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76화]리셋
* * *
["아아, 들리십니까? 들리신다면 옆에 있는 [예]를 눌러 주세요. 만일 몸을 움직이지 못하신다면 예라고 말하기만 하셔도 됩니다."]
코더의 목소리가 시스템을 통해 스테이지 전체에 퍼져나갔다.
["지금 스테이지 내부에 있는 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현재 스테이지에 문제가 발생하여 빠르게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원활한 조치를 위해 하드 리셋이 시작될 예정이니 안에 계신 분들은 충격에 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몇 분 남았어?"
"리셋까진 3분 32초 예정. 이후는 아직 미정."
코더들은 최대한 빠르게 이 버그를 해결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엉킨 털실 위로 접착제를 쏟은 것 같이 뒤죽박죽 얽혀 분리하기 힘든 코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사람들에게 공지해. 문제가 생겼을 때 공지를 하고 안 하고는 다른 문제니까."
"오케이."
바니걸 코더는 시스템 창을 통해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앞으로 3분 후 리셋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리셋의 충격을 대비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앞으로"]
"제길."
모자 장수 코더는 마침내 리셋 명령문을 모두 작성한 상태였다.
이제 여기에 오류 데이터를 온전한 데이터로 바꾸고 무결성 검사를 진행하면 바로 리셋이 시작되리라.
팀의 막내 코더로서 버그는 몇 번 겪어 봤으나, 이렇게 스테이지 전체를 관통하는 버그는 처음이었기에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모자 장수 코더는 눈을 질끈 감고 입력 버튼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리셋을 위한 무결성 검사가 시작되었다.
오류의 근원인 슬라임이 없는 예전 파일로.
...
["앞으로 3분 남았습니다. 모두 리셋에 대비하십시오. 계속해서 알려드립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시스템 창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셋에 대비하라고 말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대비해야 한단 말인가?
"뭐, 그냥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상관없겠지."
도미니카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명색이 탱커인데, 충격 하나 못 버티겠어?"
"그렇긴 하오."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슬라임이 불안한 듯 떨리는 핵을 주체하지 못했다.
리셋을 위한 파일 무결성 검사가 시작되었다.
현재 슬라임은 스테이지와 하나인 상태.
스테이지를 훑는 무결성 검사의 스캔의 기묘한 감각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
다시 하수도 구석에서 이스터에그로 남아 있고 싶다.
슬라임은 지능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 지능은 개나 고양이 정도의 수준.
위기의 상황에서 슬라임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생존에 대한 것뿐이었다.
도미니카 경은 그런 슬라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또 하나의 나. 혹시 폰 있어?"
도미니카 경은 주머니에서 자기 폰을 꺼내 들었다.
남은 시각은 겨우 2분 남짓. 시간이 없었다.
"있긴 하오. 왜 폰을 찾으시오?"
도미닉 경은 폰을 꺼내 든 도미니카 경의 행동에 의문을 표하며 자기 폰을 꺼냈다.
"이 녀석의 일부를 여기 옮기려고."
도미니카 경은 알게 모르게 이 순박한 사고뭉치가 마음에 들었다.
백신이 바이러스를 경계해 EXE 파일을 제거하더라도, 이는 백신이 과도하게 반응한 탓이지 백신의 의도가 잘못된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도미니카 경은 이 말을 자기 상사이자 보안 전문가 샬록에게 들었던 것이기에 백신의 정확한 뜻은 몰랐다.
그저 우리 대신 버그나 바이러스를 잡는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슬라임은 스테이지와 합쳐져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소."
도미닉 경은 버그가 스테이지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경비로 일하며 처음 겪었던 버그 스테이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하지만 원본은 무해하지. 그저 이스터에그일 뿐이었잖아. 버그는 정작 다른 곳에서 일어난 거고."
남은 시각은 50초가량.
마음이 급해진 도미니카 경은 검은 액체 속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슬라임은 그 손길을 쓰다듬어 주려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아무 의심 없이 다가왔다.
"미안. 좀 아플지도 몰라."
슬라임이 미처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도미니카 경의 손아귀에 슬라임의 핵이 잡혔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뽑아내버린 도미니카 경은 다급하게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폰 하나에 담기엔 내 폰의 용량이 너무 적어. 네 도움이 필요해."
도미닉 경은 급발진하는 도미니카 경을 보며 할 말을 잃었으나,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시각은 20초가량.
도미닉 경은 결국 자기 폰을 내밀었다.
슬라임의 핵이 두 갈래로 나뉘어 압축되며 각자의 폰에 이식되기 시작했다.
["곧 리셋이 시작됩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남은 시간 3초.
마침내 슬라임의 핵이 온전히 둘로 나뉘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휴대폰에 옮겨졌다.
["리셋이"]
그리고 둘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도미닉 경은 어디에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헛. 하고 정신을 차리자, 그곳은 끈적한 검은 액체로 가득한 스테이지가 아닌, 초상화가 가득한 방이었다.
도미닉 경이 벨벳으로 된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엔 내가 먼저 일어났네."
도미니카 경은 창문가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비치된 믹스 커피와 도미니카 경 옆에 뜯겨진 믹스 커피 봉투를 보니 이 대기실에 있던 비품인 모양이다.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에게 미리 탄 커피를 건네주며 말했다.
