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80화 (80/528)

〈 80화 〉 [79화]이건 광고가 아닙니다.

* * *

도미닉 경은 술에 취해 뻗은 여동생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술을 연달아 마시더라니.

레미가 쓰러진 이상, 도미닉 경은 더 이상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다.

"여기 지금까지 먹은 거 계산하겠소. 얼마요?"

도미닉 경은 기사도와 절제를 배운 사람이었다.

...

지금까지 마신 술값을 지급한 도미닉 경은 레미를 들쳐메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그렇다. 말 그대로 어깨에 들쳐 멘 상태.

부축만 하기엔 레미의 의식이 없었고, 업어 주기엔 레미의 키가 좀 작았다.

그렇다고 다 큰 여자를 목마 태우고 다니기엔 그렇지 않은가.

한참을 고민하던 도미닉 경이 생각한 최고의 방법이 바로 이 어깨에 들쳐멘다는 방식이었다.

"가볍군. 너무 가벼워."

도미닉 경은 한 손으로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앙상한 레미의 몸무게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도미닉 경은 레미를 어깨에 들쳐메고 거리를 활보하다가 문득 레미의 집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곤란한데."

제로가 있었더라면 부탁이라도 할 수 있었으나, 제로는 레미의 명령에 따라 연구실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 말의 의미는 도미닉 경이 레미를 집에 돌려보내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은 어깨에서 축 늘어져 흘러내리려고 하는 레미를 다시 들쳐 올리며 자기 집으로 향했다.

"아."

집으로 돌아온 도미닉 경은 거의 동시에 집에 도착한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니카 경은 한 손으로 평행세계의 레미의 뒷목을 잡아질질 끌고 있었다.

도미니카 경의 사나운 눈매와 합쳐져 마치 유괴처럼 보이는 상태!

그러나 도미니카 경이 바라본 도미닉 경의 모습도 만만치 않았다.

집의 외부엔 아직 조명 장식이 설치되지 않았기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가차랜드에선 시간에 따른 빛의 세기와 날씨만큼은 쓸데없이 현실적이었다.

어두운 숲 길에서 나타난 도미닉 경은 어깨에 여자아이를 유괴한 납치범처럼 보였다.

"납치범이네."

"유괴범이로군."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손에 든... '남동생'은 무사한 거요?"

팬텀 박사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머리가 약간 더 커 보이는 착시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뜻밖에 사소한 것에 눈썰미가 좋은 도미닉 경은 팬텀 박사의 뒤통수가 조금 더 부풀어 올랐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혹 같은...

"그러는 너야말로 '여동생'이 뻗어 있는데."

도미니카 경도 지지 않겠다는 듯 어깨에 들쳐 맨 레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레미는 술에 취해 이렇게 된 거요."

"마찬가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넘어진 거야."

평행세계라서 그럴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

그리고 밴시 박사와 팬텀 박사. 아니, 레미와 후안.

둘의 상황은 닮아 있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 집에서 단 하나 있는 침대에 동생들을 눕혔다.

그리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오늘 하루는 참 엉망진창이었어."

도미니카 경이 인벤토리에서 먹다 남은 안주를 꺼냈다.

소파에 푹 눌러앉아 땅콩을 입안에 털어 넣은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이벤트가 끝나겠지."

도미니카 경이 말했다.

"우린 다시 각자의 세상으로 돌아갈 거고."

"아마도."

도미닉 경이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둘 다 잠깐 말이 없었다.

"가차랜드는 참 신기해."

도미니카 경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몸을 소파에 더 깊게 묻었다.

소파가 얼마나 푹신한지 등받이에서 도미니카 경의 흉흉한 가슴만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이토록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가 있었을까?"

"글쎄. 페럴란트와 가차랜드 외엔 가 본 곳이 없어서 모르겠소."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동의하고 싶었으나 차마 거짓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뭐랄까."

도미닉 경은 대신, 자기 감상을 말했다.

"가차랜드에선 지루할 틈이 없는 것 같소. 예측하면 빗나가고, 엉망진창인데도 나름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뭐, 나도 같은 생각이야."

도미니카 경이 슬쩍 웃었다.

"죽은 동생도 찾고, 재밌는 경험도 많고. 무엇보다 평행세계의 내가 이렇게 귀여운 사람인 줄 몰랐어."

도미니카 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도미닉 경을 놀렸다.

