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88화]평행세계 후일담
* * *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
"시간이 참 빨리 흐르는 것 같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평행세계 이벤트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이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다시 혼자가 된다.
아마 다음 이벤트까진 각자의 공간에서 살게 되겠지.
거실에 앉아 평소엔 손도 안 대던 캔 맥주 하나를 딴 도미닉 경.
거칠게 피어오르는 거품에 황급히 캔을 입에 가져다 댄 도미닉 경의 모습은 겉모습만 보면 가차랜드에 적응을 완료한 것처럼 보였다.
가차랜드의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을 경험하다 보니 이젠 페럴란트보다 더 익숙해진, 제2의 고향 가차랜드.
이는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 캔을 부딪쳤다.
"그러고 보니"
'이건 하얀 셔츠야.'라고 적힌 검은 티셔츠를 입은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네 목표는 어디야?"
움찔. 하고 도미닉 경의 움직임이 멎었다.
"난 일단 5성에 도전하고 싶어. 그 이후에 무엇이 있을진 모르지만, 짧은 목표도 나쁘지 않지. 장기적으론 이 가차랜드의 역사에 남을 위인이 되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겠지. 그래서 일단 5성을 찍어 보고 싶어. 라고 도미니카 경이 말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흔들리는 흉흉한 흉부에 맥주 거품이 튀었다.
"그러는 너는, 목표가 어디야?"
도미닉 경이 침묵했다.
날카롭게 도미닉 경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찌르고 들어오는 도미니카 경의 말.
도미닉 경은 '이건 티셔츠야.'라고 적힌 하얀 셔츠 위로 손을 올렸다.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부분. 기사도가 살아 숨 쉬는 곳에.
"글쎄..."
도미닉 경의 말이 흐려졌다.
처음 가차랜드에 올 때만 하더라도 도미닉 경의 목표는 그저 싸우는 것이었다.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서 페럴란트에서 겪은 일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여동생의 죽음을 외면하고 도망치던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서 여동생 레미를 찾았다.
아직은 서로 어색하지만 가차랜드에서는 가치만 있으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리니.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다른 것은 어떤가?
도미닉 경은 요즘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하나하나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농노 출신의 무지렁이 기사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지식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도미닉 경의 성격상 궁금한 것은 바로바로 물어보기에 새로운 지식도 바로바로 알게 된다는 점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전장을 경험하고, 새로운 법칙과 새로운 뒤틀림을 만나 도미닉 경은 현재... 어정쩡한 상태였다.
오랜 전쟁에 지쳐 버린 페럴란트 농노 출신의 기사, 도미닉 경.
탱커이자 기수이며 외눈에 검과 방패를 든 캐릭터, 도미닉 경.
그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사 도미닉 경과, 쾌활하고 즐거운 모험가 도미닉 경 사이의 어딘가.
도미닉 경은 바로 그 지점에 있는 상황이었다.
"설마... 목표가 없다고 하진 않겠지?"
도미니카 경은 한참 말이 없는 도미닉 경을 하나 남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물음에 맥주 캔을 매만지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기엔 너무 즐거웠소."
그렇다.
도미닉 경이 이렇게 목적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가차랜드 그 자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즐길 거리가 너무 많다.
과장을 보태어, 가차랜드 내부에서 하루 동안 만들어지는 컨텐츠는 얼추 수십 개.
방패 손질마저 재밌다고 시켜달라던 페럴란트에 비하면 완전 극과 극.
황무지에서 살던 수도사가 도시의 환락가에 빠져 버린 것과 같은 상황.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절제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왔던 만큼, 이런 부분에서 서서히 늪처럼 빠져들어 이젠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가차랜드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미니카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답답했던지 새로운 맥주 캔 하나를 딴 도미니카 경은 갑자기 솟아오른 거품 대비하지 못했다.
맥주의 거품이 그대로 도미니카 경의 손에 흘러내렸고, 도미니카 경은 끈적거리는 손의 감촉에 인상을 구겼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목표는 있어야지. 인생 일대의 목표가 아니더라도, 여기까진 해야겠다. 라는 거 말이야."
도미니카 경이 손을 털어 수분을 날린 뒤 남은 끈적임을 대충 티셔츠 뒤편에 닦아냈다.
어차피 검은 옷이기에 얼룩이 생겨도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목표라..."
도미닉 경은 한참을 고민했다.
수동적으로 살아온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차이점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했던, 능동적인 부분이라곤 전투에서 날뛸 때 밖에 없는 도미닉 경.
