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81화]광고가 아니라 바보입니다!
* * *
복면인은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도미닉 경의 말대로였다.
처음에 들켰을 때 이상한 짓 하지 않고 도망쳤으면 이렇게 일이 커지지는 않았으리라.
복면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미의 목에 닿은 단검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붉은 실선을 만들었다.
"레미!"
도미닉 경은 그 상처에 놀라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만! 오지 말라고! 인질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냐!"
복면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더욱 레미의 목 가까이에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둘 다 몰입한 상황에서 미안한데..."
그때, 복면인의 등 뒤에서 잠에서 덜 깬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차랜드에선, 죽어도 가치만 있으면 살아난다는 걸 까먹은 거야?"
"아."
복면인 뒤 쪽, 소파에 누워 있던 도미니카 경이 엉망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상체를 일으켰다.
도미니카 경의 말대로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인질극이 되긴 했지만,죽으면 바로 부활하는 가차랜드의 특성상 인질극은 의미가 없었다.
"언제 알아차리나 했네요."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잠에서 확 깬 레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맹하게 있는 복면인의 손목을 잡고 밀어 그 틈 사이로 쏙 빠져나왔다.
철컥. 하고 복면인의 옆에서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꿈을 방해한 죄는 받아야지, 하이퍼 오센틱."
도미니카 경은 알고 있는 사람인 듯 복면인의 본명을 부르며 웃었다.
"조금 따가울 거야. 탱커 치곤 딜이 잘 나오는 편이라."
탕. 하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숲에 울려 퍼졌다.
숲에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
"그래서."
도미닉 경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복면인, 하이퍼 오센틱을 바라보았다.
낡은 중절모, 여기저기 구멍 뚫린 양복과 색 빠진 코트.
도미니카 경의 말에 의하면 뽀 르 작 대공의 휘하에서 일하는 수사관, 하이퍼 오센틱.
"왜 우리 집에 들어온 거요?"
"그게..."
하이퍼 오센틱은 죽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대공님께서 여러분을 눈여겨보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하이퍼 오센틱은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대공님께선 여러분이 마음에 드셨는지, 이번 이벤트 동안 대공령으로 초대하려고 이렇게 저를 보내셨습니다."
"잠깐, 그럼 등 뒤에 있는 수상한 하프는 뭐죠?"
"그리고 들어왔을 때 당황한 건 또 뭐란 말이오?"
레미와 도미닉 경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하나씩 대답해 드리자면"
수사관인 하이퍼 오센틱은 수상한 증거물을 모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하필 여기까지 오는 길에 찾은 수상한 하프는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등에 메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저희 수사부는... 비밀 정보 경찰이기에 정체를 들켜선 안 됩니다. 저번에 누군가가 저희를 알아차리곤 자꾸 인터넷에 뻘글을 쓰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보기도 했죠."
어떻게 해결은 되었습니다만...이라고 말을 흐린 하이퍼 오센틱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광고도 그 일환이죠. 약 30초. 늦어도 1분. 사람들의 인지를 흐리고 움직임을 멈춘 다음 그 짧은 시간 내로 작전을 해야 합니다."
이번엔 신비주의 컨셉으로 편지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만... 하고 하이퍼 오센틱이 말을 흐렸다.
"그나저나 대단하시더군요. 설마 모두 목숨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베테랑일 줄이야."
"...음?"
레미는 하이퍼 오센틱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가차랜드에선 목숨이 여러 개라는 말로 절 당황하게 만들고 도망친다. 정말 베테랑 요원이 아니면 생각해낼 수 없는 일이죠."
하이퍼 오센틱은 마치 목숨이 하나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 혹시 당신은, 목숨이 하나거나 하나라고 믿는 거요?"
도미닉 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이퍼 오센틱이 낡은 코트를 추켜올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지구는 둥글고, 낙엽은 떨어지듯이 목숨이 하나라는 건 당연한 상식 아닙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하이퍼 오센틱에게 꽂혔다.
"상식... 맞지요?"
하이퍼 오센틱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이 시선들을 견디기엔 그의 여린 마음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알아차렸을 수 있지만, 하이퍼 오센틱은 평행세계의 슈퍼 디럭스였다.
슈퍼 디럭스는 자기애의 화신이며, SNS를 통해 자신을 알리고자 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그러나 반대로 하이퍼 오센틱의 경우 자기주장이 거의 없으며, SNS를 통해 안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하이퍼 오센틱은 지구가 둥글다고 믿었고, 달에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고 배웠으며 산타 할아버지는 실존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가 소설 속 인물이라고 배운 사람이었다. SNS에서.
정작 하이퍼 오센틱은 가차랜드의 땅은 관측되지 않은 부분으로 여기저기 구멍 뚫린 평면이었고, 새해를 맞아 달 토끼 이벤트가 준비되고 있었으며, 크리스마스를 위해 산타가 살을 찌우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이벤트를 전혀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벤트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슈퍼 디럭스와는 완전히 반대 성향의 인물.
