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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92화 (92/528)

〈 92화 〉 [91화]면접

* * *

"계세요? 어쩌지. 내가 너무 무작정 찾아왔나?"

소녀의 목소리를 한 누군가가 문밖에서 노크를 계속했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전개된 상황에 당황했으나, 곧 이성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앞에 선 도미닉 경은 크게 한 번 호흡하고 문을 열었다.

"똑똑. 계세­ 어! 계셨구나!"

문밖에서 노크를 하던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미닉 경은 소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색과 연한 푸른색이 층을 이루어 마치 얼음과 같은, 양갈래로 땋은 긴 머리.

하얗다 못해 얼음장처럼 투명한 피부.

동글동글 커다랗지 않았으면 보는 이들을 얼음으로 만들었을 파랗다 못해 시린 눈동자.

아직 어린 소녀의 티를 벗지 못했지만 벌써 남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소녀의 아름다움에 말문이 막힌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어린 소녀의 모습이 맞았으나...

그 키가 도미닉 경보다 머리 하나는 컸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편지를 보낸 앨리스예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종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소녀는, 선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

"그래서."

도미닉 경은 거실 소파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거리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앉은 키임에도 도미닉 경의 어깨까지 오는 큰 키의 마른 소녀는 자기 몸보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왔는데, 종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사실이었던지 그 가방 안에는 랜스와 도끼, 양손 검과 망치 같은 것이 가득했다.

철 지난 기사들이 입을 법한 튜닉과 사슬갑옷을 걸친 앨리스는 코코아가 마음에 들었는지 코를 훌쩍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종자가 되고자 무작정 여기까지 찾아왔다 그 말이오?"

"네!"

도미닉 경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편지에 적힌대로라면 아직 15살일 이 어린 소녀는 비록 도미닉 경보다 키가 컸을지언정 아직 어린아이였다.

페럴란트였다면 그녀의 만용을 용기라고 말하며 종자로 들였겠지만, 여긴 가차랜드였다.

"그,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말리지는 않았소?"

"부모님께선 드디어 제가 영웅담을 써 내려갈 거라며 좋아하셨어요! 늘 제가 기사가 되길 바랬거든요!"

전기 기사나 통신 기사같은 거 말이에요. 라며 앨리스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 어린 소녀와 그녀의 부모님들은 머리가 조금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아니지. 기사도에 반하는 말을 한 자신을 탓하며 도미닉 경은 말을 이어갔다.

"도대체 어떤 가문이길래 그리 기사가 되고 싶은 것이오?"

"아, 그러네요. 이거 면접이죠! 알아요! 저 TV프로그램에서 봤어요!"

꺄르르 웃은 이 소녀는 있는 말 없는 말을 모조리 꺼내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선 북방의 기사시고, 어머니는 서리 거인이세요. 아버지가 어머니 집에 와이파이 깔러 갔다가 한눈에 반해 청혼하셨대요.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절 낳으셨지만, 거인은 장생종이라 오래 산대요! 무엇보다 가차랜드에선 가치가 곧 수명이니까 두 분 다 백 년해로하세요!"

두서없는 말에서 그나마 괜찮은 정보를 확인한 도미닉 경이 생각에 잠겼다.

서리 거인. 거인.

도미닉 경도 거인과 싸운 적이 있었다.

얼마나 격렬한 전투였던지 같이 싸웠던 기사 하나는 심리적 불안감에 빠져 풍차만 보면 거인이라며 돌격을 외쳐 댔다.

학자들이 알아낸 거인의 수명은 대략 300년.

15살이면 사실상 페럴란트 출신 인간 기준으로 겨우 3살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거인의 성인식을 생각하더라도 한참 어린 나이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어린 외모에 큰 키, 그리고 어수룩한 말과 행동이 이해된다.

"15살이면 다른 것들도 하고 싶을 나이인데."

도미닉 경은 이 어린 나이의 거인 소녀가 왜 하필 기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이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해서요."

소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앨리스는 이제 코코아가 절반 정도 남은 머그컵을 매만지며 말했다.

"전 아빠 엄마랑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럼 저도 가치가 있어야 한대요. 그리고 가장 좋은 방법은 탱커가 되는 거래요. 그래서 기사가 되려구요."

아이다운 두서없는 말.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아이 특유의 부모를 향한 엉뚱한 사랑.

"기사가 되려면 종자가 되어야 한대요! 물어보니까 5년 이상 기사 밑에서 일하면 기사가 될 수 있대요. 그래서 종자가 될 거예요!"

장황하게 길어지는 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인의 기준으로 5년이면 아주 짧은 시간이긴 했다.

300년. 페럴란트 기준으로 인간의 5배는 더 살아가는 장생종.

그들에게 있어 5년이란 시각은 인간의 1년. 어느 정도 감내할 만한 시간이었다.

그랬기에 앨리스는 도미닉 경을 무작정 찾았으리라.

앨리스는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마저 마신 후 호. 하고 만족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갑자기 말이 없는 도미닉 경이 내심 신경 쓰였는지,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말했다.

"저 걸 스카우트 수료도 했어요! 보세요! 뱃지도 다 모았다구요! ...사실 중간에 감기에 걸려서 개근훈장은 못 받았지만, 교관 아주머니가 병뚜껑으로 만들어 주신 특별한 훈장도 있어요!"

