히 살폈다.

그다지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어 보였다.

"하나는 거미전차고, 하나는 비행선이네요. 둘 다 이번에 신상이 나왔다던데, 아마 그거 사셨나보다."

직원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사실 탈 것의 매력에 푹 빠져 면허 시험장에서 일하는 이 직원은 도미닉 경이 낭만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가차랜드의 사람들이 탈 것을 고를 때 보는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특수능력, 기동성, 가성비.

특수능력을 보는 이들은 보통 탈 것과 같이 싸울 수 있는 스킬들을 가지고 있는 부류였다.

기동성을 보는 이들은 말 그대로 빠른 이동을 위해 탈 것을 구매하는 이들이었고, 가성비를 찾는 이들은 가차랜드에서 성능충이라고 불리는 미치광이들.

그러나 도미닉 경의 탈 것들은 세 가지 요소와 반대되는 개념의 탈 것이었다.

평범하고, 느리고, 가성비가 나쁜 것.

하지만 너무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멋이 있는 것.

직원은 도미닉 경을 슬쩍 바라보았다.

탈 것의 멋을 추구하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직원의 지론이었고, 그 지론에 의해 도미닉 경은 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일단 거미전차 시험부터 봅시다. 타세요."

직원이 나룻배를 더욱 뭍에 가까이 대어 도미닉 경과 앨리스를 태웠다.

한층 나긋나긋해진 직원이 오리들과 연결된 끈을 살짝 당기자, 오리들이 안개가 가득 낀 호수를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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