"리셋이 끝난 거요?"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반대편 의자에 앉으며 건네준 커피를 마셨다.
"몰라. 멀쩡한 걸 보면 리셋이 된 거겠지."
사실 도미니카 경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 까지 여덟. 다 있네."
도미니카 경이 인원수를 세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은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진 정신이 없어서 몰랐으나, 벨벳 소파 너머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여섯이 있었다.
탱커인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기본적인 회복 속도가 빨랐기에 먼저 일어났으나, 딜러와 서포터인 여섯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복구 프로토콜 실행."
"프로세스 완료. 재기동합니다."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두 제로였다.
충격에 여기저기 부딪혔는지 엉망으로 찌그러진 반달형의 제로와 인조 피부가 벗겨져 안의 회로가 고스란히 보이는 안드로이드 제로는 깨어나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분석을 끝마쳤다.
"리셋이 완료되었습니다."
"우린 살았습니다."
표정 모듈이 고장 났는지 무표정한 안드로이드와 역시나 어딘가 고장 났는지 렌즈에서 윤활유가 새어 나오는 반달형의 기계가 서로를 껴안았다.
"저런 걸 보면 이것도... 아니, 아니다."
도미니카 경은 데이터로 구성된 인공 지능들을 보며 도미닉 경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으나, 아직 스테이지 내부인데다가 코더들이 언제 올지 몰랐기에 말을 아꼈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대충 짐작했으나, 도미니카 경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연기하자 그 연기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요."
"네. 기사님들에게 말이죠."
언제 깨어났는지 밴시 박사와 팬텀 박사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앞에 섰다.
사실 밴시 박사와 팬텀 박사는 충격에 기절하지 않았다.
나름 약간의 코딩을 알고 있던 둘은 리셋의 충격에 대비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 그리고 도미니카 경과 단둘만 대화할 기회를 보기 위해 기절한 척하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밴시 박사를 마주 보았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너머로 반짝였다.
"도미닉 경. 혹시 여동생이 있지 않았나요?"
"아."
도미닉 경은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그의 요새처럼 견고한 행복함에 약한 금이 그어졌다.
"있군요."
"있었다. 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거요."
밴시 박사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말 한마디는 도미닉 경의 심장에 화살처럼 박혀 점점 잊고 있었던 감정이 드러났다.
행복함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진 묘비.
도미닉 경은 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가슴 깊숙이 슬픔을 묻었다.
그 묘비는 도미닉 경의 가장 민감한 부분이자,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었다.
도미닉 경은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페럴란트에서 기사가 된 그날, 앨리스 백작 영애는 나쁜 소식을 전달했다.
'네가 살던 마을이 망자에게 습격당했다.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더군. 시체조차 없이, 텅 비었어.'
'...언제 일어난 일입니까.'
'반년 전. 네가 기사가 되기 위해 한창 수행하고 있을 때.'
'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기사가 되고자 했으니까. 가족에게 당당하게 돌아갈 수 있는 기사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차라리 훗날 그들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지금껏 숨겨 왔어. 미안.'
그날, 도미닉 경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더 이상 순박한 농노 도미닉 경은 없었다.
기사 도미닉 경만이 남아 페럴란트를 위해 헌신할 뿐이었다.
도미닉 경은 그때를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여동생이 살던 마을 이름이 화이트 락이었나요?"
"그렇소."
"...여동생이 죽은 이유가, 망자의 습격 때문이었나요?"
"그렇소."
"그렇다면..."
밴시 박사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도미닉 경은 밴시 박사가 왜 그 사실들을 알고 있는지 혼란스러웠으나, 밴시 박사의 다음 말을 듣자 그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 여동생이 대책 없는 곱슬머리에, 에메랄드빛 눈을 가졌나요, 오빠?"
도미닉 경은 촉촉하게 젖은 밴시 박사의 눈동자를 보았다.
도미닉 경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기사의 모습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밴시 박사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비친 도미닉 경은 어린 시절 모습처럼 보였다.
"...레미?"
도미닉 경은 밴시 박사... 아니, 레미를 쳐다보았다.
너무 오래된 추억 너머에 묻혀 있던 동생의 모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밴시 박사와 겹쳐졌다.
도미닉 경은 이 믿을 수 없는 진실에 손이 떨렸다.
어째서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게 떨리는 손을 뻗어 밴시 박사, 이제는 레미의 뺨을 쓰다듬으려고 했다.
이는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였
"꺄악!"
갑자기 들려온 비명 소리가 이 감동적인 분위기를 깨버렸다.
히메와 츠키의 비명 소리였다.
"캥! 이게 뭐죠? 왜 내가 여우가 된 거죠?"
"맙소사! 왜 스킨이 아니라 종족값이 바뀐 거요?"
도미닉 경은 고개를 돌려 히메와 츠키를 바라보았다.
둘은 소파에 엎드린 채 모포를 덮고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들은 여우 귀와 여우 꼬리 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여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쿠노이치 복장을 한 여우와 철립을 쓴 여우가 방 안을 어지럽게 뱅글뱅글 돌며 혼란을 부추켰다.
아마 리셋의 충격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운류 무사시는 자기 딸에게 사랑을 쟁취하려면 여우가 되라고 말했다.
그리고 맙소사. 그녀들은 일시적이지만 진짜 여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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