앨리스는 튜닉을 걷어 사슬갑옷의 가슴 부분을 드러냈다.

그러자 병뚜껑과 플라스틱으로 된 다양한 어린이용 훈장들이 수십 개가 달린 휘장이 나타났다.

"저는 성실하고 착해요! 그리고­"

"그래서, 종자로 있는 동안 얼마를 받고 싶소?"

도미닉 경은 이 어린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도미닉 경은 앨리스가 자신에 대해 어필하는 동안 이미 이 꼬마 아가씨를 종자로 들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종자에도 분류가 있다.

정식으로 종자가 되겠다고 선서를 하고 기사에게 수련을 받는 도제식 종자.

그리고 계약을 통해 종자가 할 일을 대신해주는 계약 종자.

도미닉 경이 생각하는 계약은 후자였다.

정식 종자가 되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돈, 명예, 직업, 가족, 그리고 미래.

온전히 기사 훈련에 매진하겠다는 선서를 해야 했고, 이를 어길 시 페럴란트의 기준으로는 손목을 자르고 황무지로 추방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리고 기사가 내주는 가혹한 훈련을 모두 통과해야 했고, 이때 죽어 나가는 종자도 많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서툰데다가 전투 외에는 문외한이었기에 그런 기사들보다 더 가혹하게 종자를 다룰지도 몰랐다.

그런 잔혹한 삶을 살기엔 아직 이 아가씨는 너무 어리다.

그렇기에 도미닉 경은 계약 종자를 제안했다.

돈을 받으며 종자가 해야 할 일, 즉 갑옷과 무기 그리고 말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하는 것이다.

얼마를 받고 싶냐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소녀가 받아들인 뜻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앨리스는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눈이 더 크고 동그래지더니, 이내 울먹이며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앨리스가 벌떡 일어나 양손을 배꼽 위에 올리고 연신 허리를 숙였다.

큰 키 때문에 천장에 있던 조명이 깨질 뻔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저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

"정말 그 정도로 괜찮겠소?"

"네! 충분해요!"

앨리스는 매달 거인들을 위한 솜사탕 5개를 받는 조건으로 종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폰을 꺼내 거인들을 위한 솜사탕의 가격을 알아본 도미닉 경은 예상보다 싼 가격에 오히려 이 새로운 종자를 부려 먹는 일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될까요?"

도미닉 경보다 키가 크지만 아직 나이도, 경험도 부족한 소녀, 앨리스가 의욕적으로 말했다.

"아! 맞아! 기사님도 탈 것이 있나요? 저 아빠가 세차 잘한다고 칭찬했었어요! 탈 것 관리도 잘할 수 있어요!"

너무 의욕적이라서 문제였지만, 일단 도미닉 경은 의욕을 꺾는 것도 새로운 종자에게 좋지 않은 경험이 될 거로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번에 새롭게 받은 탈 것이 있다. 나도 정리만 하고 아직 타보지 않았으니, 같이 가 보자."

평소의 도미닉 경은 기사의 예법에 따른 말투를 썼으나, 종자는 기사의 아래에 위치한 수직적인 위치였기에 도미닉 경은 다른 기사들이 종자에게 하듯이 말을 놓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기사답다고 느꼈는지,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땋은 양 갈래머리가 흔들리는 동아줄처럼 휘날렸다.

도미닉 경은 창고에 넣어 둔 스팀펑크 풍 거미 전차와 스팀펑크 풍 비행선을 꺼내보았다.

창고의 커다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두 탈 것은 그 위용이 사뭇 대단했다.

"우와... 특이한 탈 것이네요. 전 분명 말이나 코뿔소 같은걸 탈 줄 알았어요."

아니면 공룡이라거나. 앨리스는 반짝반짝 멋진 탈것에 놀라면서도 어린아이다운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라면 말이 아니던가.

백마나 흑마, 하다못해 갈색털에 하얀 발의 말이라도 좋았다.

도미닉 경은 눈앞의 탈 것이 기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여긴 가차랜드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저희 한 번 타봐요! 정말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도미닉 경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소녀가 방방 뛰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으나, 도미닉 경도 사실 이 새로운 탈 것을 타보고 싶기는 했다.

"그럼 한 번 타보자꾸나."

도미닉 경이 먼저 거미전차에 올랐다.

도미닉 경의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높은 체고를 가진 거미 전차에 올라타자 풍경이 새로웠다.

페럴란트에서 말을 타고 달렸던 기사들은 다 이런 느낌이었을까.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움직여봐요!"

앨리스는 이제 완전히 상기된 얼굴로 도미닉 경을 재촉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었기에 마치 붉은 염료를 물에 타듯 발갛게 즐거움이 번져나갔다.

"그래."

도미닉 경은 처음 보는 탈 것을 어떻게 조종해야 할지 몰랐으나 곧 해결책을 찾았다.

매뉴얼이 조종대 옆에 놓여 있었다.

처음 탈 것을 조종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도미닉 경이 매뉴얼을 따라 시동을 걸자, 거친 엔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와! 이제 움직이나 봐요!"

앨리스가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곧 배신당했다.

[이 탈 것은 증기기관 1종 대형 면허가 필요합니다. 운전 면허증을 먼저 따주세요.]

눈치 없는 시스템 창에 의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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