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80화]이건 광고가 아닙니다!
* * *
도미닉 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마솥 스튜도, 손에 들고 있던 택배도 없었다.
여전히 거실에선 도미니카 경이 자고 있었고, 안주는 어질러진 채 그대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라고 생각한 도미닉 경은 문득 자기 폰에서 나타난 촉수가 생각났다.
그 벌레. 촉수는 벌레를 잡아 자기 폰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기억한 도미닉 경은 바로 스마트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배경 화면은 꽤 심플해 통화와 메시지, 카메라와 갤러리, 지도와 처음 보는 앱이 전부였다.
그 수상쩍은 앱은 검은 배경에 그려진 0과 1로 구성된 초록색 디지털 촉수였는데, 이름이 S.P.Y로 되어 있었다.
아마 [작전명 : S.P.Y] 당시 폰에 이식된 슬라임이 앱의 형태로 남은 거겠지.
도미닉 경은 이 앱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좋은지 나쁜지도 몰랐으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수상한 앱을 누르고 말았다.
[S.P.Y 당신의 쾌적한 보안!]
[실시간 검사 (3건 적발!)]
[정밀 검사(2분 전)]
[VPN(업데이트 중!)]
앱을 실행하자 화면에서는 형광 녹색의 배경에서 검은 슬라임이 통통 튀어다니고 있었다.
데이터화 된 도트 쓰레기를 먹은 슬라임은 뾰롱 하는 소리와 함께 경험치가 상승했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도미닉 경은 도대체 이 앱의 정체가 뭘까 이리저리 만져 보는 도중, 화면을 뛰어다니는 슬라임을 건드렸다.
"...!"
슬라임이 유리 너머에서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거대한 도미닉 경의 얼굴이 있었다.
스테이지의 리셋 당시 도미니카 경과 도미닉 경의 폰에 백업된 슬라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좁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을 움직여 그 좁고 압축된 방을 깨고 나오자, 곧 엉망진창인 데이터와 캐시들이 쓰레기처럼 널브러지고, 보안상의 헛점이 뚫려 무언가가 새어 나가는 틈이 있는 공간이 보였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휴대폰에 옮겨진 핵은 휴대폰의 깊숙한 곳 유심칩이라는 공간에 APK의 형태로 남았다.
보안 앱이 있었더라면 슬라임의 핵은 비인가 프로그램으로 찍혀 사라졌을수도 있다.
그러나 보안이라는 것을 신경 쓸 리 없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성격 덕분에 슬라임은 무사히 휴대폰의 일원이 되었다.
반면, 보안도 없이 비인가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도미닉 경의 폰 내부는 엉망이었다.
캐시와 데이터가 정리되지 않아 엉망으로 널브러지고, 벽 곳곳에 구멍이 뚫려 보안이 취약한 상태에서 슬라임은 본능적으로 수복을 위해 움직였다.
스테이지와 하나가 되었던 핵이 수복을 위해 스테이지의 균열을 점액으로 막았듯, 여기서도 그런 것이다.
0과 1로 구성된 신기한 점액이 쓰레기와 쓸데없는데이터들을 삼켜 분해하고, 그 분해한 데이터 잔해는 끈적한 점액에 섞여 보안상의 허점을 막아 냈다.
데이터의 잔해를 먹고 손상된 파일들을 복구하는 일을 반복하자, 휴대폰은 이 앱이 유용하다고 생각해 조금씩 더 큰 권한을 내렸다.
다만, 정말 중요한 권한은 주인, 즉 도미닉 경의 허락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까만 슬라임이 당신이 쓰다듬어 주길 원합니다.]
[까만 슬라임을 위해 당신의 갤러리/사진/음성파일/카메라에 접근하는 걸 허락하시겠습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쓰다듬어 주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앱에 대한 접근 권한이었으나, 사실 이는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도미닉 경이 화면을 마구 두드리다가 떠오른 창을 보지 못하고 그냥 예를 눌러버렸다.
도미닉 경은 도대체 방금 나왔던 문구가 뭔지 다시 확인하려고 화면을 유심히 봤으나 그저 슬라임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도트 애니메이션만 나올 뿐이었다.
슬라임은 도미닉 경이 쓰다듬을 수 있도록 저 유리창까지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갤러리, 사진, 음성파일, 카메라처럼 허락받은 앱을 꼬물거리며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유리창... 도미닉 경에서 볼 땐 액정까지 다다른 슬라임은 쓰다듬어달라는 듯 유리창에 딱 달라붙었다.