그나마 무능한 지휘관들을 만나 살아남기 위해 자기 의견을 과도하게 피력해야 했던, 그래서 능동적으로 살아남았던 도미니카 경.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라는 속담이 있다.
이미 세상의 고통과 쾌락을 어느 정도 알던 도미니카 경은 가차랜드에서도 자기 컨셉... 아니,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지만 도미닉 경은 다르다.
말 그대로 늦게 배운 즐거움에 도미닉 경의 목적마저 희미해지고 마는 것이다.
"뭐, 어렵다면 가벼운 것부터. 당장 내일 이룰 수 있는 것들부터라도 괜찮아. 내일 아침은 샌드위치를 먹겠다거나."
도미닉 경은 전에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왈록이 한 말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였고, 또한 가차랜드에 푹 빠져 조언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차랜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 도미닉 경은,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 가치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
"일단"
도미닉 경이 입을 열었다.
도미니카 경은 소파에 몸을 푹 기대고 반쯤 남은 맥주를 조용히 홀짝이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3성을 목표로 해야겠소. 그다음엔 4성. 다음엔 5성."
도미닉 경은 여기서 손에 들고 있던 미지근한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크. 그래. 마지막엔 가차랜드에서 가장 강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요."
"나랑 다를 게 없네."
도미니카 경이 피식 웃었다.
"그럴 수밖에."
틱. 하고 괘종시계에서 종이 울릴 준비되었다.
"우린 하나잖소."
댕. 하고 첫 종이 울렸다.
이제 마지막. 12시를 알리는 12번의 타종이 끝나면 이벤트는 끝나리라.
그럼, 도미니카 경도 더 이상 여기에 없겠지.
도미닉 경은 그 아쉬움에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폰은 갑자기 왜 꺼낸 거야?"
"혹시나 번호를 교환하면 헤어져도 다시 볼 수 있을지 생각중이었소."
"저번에 봤어. 너랑 나, 번호 같더라. 자기 자신이라서 그런 거겠지."
도미니카 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미닉 경도 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이상할 정도로 타종은 느리게 흘러갔다.
당연한 일이다.
중앙 시스템은 데이터의 집합체지만, 감정을 이해하는 하드 A.I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
사람이 헤어질 때, 다음번을 기약하는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쥐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평행세계의 자신과 만나지 못한 이들에겐 평소와 똑같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말없이 거실 구석 옷걸이에 걸린 갑옷을 걸치고 검과 방패를 들었다.
안대의 위치를 조정하고 뒤를 돌자, 거기엔 도미닉 경처럼 갑옷을 입고 검과 방패를 든 기사가 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 아니, 거울은 좌우가 반대이니 마치 한 점을 기준으로 복사하고 붙여넣은 듯 두 기사는 걸음을 옮겼다.
도미닉 경이 방패를 든 팔을 명치 부근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을 쥔 손을 가슴 높이까지 올려 주먹을 왼쪽 가슴에 대었다.
페럴란트에서 한 기사가 먼 길을 떠날 때, 기사 대 기사로서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예우.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로 방패를 명치 부근까지 들어 올리고 검을 쥔 손을 왼쪽 가슴에 대었다.
둘의 눈은 검 끝을 향했다가 다시 서로의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향했다.
도미닉 경이 피식 웃었다.
"즐거웠소. 평행세계의 나."
도미니카 경이 방패를 살짝 부딪치며 웃었다.
"즐거웠어. 평행세계의 나."
댕. 하고 괘종시계의 마지막 12번째 종이 울렸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앞에 그 누구도 서 있지 않았다.
[평행세계 이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벤트 도중 얻은 보상은 이벤트가 완료된 이후 하루, 늦으면 사흘 정도 후에 일괄적으로 지급됩니다.]
뭐랄까.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것도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이라면 더더욱 즐겁다.
그러나 인연을 떠나보내는 일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이 있어도 아쉽고 착잡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미닉 경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새로운 인연에 대한 그리움? 아니면 헤어짐에 대한 슬픔?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갑옷을 거치하고 폰을 들어 올렸다.
S.P.Y앱을 켜자 디지털화 된 슬라임이 반갑다고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액정을 쓰다듬어 슬라임과 잠시 놀아준 도미닉 경은, 다시 앱을 켜둔 상태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한참 울고 있었던지 코를 훌쩍이며 전화를 받았다.
"이거 영상 통화는 어떻게 하는 거요? 기계는 영 다루기가 어려워서."
도미닉 경은 투덜거리듯 그렇게 말했다.
["...도미닉?"]
"그 말 대로. 도미니카 경."
수화기 너머로 이어질 수 없는 통화가 이어졌다.
있어선 안 될 일이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