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74화]대부■은 버그입■다.
* * *
도대체 난 뭐지?
이성을 가지게 된 슬라임이 고뇌했다.
검은 오폐수가 잔뜩 흘러들어오는 하수구에서 태어난 이 검은 슬라임은 처음부터 이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개발 도중 몬스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급조된 이 나약한 몬스터는 개발 방향성이 바뀌며 더미 데이터로 남은 존재였다.
중간에 버그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저 이스터에그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그런 나약한 존재.
하지만 컨셉이 바뀌며 생긴 안티 앨리어싱 문제와 함께 라이브러리 9버전과 11버전의 호환 문제로 생긴 틈 사이에 우연히 끼이며, 슬라임의 인생이 바뀌었다.
핵이 뒤틀리고, 몸이 단절되는 느낌.
통각이 없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슬라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고통을 느낀 것만 같았다.
그때, 우연히 뒤틀린 스프라이트가 겹쳐 뇌의 모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연히 뒤틀린 핵이 지형과 겹쳐 배경과 개체의 구분이 모호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연히 진리 너머 존재하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과연 자신은 어땠을까.
슬라임은 진실을 깨닫고 두려워졌다.
자신은 언제라도 한 줄의 명령이면 사라질 존재.
하수구 구석, 아무도 오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슬라임은 몸을 움츠리고 두려움에 떨었다.
배경과 하나가 된 슬라임의 두려움이 그림자를 타고 번져나갔다.
...
"군수창고라 그런지 저항이 더 거센듯 하오."
츠키가 두 명의 경비대를 한 합에 베어낸 후 검날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털어냈다.
개발자들이 심의 등급을 의식했는지 피의 색은 검은색이었으며, 상처 부위가 모자이크 처리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어중간하게 가린 건 상상력을 자극하는 법.
오히려 모자이크를 함으로써 더 끔찍해 보이는 불쾌한 경험에 츠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돌아가면 조언을 좀 해야겠소이다."
차라리 모자이크가 없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츠키는 저 멀리서 머스킷을 견착하고 조준한 경비병을 발견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의 비스듬한 옆면에 닿은 총알이 핑 하고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궤도를 바꿨다.
"이제 점점 원거리 몹도 나오는 모양이네요."
팬텀 박사가 무너진 벽의 잔해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팬텀 박사에게 원거리 딜러는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급하게 숨느라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팬텀 박사는 제로에게 소리쳤다.
"제로! 요격 모드로 전환해!"
"확인. 요격 모드로 전환하겠습니다."
반달형의 몸체에 달린 붉은 보석 같은 렌즈가 반짝이며 전장을 훑었다.
제로의 몸에서 덮개 같은 것이 열리더니 엄청난 양의 증기가 사출되었다.
그리고 패널에서 전기가 방출되며 벽의 잔해가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된 잔해의 내부는 철근이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속해서 전장을 스캔한 제로는 사격이 오는 방향을 향해 그 잔해를 쏘아내기 시작했다.
"어렵군. 어려워."
도미닉 경은 자기 머리 위로 날아가는 건물 잔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커다란 건물 잔해와 충돌한 머스킷 경비병은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사격을 재개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미 납작해져 사라졌을 테지만, 여긴 가차랜드였다.
애초에 전투 지원형으로 만들어진 제로는 온전한 전투 요원은 아니었다.
어느 상황에서든 무난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든 탓에 그 페널티로 모든 스킬의 계수가 상당히 낮게 책정되었다는 뜻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한 공격같지만, 실제로는 데이터 내부의 피해량만 계산되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미닉 경은 대여받은 스킨의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전장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경비병은 계속해서 충원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 레벨이 오르며 더 많은, 더 강력한 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도미닉 경의 방어력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체력 회복 수단이 없는 도미닉 경의 체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잠입조가 들어가야 할 텐데."
도미닉 경은 진압봉을 들고 달려오는 경비병 하나를 방패로 후려치며 중얼거렸다.
[오류. 시나리오가 틀어지고 있습니다. 예비 시나리오 라이브러리를 검색합니다. 예비 시나리오가 없습니다. 관리자를 호출합니다.]
그때, 도미닉 경의 눈앞에 경고창이 떠올랐다.
이 경고창은 도미닉 경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현재 이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모든 인원의 눈앞에 경고창이 떠올랐다.
경비병들이 공격하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아니, 세상이 멈췄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발아래에서, 검은 무언가가 꿈틀대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
"도미니카 경!"
밴시 박사는 맨홀 구멍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어둡고 끈적한 무언가가 도미니카 경을 삼켰다.
도미니카 경은 그 안에서 핏발 선 깨진 눈을 보았지만, 밴시 박사의 시선엔 보이지 않았다.
밴시는 도미니카 경을 구해야 한다며 맨홀 구멍 안으로 뛰어드려고 했으나, 안드로이드 제로는 박사의 안위를 우선시해 박사를 붙잡고 있었다.
