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93화]오해
* * *
쿠노이치 히메는 도미닉 경의 옆에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얼음으로 짠 비단 같은 머릿결.
투명하다못해 비칠 것 같은 피부.
홍조 띤 앳된 얼굴.
중세 기사들이 입을 법한 갑옷 너머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중량감.
"저, 도미닉 경? 이 여성분은...?"
히메는 도미닉 경의 옆에 딱 달라붙듯이 선 여성을 가리키며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도미닉 경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얼굴이 너무 어려 보이긴 했으나 키는 도미닉 경 보다 큰 여성이 말했다.
"앨리스는 스승님의 것이에요!"
앨리스가 말하고자 한 뜻은 자신이 도미닉 경의 종자가 되었으며, 버그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미닉 경의 귀속 장비로 취급되어 떨어질 수 없다는 뜻이었으나 히메는 그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도미닉 경의... 여자?"
세상에. 사실 지금까지 히메는 도미닉 경이 혼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는 히메의 상상이었을 뿐, 도미닉 경에게 여자가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었다.
또 나 혼자 망상하다가 실수한 건가.
히메는 허탈할 정도로 짧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 아이는 내 종자인데, 종자를 들이면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신고를 하러 가고 있었소."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말을 듣고 황급하게 부연 설명했다.
앨리스는 아직 어렸기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고, 그 말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오해하기 시작한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에 더 큰 오해에 빠지고 말았다.
뭐? 종자? 씨앗?
문제가 생겨?
신고? 무슨 신고?
찰나의 순간 동안 수천 가지의 생각이 히메의 뇌리를 스쳤다가 나뉘고 다시 합쳐지자, 히메는 마침내 정답에 도달했다.
혼전 임신해서 혼인 신고를 하러 가는 거구나!
완벽한 오해!
동방풍의 세계관 사람인 히메는 서양의 종자에 대해서 잘 몰랐기에 먼저 씨앗에 대해 생각해 버렸던 것이 첫 번째 오판.
그리고 시스템적인 문제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로 알아들은 것이 두 번째 오판.
그리고 버그 리포트, 즉 신고를 다른 신고로 생각해 버린 것이 세 번째 오판.
오답에 오답이 겹쳐 나온 오답은 정답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버린 것이다.
또한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 중 하나는 히메가 앨리스를 보고 성인 여성이라고 오해한 것도 있었다.
자세히 본다면 앨리스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이미 머릿속이 혼란한 히메는 앨리스의 키와 그녀가 입은 사슬갑옷과 뱃지들이 일으킨 착시가 일으킨 환장의 콜라보에 그대로 속아넘어간 것이다.
앨리스의 유아적인 체형은 사슬갑옷이 가려주고, 튜닉 아래 가득한 뱃지들이 볼록 튀어나와 마치 몸매 좋은 여성처럼 보이는 착시.
도미닉 경보다 살짝 큰 키로 인해 조금 더 강인해 보이는 신체.
냉정하고 도도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동안에 맑고 큰 눈을 가져 따뜻한 반전이 있을 것 같은 미녀.
모든 것은 히메의 착시와 착각으로 이루어졌으나 히메는 이미 자신이 만든 환술에 속아넘어가 버렸다.
"...옆에 여자가 있었네요."
"그, 엉뚱하지만 좋은 아이요. 아마도."
히메의 마음이 쓰려왔다.
아이라니. 이미 애칭까지 있었단 말인가?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애칭이긴 했으나 도미닉 경의 성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히메는 도미닉 경이라면 충분히 그런 칭호로 부를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히메는 계속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봐서 그런지 차마 목 너머로 마음속의 외침이 튀어 나가지 못했다.
눈앞의 두 기사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다.
뜨거운 무언가가 튀어나오려다가 목구멍에서 막혀 가시가 박힌 듯, 목이 메여 숨이 막힌 듯 아프다.
어째서일까.
히메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말할 걸 그랬네요."
마침내 고르고 골라 히메의 입에서 하나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 문장은 처음에 말하고자 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히메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그저 도미닉 경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향했는지 확인했는데. 이렇게 아련해지는 기분은 무엇일까?
사실, 이 감정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었다.
쪽팔림.
그것도 한껏 오해했다가 그 오해가 밝혀질 때 훅 들어오는 쪽팔림.
그러나 이미 이 감정이 사랑이라고 세뇌당한 히메는 도미닉 경을 향한 이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이 짝사랑에 대한 여운이라고 생각했다.
