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83화]초차원적 교육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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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페럴란트에서도 고전이 된 기사들의 영웅담에나 나올 법한 이 귀족 아가씨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뭘 보시는 거죠? 길을 비켜 주시겠어요? 갈 길이 바빠서 말이에요."
귀족 영애는 깃털이 달린 부채를 펼쳐 입 주변을 가렸다.
그러나 부채에 그려진 그림을 본 영애는 당황하며 황급하게 부채를 닫았는데, 도미닉 경의 시야각에선 보이지 않았으나 도미니카 경의 시야각에서 보기론 헐벗은 채로 반짝거리는 남자들의 그림이었다.
"아, 아무튼! 이 세뇨라 시타델리아가 명하노니, 제발! 길 좀! 비켜 주시겠어요?"
자신을 시타델리아 아씨라고 소개한 영애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 사이를 지나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머, 새로오신 분들인가요?"
새로운 목소리.
고개를 돌린 도미닉 경은 어린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단 단발의 여성을 보았다.
"세뇨라 시타델리아는 말투가 좀 거칠긴 해도 착한 아이랍니다. 부모가 시칠리아에서 이민 온 사람이다 보니"
맹한눈에 두꺼운 뿔테 안경을 껴 더욱 인상이 맹해 보이는 여성은 팔에 매달린 아이를 들어 땅에 내려 준 후 뻐근한 허리를 쭉 펼쳤다.
"아무튼, 기사학부에 신임 교사분들이 온다고 들었는데, 혹시 여러분인가요?"
"그건 아니읍."
도미닉 경이 진실을 말하기도 전에 도미니카 경의 손이 도미닉 경의 입을 막았다.
도미니카 경은 꽤 즐거운 상황이라 여겼는지 입 가에는 절반 정도 행복한 미소가 떠 있었다.
"맞습니다. 이 사람은 평행세계에서 온 사람이라 잘 모를 거라고 생각한답니다."
맹세코,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토록 상냥하고 배려심 넘치는 말투는 처음 들었다.
그 사이 화분에 핀 꽃을 자랑하러 온 아이와 삐뚤빼뚤한 로봇 박사 그림을 번갈아 보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하긴. 평행세계 이벤트 때면 학교에 또 하나의 나를 데려오시는 분들이 많죠. 저번엔 두 명이면 일이 절반이라면서 데려왔다가 월급도 절반이 된 분이 계시긴 하지만"
단순히 관람만 하러 오셨다면 상관없겠죠. 라고 여성은 말했다.
"일단 새로오신 분들께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유치원부 '어둠의 다크니스에 바람의 윈드'반 담임 슬로디예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어린아이들을 이끄는 반의 이름으론 좀 이상하지 않은가 묻고 싶었으나,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니 그렇게 지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말을 아꼈다.
대신 둘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마찬가지로 페럴란트의 도미니카 경이랍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슬로디."
"어머나."
슬로디는 졸린 듯 맹한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요즘 화제가 된 그분들 아니신가요?"
"화제?"
도미닉 경은 슬로디에게 되물었다.
"네. 가차튜브에서 항상 알고리즘으로 뜨죠."
슬로디는 자기 폰을 켜 가차튜브를 실행시켰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해도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백한송 시인 리뷰.]
[아이들은 언제 낮잠을 자는 것이 좋을까? 아동 심리학 박사 아인츠크라네 씨의 조언.]
전체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영상들이나 스스로에 대한 위로가 되는 영상들.
맹한 표정과 느긋하고 포근한 성격과 잘 어울리는 목록이었다.
"잠시만요... 여깄다."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린 슬로디는 도미닉 경과 관련된 영상을 찾았는지 목록을 보여 주었다.
[기만의 끝판왕! 평행세계 이벤트에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2장씩 뽑은 성좌 아임 낫 리틀에 대한 15가지 진실!]
[새로 개척을 시작하는 개척자들을 위한 전방 탱커 강의 도미닉 경 편.]
[행성 하나 살 돈으로 도미닉 경을 못 뽑은 흑우가 있다?]
[성능은 준수! 하지만 이렇게 인기가 많은 이유는? 다음 복각을 대비한 제독의 어드바이스.]
제법 많은 영상들이 도미닉 경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잠깐만요. 도미닉 경은 그저 구경하러 오셨고, 도미니카 경은 선생으로 오셨다면..."
도미니카 경은 목줄기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설마 들켰나 싶어 서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일일 강사 분이군요! 세상에. 도미닉 경 같이 유명하신 분이 저희 아카데미에 선생으로 오실리가 없죠. 바쁘실 텐데. 교학처 분들, 드디어 등록금을 제대로 쓰기 시작한 모양이군요."