말랑말랑한 점액이 액정 안쪽에 가득 묻어나왔다.
"네가... 방금 전의 그, 뭐라고 해야 할지. 그 상황을 막아준 건가?"
도미닉 경은 쓰다듬어달라고 조르는 슬라임을 보며 물었다.
지능이 있는 슬라임은 방금 전의 상황이 뭔지 생각하다가 이내 벌레 하나를 잡은 걸 기억하고는 핵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도미닉 경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액정 너머에 있는 슬라임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 진동이 액정 너머로 전달되자 슬라임은 기쁨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다시 자기 앱으로 돌아가 무언가 기록 하기 시작했다.
[패치 노트 ; 거인이 나를 쓰다드머따. 기쁘다.]
도미닉 경이 있던 방향에선 보이지 않았으나 아무튼 삐뚤빼뚤한 글씨로 패치 노트를 쓴 슬라임은 머리 위로 도트로 된 하트를 띄우며 기쁨을 표시하고 있었다.
꽤 귀엽군.
멍하게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던 도미닉 경은, 어쩌면 구해주는 것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합니 뭐야! 아직 움직이는 사람이 있잖아! 30초 동안은 문제없을 거라며!"
그때, 갑자기 콧노래를 부르며 당당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이는 등 뒤로 현란한 하프가 매어져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그 하프를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래. 청문회장에서 금지된 힘을 쓴 그 의원의 검이 딱 저런 느낌이었다.
"응. 그래. 도미닉 경이 깨어 있어. 이거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분명 5성도 15초는 꼼짝 못 하게 한다며! 뭐? 애드 블록? 광고 제거 3,900 가차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복면을 쓴 이는 그다지 좋은 의도로 도미닉 경의 집에 침입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도미닉 경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는데..."
복면을 쓴 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미닉 경을 제외한 인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도미니카 경이 슬슬 깨어나려는지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
망했네.
복면을 쓴 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복면인은 서포터였다.
은신이 있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특이점도 없었고,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도미닉 경 한 명이라면 성급과 성능의 차이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테지만, 둘 부터는 확실하게 자신이 질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복면인의 목표는 전투가 아니라 어떤 데이터의 회수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로군."
도미닉 경은 검과 방패를 소환했다.
"그, 혹시 생일 축하 공연을 위해 온 음유시인이라고 하면 믿겠어요?"
복면인은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변명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 황당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거짓말이 나올리가 없었고, 도미닉 경도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보아하니, 방금 전의 일과 관련되어 있군. 맞소?"
도미닉 경의 검이 복면인의 턱 끝에 닿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무기조차 꺼내지 않은 복면인을 제압하기엔 충분한 수였다.
"아뇨, 그럴 리가. 전 그냥 제 끝내주는 영감으로 만든 노래를 들려주고자"
목에 칼이 들어오자 더 횡설수설하는 복면인.
도미닉 경은 더 깊숙이 복면인의 목에 칼을 대었다.
그때였다.
"이상한 꿈... 여기가 어디지..."
도미닉 경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에서 레미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레미는 마침내 오빠를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꿈을 꾸었다.
곧 가마솥 스튜와 시리어슬리 시리어스 시리얼 광고가 나왔기에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었다.
가차랜드에선 꿈에도 가격을 매겨 광고비를 받곤 했으니까.
블랙 그룹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저런 잡지식을 많이 알게 된 레미였다.
"...오빠? 왜 여기에 오빠가? 여긴 또 어디지? 꿈인가?"
어제 과도하게 술을 마신 탓에 여전히 숙취와 잠에 취한 상태인 레미는 복면인의 목에 검을 대고 있는 도미닉 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가 있어, 레미. 당장!"
도미닉 경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아직 비몽사몽 한 상태인 레미는 그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 사이, 복면인이 도미닉 경과 레미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둘의 사이를 유추해냈다.
분명 저 둘은 남매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복면인은 너무나 지금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레미의 등장으로 살짝 흔들리던 칼끝을 잡아 천천히 밀어낸 복면인은, 곧바로 은신을 써 레미의 옆으로 다가 갔다.
도미닉 경은 레미에게 경고하고는 다시 복면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등골이 오싹해진 도미닉 경이 다시 고개를 돌려 레미를 바라보았다.
"어... 역시 꿈인가? 제로가 없..."
"당장 나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이 여자애 목숨은 없다!"
복면인은 호기롭게 외쳤으나, 도미닉 경은 그 발언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 처음에 들어왔을 때, 바로 뒤로 돌아갔으면 안 되는 거요?"
"아."
생각보다 복면인은 머리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