"빨리 말한다니, 무슨 말이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런 히메의 심리상태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
히메가 내뱉은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전장에서 살아온 도미닉 경은, 싸우는 것 외에는 모두 서툰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에요."
히메는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차마 도미닉 경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쪽팔려서 나는 눈물이었으나, 히메는 슬퍼서 나오는 것이라 착각했다.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뒤돌아선 히메는 도미닉 경 몰래 눈가를 닦아내고 도미닉 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보면... 친구라도 될 수 있을까요?"
도미닉 경에 대한 연심은 끝났지만, 아직 도미닉 경에 대한 관심은 남아 있던 히메가 제안했다.
도미닉 경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하나 남은 눈을 끔벅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우린 친구요."
히메는 그 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가 터져 나오며 히메를 감쌌다.
바람이 불어 연기가 흩어졌을 때, 히메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스승님! 저기 솜사탕이 있어요!"
"아. 그래. 이번 주 주급은 줘야지."
그러나 히메는 실수했다.
이렇게 급하게 돌아서지 않고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래서 앨리스가 외친 소리를 들었더라면 그녀의 오해가 어느 정도 풀렸으리라.
스승님이란 호칭을 통해 그녀의 논리에 금이 가고 나면, 적어도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진실을 알고 나면, 자신이 한 오해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그녀는 또 한 번의 찬스가 있었을지도 몰랐을 텐데.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앨리스는 천진난만하게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솜사탕을 받을 권리를 행사했고, 도미닉 경은 그 권리를 충실히 이행해 줄 뿐이었다.
...
히메사이고 성.
그 깊숙한 비밀 수련장에 한 쿠노이치가 서 있었다.
무언가를 잊으려는 듯 쉴 새 없이 쿠나이를 던지고 사슬낫을 휘두르는 이 쿠노이치는 지치지도 않는지 그저 수련에 깊게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나 체력은 무한하지 않은 법. 그런 체력은 치트나 파괴 불가능한 오브젝트에서나 볼 수 있는 법이다.
"아."
그녀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그녀가 던진 쿠나이 하나가 과녁을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하아."
그제야 움직임을 멈춘 쿠노이치.
과도한 훈련으로 거칠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이미 쿠나이가 빼곡히 박힌 과녁을 바라보던 쿠노이치는 문득 저 멀리 빗나간 쿠나이를 바라보았다.
사실, 저 쿠나이는 지쳐서 빗나간 것이 아니다.
그녀는 차기 당주로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쿠노이치.
아무리 지쳐도 그녀의 공격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는 이런 실수를 행했는가?
이는 명경지수와 같던 그녀의 마음에 돌 하나가 날아와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 쿠노이치는 바로 히메.
그녀는 도미닉 경과 헤어진 이후 바로 히메사이고 성으로 돌아와 수련장을 찾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잊으려는 듯, 잊고 싶다는 듯 몸을 움직여 수련하기 시작했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는 데에는 육체의 고단함이 최고라는 사실은 지난 훈련들의 경험과 고서의 지식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처음엔 과녁의 가장자리를 맞췄다. 심지어 날아가는 방향도 제각각.
그러나 점점 훈련이 진행되고, 자신을 한계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면서 히메의 쿠나이 투척 정확도가 극명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진 거의 한 점에 피어난 꽃처럼 박혀 있던 쿠나이들.
그러나 마지막에 '훈련을 더 지속하기 힘들겠다'라는 생각의 틈이 생기자마자 잠시 막아두었던 생각과 감정들이 물밀듯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된 훈련으로 막아두었던 감정은 둑에 난 구멍처럼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히메를 삼켜 버리고 말았다.
저 멀리 빗나간 쿠나이를 바라본 히메는 천천히 그 쿠나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있던 쿠나이를 집어 들었다.
문득, 히메는 이 쿠나이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잘해 오다가, 마지막에 빗나가 버린 쿠나이처럼, 자신도 빗겨나가 버린 것일까.
쿠나이를 손에 쥔 히메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을 향한 자기 마음은 정말 사랑이었을까?
내가 가진 이 감정은 정말 짝사랑의 감정이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히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히메의 발아래 다져진 흙에 물방울이 하나둘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국은, 그대로 주저앉은 히메 아래에 깔려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렇게나 마음이 아픈 이유는.
히메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죽여 어깨를 들썩였다.
빗나갔던 쿠나이를 손에 꽉 쥔 채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