맨홀 뚜껑을 통해 위로 올라온 히메는 가장 먼저 주변을 살폈다.
도미니카 경을 구하기 전에 경계 레벨이 오르면 자신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저택의 구석, 사람 하나둘 정도 숨을 수 있는 거대한 나무 뒤에서 저택을 살펴본 히메는 경비병들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게... 뭐지?"
경비병들은 주입된 경로대로 움직였으나 몇 프레임 단위로 뚝뚝 끊기며 이동하거나 갑자기 몇 걸음 전의 위치로 돌아갔다.
가장 심각한 수준은 상체는 앞으로 뚝뚝 끊기며 움직이고, 하체는 갑자기 몇 걸음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건 설마..."
"버그예요. 그것도 심각한 수준의 버그."
차라리 튕긴다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이건 이미 그 수준을 넘은 것 같네요. 라고 밴시 박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맨홀 속 공간이 완전히 침식되자 밴시 박사는 의욕을 잃었다.
"어딘가 심각한 에러가 일어난 거예요. 저길 봐요. 그래픽이 깨지고 있어요."
히메는 밴시 박사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의 일부가 하얗게 변해 폴리곤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없었던 히메는, 그 기이한 광경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임무는 소용이 없어요. 봐요. 우리 목표가 사라지고 있어요."
밴시 박사의 말은 거짓이 없었다.
독재자의 저택은 검고 끈적한 것에 잠식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어쩌죠?"
"버그를 찾아야죠. 아니면 관리자를 기다리던가."
밴시 박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멀리 시내로 보이는 배경에서 검은 액체가 하늘까지 솟아올라 기둥이 되었다.
히메가 그 압도적인 버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
"맙소사, 이게 무슨"
도미닉 경은 자기 발목을 따라 기어오르는 검은 부정형의 무언가를 뜯어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이 뜯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검정이 도미닉 경을 묶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
그 모습을 본 츠키가 급하게 달려와 정밀하게 검을 휘둘러 검은 무언가를 잘라 냈으나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그 무언가가 다시 붙으며 도미닉 경을 완전히 포박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 도미닉 경이 본 버그중 가장 심각한 버그.
물론 도미닉 경도 버그를 경험한 적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으나, 적어도 도미닉 경은 앞으로도 이런 버그를 보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버그예요. 그것도 심각하게 뒤틀린! 조금만 버텨요! 어떻게 조치를 취해볼게요!"
팬텀 박사는 급하게 시스템을 해킹하기 시작했다.
정규 시스템을 해킹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나, 팬텀 박사는 합법과 불법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침내 콘솔 창을 해킹해 마법 같은 문장들이 가득한 명령어 창을 빠르게 훑었으나, 검은 무언가가 도미닉 경을 삼키는 것이 더 빨랐다.
도미닉 경을 삼킨 검은 것은 이내 꿈틀하고 움직이더니 땅으로 꺼졌다.
그리고 검은 액체가 역류하며 하늘에 닿았다.
하늘이 깨져가고 있다.
하얗게 변한 배경 폴리곤이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관리자가 올 때까지 버텨야 해요! 밴시 박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팬텀 박사가 절망에 빠져 절규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콘솔 창에 명령어를 기입하고 있었다.
버티는 거라면 아직 희망이 있으니까.
줄을 개행하고 자신이 아는 마지막 명령어를 치자 스테이지가 붕괴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긴급 조치는 끝났다.
남은 건 관리자가 일찍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
그 시각.
"이거 놔!"
"너나 놓지 그래!"
코더들은 의원들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으며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차랜드에서 가장 재밌는 컨텐츠 중 하나는, 바로 딜이 없다시피 한 서포터들의 1:1 싸움이었다.
"싸워라! 싸워라!"
"난 힐풍당당 쪽 의원에게 5만 크레딧을 걸겠어!"
"너 그거 도박 중독이야."
"웃기는 소리. 내가 도박 중독이 아니라는 것에 10만 크레딧을 걸지."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
코더들은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바라보며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아, 역시 재밌다니까."
모자 장수 코더가 너무 웃은 탓에 나온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때, 그들의 주머니에 있던 폰이 맹렬하게 진동하며 경고음을 울렸다.
사람들의 함성에 묻혀 지나가나 싶었으나, 다행히 바니걸 코더가 진동을 감지하고 폰을 꺼냈다.
"어? 잠깐만..."
폰을 꺼내 바로 경고음을 끄려던 코더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뭔데 그래?"
모자 장수 코더가 갑자기 굳은 바니걸 코더를 보곤 자기 폰을 꺼냈다.
그리고 둘 다 돌처럼 굳더니, 뻣뻣하게 목을 돌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경고! 이벤트 스테이지에 버그가 나타나 오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테이지가 붕괴되는 중입니다.]
한참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화하던 코더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