"귀엽다니. 기사에게 붙을 수식어는 아닌 것 같소. 평가에 감사드리외다."

도미닉 경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도미니카 경은 나름 회심의 장난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기본 옵션으로 달려 있던 괘종시계가 울리며 자정을 알렸다.

가차랜드의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었다.

...

이튿날 아침.

도미닉 경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동생 레미에 대한 생각과 남은 이벤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도미니카 경은 푹신한 소파의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었다.

도미닉 경은 그런 도미니카 경에게 모포를 한 장 덮어 주고 간단히 아침을 만들었다.

아직 기사가 되기 전 요리는 항상 도미닉 경의 담당이었으나, 그다지 맛있지도, 그렇다고 맛 없지도 않는 무난한 요리실력.

그런 도미닉 경이 좋아하는 메뉴는 가진 재료를 모두 넣고 끓이는 잡탕 스튜였다.

남으면 또 이튿날 새로운 재료를 넣어 끓이고, 또 남으면 이튿날 새로운 재료를 넣어 끓이고...

그야말로 1년 내내 먹어도 새로운 느낌으로 먹을 수 있는 맛.

이건 PPL도 광고도 아니었으나 도미닉 경의 스튜 먹방은 마치 광고를 받은 듯 행복해 보였다.

벽난로에 달린 가마솥에 있던 스튜가 조금 줄었다.

도미닉 경은 스튜 한 그릇을 다 먹어치운 뒤 거실로 나와 어제 먹다 남은 안주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튀김이나 볶음, 혹은 견과류나 과일이었기에 스튜의 재료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대신, 도미닉 경은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고기와 양파, 그리고 마늘 약간과 후추, 소금을 꺼냈다.

놀랍게도 이건 도미닉 경이 따로 산 것은 아니었다.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에 은근슬쩍 껴있었다.

도미닉 경은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건 바로 가마솥 스튜가 있기 때문이죠!지금이라면 저렴한 가격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광고도, PPL도 아니다.

"...어째서 자꾸 가마솥 스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도미닉 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 정도로 강조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때, 마침 도미닉 경의 생각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이 타이밍에?"

도미닉 경은 검과 방패를 들었다.

현재 시각은 새벽 5시 쯤.

누군가가 찾아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으며, 예의가 없는 시간이었다.

"계세요? 택배입니다!"

도미닉 경은 문에 달린 작은 틈으로 밖을 보았다.

날개 달린 택배 문양의 모자. 그리고 등에 달린 하얀 날개.

"안 계신가요?"

예전에도 본 적이 있던 천사였다.

집을 샀을 때 바로 보상을 전달한 그 천사 말이다.

도미닉 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국 택배라면 믿을 만 하니까.

라디오에서 여전히 신명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국 택배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합니다!천국 택배는 세상에서 가장 빠릅니다!

도미닉 경은 문을 열었다.

천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택배를 건넸다.

"여기 싸인해주시면 됩니다."

도미닉 경은 싸인하려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택배를 시킨 적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건 보낸 사람이 누구요?"

도미닉 경은 서명하기 전에 천사에게 물었다.

"글쎄요? 주소는 홈쇼핑 회사예요. 직접 시키신 거 아니었나요?"

도미닉 경은 이 물건을 받기 싫었으나, 다시 문득 도미니카 경이 이 물건을 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미니카 경이 깨어나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으며, 도미닉 경은 택배 상자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서명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천국 택배를 이용해주세요!"

천국 택배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합니다!천국 택배는 세상에서 가장 빠릅니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홱 돌려 라디오를 보았다.

이게 뭐지?

도미닉 경은 라디오를 구매한 적도 없었다.

아직 스마트 폰도 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전자기기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여기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만일 처음부터 있었더라면 짐을 정리할 때 나왔어야 정상이다.

도미닉 경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이 상황에선 가마솥 스튜를 먹어야­

머리가 지끈거리시나요?그건 바로 가마솥 스튜가 없기 때문이죠!지금이라면 저렴한 가격에­

그때였다.

도미닉 경의 폰에서 디지털화 된 촉수가 튀어나오더니, 도미닉 경 주위를 돌던 벌레 하나를 잡아 폰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제야 도미닉 경은 정신을 차렸다.

가마솥 스튜와 천국 택배에 대한 광고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까지 라디오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가마솥 스튜도, 천국 택배도,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이 받은 택배까지도.

아무 것도 없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