슬로디가 양팔을 들고 만세를 외치자 그 행동이 재밌어보였는지 아이들도 슬로디를 따라 만세를 외쳤다.
"당연히 탱커학이겠죠? 아니면 기사도의 이해? 방패술?"
"그나저나 우리를 그렇게 잘 안다니, 좀 의외요."
도미닉 경은 화제를 돌릴 겸 아무 말이나 내뱉었으나, 사실 도미닉 경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최근 엄청난 이슈를 몰고 다니는 도미닉 경이었으나, 엉망진창인 사건과 사고를 겪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그야, 여러분들은 오랜만에 나타난 루키니까요."
슬로디가 슬슬 졸리다고 칭얼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이들 중에서도 도미닉 경을 따라 탱커가 되겠다고 하는 애들도 있어요. 저희 반에선 저기 루시나 빈센트가 그렇죠."
병아리같은 노란 옷을 입은 두 남녀가 눈을 반짝이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보고 있었다.
둘 모두 등에 작은 탁자를 매고 있었는데, 아마 그게 방패 대신인 듯싶었다.
"제가 여러분들이 길을 찾도록 도와드리고 싶지만"
슬로디는 이미 둘이 길을 잃어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애들 낮잠 잘 시간이라서요. 낮잠자고 나면 또 점심시간이고"
뜻밖에 빽빽한 스케쥴. 슬로디는 맹한 눈으로 다시 반으로 돌아가는 아이 하나하나를 체크했다.
"도와드리기엔 아이들의 변덕스러움이 걱정돼서요."
"이해하오."
"그럼요. 일하시는데 방해가 될까 걱정입니다."
여전히 도미니카 경은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이런 말 하기엔 좀 염치없지만..."
슬로디는 아주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 숨을 내뱉으려다 삼키기를 몇 번 반복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처럼 튼튼하게 자라라고 덕담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서로를 바라본 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루시와 빈센트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을 반짝이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잠시 후.
"끙. 아껴뒀던 계피 사탕까지 다 털릴 줄은. 아이들이 계피 사탕을 좋아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러게. 안대가 멋지다면서 당길 땐 동굴에서 트롤을 만난 것보다 더한 공포였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유치원을 나왔다.
덕담은 고작 여섯 줄에 불과했으나, 아이들이 지칠 때까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에게 질문하고, 들러붙고, 뽈뽈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루시와 빈센트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지켜야 한다며 탁자를 앞으로 내밀었으나, 아직 덜 자란 루시와 빈센트가 수십 명의 아이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울기 시작한 루시와 빈센트를 달래주기 위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삼십 분을 더 쓰고 나서야 아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 아이들, 용감했지?"
"내가 저 나이 때엔 배추에 붙은 배추벌레에도 화들짝 놀라서 울고 그랬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아이들의 행동을 생각하며 웃었다.
자신들을 보던 가차랜드 시민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나저나 가차랜드에선 이렇게 어린 나이에도 학교를 보낸다니, 교육엔 신경을 잘 쓰는 모양이오. 아니면 모두 귀족 자제들일지도."
"그런가? 귀족 자제라면 오히려 가정교사를 붙이지 않을까? 페럴란트 말고 다른 국가는 어떤지 모르니까 비교할 수도 없고."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럴란트가 유독 척박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페럴란트는 뜻밖에 인구 대비 학자 비율이 높은 나라였다.
다만 학자가 된 이를 제외하면 정말 글 하나 모르는 극단적인 구조였기에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말은 둘 다 맞는 말이었으나 정작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잡담하며 걷고 있자니, 어느새 대운동장의 주변 길을 절반 정도 돌고 있었다.
"아름답군."
"그래. 내가 좀 아름답긴 하지."
"당신 말고. 정원 말이오."
도미닉 경은 학생들이 만든 화단을 보며 알 수 없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척박한 페럴란트에서 꽃을 볼일이 얼마나 있으랴?
그마저도 전장에서 뒹굴다 보면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 태반이었다.
가차랜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은 적은 많지만, 이렇게나 작은 꽃 하나에 정신을 판 적은 거의 없는 듯싶었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도미닉 경은 손을 뻗었다.
꺾으려는 건 아니었으나, 그 잎이라도 만져 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
"네 이 노옴! 네놈의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납치범! 감히 우리 마왕님이 키운 양귀비를 꺾으려고 해!"
"!"
마왕과 참모장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