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89화]초차원 카르텔
* * *
["이건... 대체... 말도 안 되는..."]
수화기 너머 도미니카 경의 목소리는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난 필멸자처럼 떨려왔다.
평행세계의 자신과 만난 건 이벤트 때문이었고, 다음 이벤트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기 상사인 큐바스가 말해 준 상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식이 깨져나갔다.
"아무래도 내 가설이 맞았던 모양이오."
도미닉 경은 소파에서 일어나 어질러진 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다치거나 사라진 부분을 복구하려는 성질이 있지. 우리 폰에 각각 핵이 절반씩 들어갔으니, 나머지 절반을 수복하려 할 것이라는 가설이 정답이었소."
그렇다.
슬라임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폰으로 백업되었을 당시, 슬라임의 핵은 이미 절반씩 쪼개진 상태로 각자의 폰에 한 조각씩 들어갔다.
도미닉 경이 중간에 S.P.Y 앱을 켰을 때 슬라임은 자아를 가진 채 움직일 정도로 수복된 상태였다.
그렇다면 도미니카 경의 폰으로 들어간 슬라임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도미닉 경은 슬라임이 화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여전히 핵이 절반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핵이 깨지면 슬라임의 생명력이 점점 빠져나간다.
이는 상식에 가까운 지식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폰 안에 존재하는 이 슬라임은 핵이 깨졌음에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말은, 도미니카 경의 폰에 있는 핵과 자기 폰에 있는 핵이 모종의 이유로 하나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슬라임은 이미 차원의 균열 사이에서도 살아남은 존재.
도미닉 경은 이를 조합하면 평행세계라도 연락이 닿을 수 있다고 여겼다.
전문가가 본다면 엉성하고 엉망이며 엉터리라고 말할 논리.
그러나 하늘이 도미닉 경을 도와주는 것일까?
도미닉 경의 가설은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네. 슬라임의 존재를 잊고 있었어. 꽤 귀여운 녀석이네."]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S.P.Y앱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저 전투만 아는 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카로운 면도 있고 말이야. 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반했겠어."]
수화기 너머로 도미니카 경이 배시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 엄청난 일탈행위로 뭘 할 생각이지, 써 도미닉?"]
도미니카 경은 지금 꽤 흥분한 상태였다.
도미니카 경이 우연찮게 한 행동을 변수로 만든 도미닉 경이라면, 분명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놀라운 모험으로 자신을 이끄리라.
그러나 그 기대는 30초 만에 깨졌다.
"뭐, 가끔 생각나면 전화하시오. 그저 먼 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보단, 지금처럼 서로 안부라도 묻는 게 더 좋지 않겠소?"
도미닉 경은 아무 생각 없었다.
그저 자기 사람에게 안부나 전하는 것이 그의 소소한 행복이었던 탓이다.
애초에 그는 가족도 잃고, 동료라고 할 인물도 없었다.
그만큼 도미니카 경의 존재와 그녀와의 인연은 자기 자기 가치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물론, 도미니카 경도 도미닉 경이었지만.
["...난 뭔가 이 가차랜드를 집어삼킬 거대한 계획이 있거나 할 줄 알았는데."]
도미니카 경이 직접 도미닉 경에게 불만을 토했다.
"그럴 리가."
도미닉 경이 말했다.
"기사는 혼란을 부추키는 존재가 아니라, 혼란을 잠재우는 존재요.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지."
["몇 번째?"]
"여섯 번째."
도미닉 경은 여섯 번째 스승을 생각했다.
술과 여색에 쩔어 그 마지막마저 취한 상태로 복상사한 사나이.
고작 2주 동안 모셨을 뿐이었으나 그 기사는 말을 멋있게 포장하는 법을 알았다.
["그러네. 너는 기사였지. 뼛속까지 기사."]
수화기 너머에서 도미니카 경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이 변수는 꽤 재밌는 상황이야."]
"변수? 재밌는 상황?"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봐. 행정부에서 일하는 나. 시스템 인더스트리에서 일하는 너. 그리고 블랙 그룹에서 일하는 동생들. 지금 우린 가차랜드를 움직이는 세 날개에 각자 들어가 있는 셈이라고."]
물론, 우린 겨우 말단이지만. 하고 자조적인 농담을 던진 도미니카 경의 말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리끼리의 정보를 취합해 해결할 수 있어. 이는 정말 커다란 이점이지."]
"이점이라. 하지만 서로의 세계에 일어나는 일이 같으리란 보장은 없잖소."
도미닉 경의 의문은 현실적이었다.
각자의 세상은 조금씩 달랐다.
그 말은, 그 조금의 차이가 확연한 변수가 되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의문에 답하듯 도미니카 경이 대답했다.
["내 상사인 큐바스의 말에 따르면, 세 날개만큼은 변화가 없다고 해. 세계 선의 기둥이 되는 요소인 만큼 절대 변하지 않는 기준점인 셈이지."]