그런 그는 SNS에서 사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라는 글을 본 후 진짜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차랜드에선 가치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
"에이, 농담도. 그렇게 쉽게 부활할 수 있을 리가 있습니까? 적어도 속이려면 그럴듯하게 속이셔야"
참으로 답답한 남자, 하이퍼 오센틱!
그도 이곳에 초대되면서 설명을 들었겠지만, 당시 하이퍼 오센틱은 자신만의 망상에 빠져 지내던 사람이었기에 설명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사람 목숨이 여러 개라면, 2성인데 4성급인 탱커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겠군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움찔했다.
실제로 그들은 청문회에 불려가 너프를 먹을 정도로 성급을 뛰어넘은 성능을 보여 주었다.
"그런 탱커가 고작 10장 씩만 카드 풀에 풀렸다는 것도 사실일 테구요."
하이퍼 오센틱은 설마 100장도 아니고 10장만 풀어낸 사람이 있겠느냐며 웃었지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웃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 대공님께서 인상깊게 보셨다는 글도 사실 아니겠습니까!"
인상깊게 봐서 당신을 통해 우리를 찾아온 것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도미닉 경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눈앞에 이 수사관은 굉장히... 바보인 모양이었으니까.
"아무튼, 이 하이퍼 오센틱은 여러분의 기개에 감동했습니다. 과연 대공님께서 눈여겨보신 분들."
하이퍼 오센틱은 안주머니에서 고품격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금박으로 치장된 하얀 봉투는 붉은 밀랍으로 밀봉되어 있었고, 밀봉된 부분엔 대공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대공님께서 여러분을 대공령으로 초대한다고 하셨으니, 초대장을 받아주십시오. 주소와 지도는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하이퍼 오센틱은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초대장에 정신이 팔린 이들 하나하나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했다.
"이렇게나 대단한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
참으로 교묘한 화술!
방금 전까지 인질을 잡고 인질극을 하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 자리를 벗어날 준비하는 하이퍼 오센틱.
이는 하이퍼 오센틱이 실수할 때마다 찾아오는 행정관을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매달린 본능의 결과물이었다.
"잠깐."
그러나 도미닉 경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하이퍼 오센틱을 불러세웠다.
하이퍼 오센틱은 설마 아까 인질극에 대한 보상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말에 맞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죠?"
"그, 방금 전의 광고라는 것이 나와서 말인데"
하이퍼 오센틱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무단 침입과 인질극에 대한 보상을 내놓으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된 이상 먼저 선수를 쳐서
"혹시 광고를 보냈다는 것이 가마솥 스튜와 천국 택배, 그리고 라디오 광고였던 거요?"
"그, 무단 침입과 인질극에 대한 보상은 바로 처리해드리 네?"
도미닉 경은 하이퍼 오센틱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 완전 실수했구만. 하고 자신을 자책한 하이퍼 오센틱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말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제가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네. 보십쇼! 보상 문제에 대해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아무튼, 뭐라고 하셨죠?"
"광고에 나오던 가마솥 스튜와 천국 택배, 그리고 마지막에 나온 라디오 모두 당신들의 것이었소?"
도미닉 경의 말에 하이퍼 오센틱은 턱을 매만졌다.
"일단 천국 택배와 가마솥 스튜는 저희 대공령과 제휴하고 있어서 맞는 것 같습니다만... 라디오요?"
도미닉 경은 방금 전 끔찍했던 꿈이 생각났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마솥 스튜와 천국 택배는 괜찮았으나, 라디오가 나타난 이후 무언가 이상한 징조가 느껴졌다.
"라디오는 저희가 광고로 내세우진 않습니다. 광고비를 받지도 않고 광고하는 건 예법이 아니죠."
하이퍼 오센틱은 여전히 이해하 되지 않는다는 듯 귀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나 대공령의 초대에 응하신다면, 다시 저를 찾아와주십시오. 그때까지 수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에게 민폐란 민폐를 다 끼친 하이퍼 오센틱은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 아부성 멘트를 꺼냈다.
여전히 하이퍼 오센틱은, 목숨은 하나뿐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내였다.
...
'하겠습니다.'
"이거 참, 들켰을지도 모르겠네."
숲속에 숨겨진 방첩탑에서 한 여성이 귀에 헤드셋을 끼고 어딘가를 도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대기업의 비서처럼 단정한 양복차림에 지적인 안경을 끼고 있었다.
이내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한 그녀는 헤드셋을 벗으며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챙겼다.
"보스가 좋아하실지도 모르겠어."
비서는 방첩탑을 내려갔다.
방금 전까지 도청을 하던 장소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