왈록은 그런 건 모르던데.
도미닉 경은 잡다한 것만 알려주던 왈록이 떠올랐다.
입안 가득 도넛을 구겨 넣은 채로.
고개를 흔들어 왈록의 잔상을 지운 도미닉 경은 다시금 도미니카 경에게 말했다.
"그렇다는 말은..."
["그래."]
도미니카 경은 상기된 목소리로 도미닉 경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정보를 잘 알 수 있다는 거지."]
세상을 이끄는 세 날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부분 가차랜드에서 생기는 큰 문제는 세 날개의 반목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서로 불신하고 반목하는 세 날개였기에 정보의 공유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그 세 날개 사이의 정보를 어느 정도 모두 알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가차랜드에서 앞서나갈 수 있는 변수가 될 것이다.
도미닉 경이 거기까지 생각하자마자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잠시. 초인종이 울려서."]
"이 쪽도 마찬가지요. 도대체 누구지?"
도미니카 경도 도미닉 경과 마찬가지로 초인종이 울린 모양이었다.
잠시 폰을 내려놓은 도미닉 경은 현관을 지나 문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천국 택배입니다! 도미닉 경 맞으신가요?"
날개 달린 택배가 새겨진 모자.
천국 택배의 택배원이었다.
저번에 왔던 사람과 다르게 순박하게 생긴 이 금발의 남성은 주머니를 꺼내 입구에 놓으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이렇게 대량으로 옮기는 건 오랜만이네요. 수수료는 보낸 쪽에서 이미 대납하셨구요, 여기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아.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다.
집을 사고 난 이후 겪었던 일이 문득 도미닉 경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저기, 서명 좀..."
"아."
도미닉 경은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천사가 건넨 펜을 들어 서명했다.
서명을 확인한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도미닉 경에게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저희 천국 택배를 이용해주세요!"
천사 택배원은 마당까지 빠르게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더니 이내 등에서 날개를 꺼내 활짝 펼쳤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마당의 절반은 될 것 같았다.
도미닉 경은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천사의 날개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보따리에 시선이 닿았다.
"...설마."
도미닉 경은 저번 일을 생각했다.
보따리를 풀자마자 둑이 무너지듯 쏟아지던 보상들.
그리고 그 보상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인 도미닉 경.
"설마. 저번엔 묵혔던 것들이 한 번에 나온 거였으니, 이번엔 좀 덜하겠지."
도미닉 경은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하지만 도미닉 경은 마지막 한 가지 보험은 들어두기로 했다.
방에서 여는 것이 아닌, 마당에서 여는 것으로.
아마 도미니카 경도 이 보상 보따리를 받았을 테니, 돌아가서 조금 더 늦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해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도미닉 경은 마당 한가운데로 옮긴 보따리를 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보상의 파도가 휘몰아쳤다.
...
도미닉 경은 인간이었고, 인간은 경험을 통해 발전하는 생물이다.
적어도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
도미닉 경은 이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멀리서 검 끝으로 풀길 잘했군."
도미닉 경은 마당 한가운데에 가득 쌓인 보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처럼 손을 대자 재화 정리 버튼이 활성화 된 것을 본 도미닉 경은 모든 재화를 인벤토리로 옮겼다.
정작 숫자로 표현된 건 그리 큰 수치는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이렇게 따로 모이면 산처럼 쌓이는지.
도미닉 경은 인벤토리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꼈다.
남은 것은 역시나 보상으로 받은 물건들과 후원받은 것들이었다.
[평행세계 이벤트 스테이지에 문제가 생긴 것에 사과드리며, 당시 문제에 연관된 인원들에게 드리는 기본 보상입니다.]
[보상 : 스팀펑크 풍 거미전차 탈것(★★), 스팀펑크 풍 제복(★), 스팀펑크 풍 무기 선택권(★), 360,000크레딧.]
[평행세계 이벤트 스테이지에 문제가 생긴 것에 사과드리며, 당시 문제에 연관된 인원들에게 드리는 추가 보상입니다.]
[보상 : 스팀펑크 풍 비행선 탈것(★★★), 스팀펑크 풍 장교복(★★), 스팀펑크 풍 무기 스킨 선택권(★★), 540,000크레딧.]
[도미닉 경의 열렬한 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성좌가 다음과 같은 물건을 보냈습니다. 보상 : 애꾸 눈 기사의 피규어X7(★)]
[도미닉 경의 열렬한 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성좌가 다음과 같은 물건을 보냈습니다. 보상 : 애꾸 눈 기사의 피규어X6(★)]
[도미닉 경의 열렬한 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성좌가 다음과 같은 물건을 보냈습니다. 보상 : 애꾸 눈 기사의 피규어X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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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정리를 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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