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69화]작전명 : S.P.Y
* * *
자기가 뽑은 카드에 싸인해 달라는 열혈 팬을 만난 이후,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침대를 하나 구입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원래 모습과 도미니카 경이 꾸민 모습이 절반씩 섞인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도미닉 경의 방에서 갑옷을 벗어 침대 옆에 둔 도미니카 경은 막 설치된 새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내일 일정에 대해 말을 꺼냈다.
"오면서 이벤트 공지를 다시 봤는데, 평행세계의 사람끼리 만나면 할 수 있는 스테이지가 있더라고."
원래 하얀 티셔츠였으나 낡고 오래되어 약간은 누런빛이 도는 셔츠 너머로 도미니카 경의 존재감이 폭발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관능적인 모습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세계선은 달라도 결국 하나였으니까.
이는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였다.
"이벤트 스테이지라. 그쪽 공지엔 어떤 스테이지인지 적힌 것 없소?"
"없어. 그냥 스테이지가 있다고만 적혀 있을 뿐, 자세한 내용이 없네."
도미니카 경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아직 깃털 장식을 꽂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깃털 장식을 마저 해제하고 침대에 드러누운 도미니카 경은 이벤트 스테이지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별일없으면 이벤트 스테이지나 찾아보자. 너도 나도 선거 이벤트는 별생각 없을 것 아냐."
"그건 그렇소. 그나저나 장소도 적혀 있지 않으니 찾는데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구려."
도미닉 경도 갑옷을 벗어 방 한 켠에 거치된 갑옷 거치대에 올려 두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둘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너도 침대에 오지 그래?"
도미니카 경이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푹신한 침대를 툭툭 쳤다.
"아쉽게도 침대가 너무 푹신해 보여서 말이오. 아직은 좀 불편한 게 오히려 편하오."
도미닉 경은 그 제안을 사양했다.
실제로 그는 가차랜드에서 불편한 밤을 보내며 오히려 그 불편함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뭐, 여자로 보이는 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발정하는 사람이 있을까."
도미니카 경의 도발에 도미닉 경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둘의 가치관이 갈렸다.
전투 수녀이자 기사로 살아오면서 전장에서 숱한 성희롱을 받아온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답답한 기사도 정신이 신선했다.
반면 농노에서 기사가 된 도미닉 경은 주변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정석적인 기사도와 고귀한 태도를 유지했다.
전투에 들어서면 각자의 본성이 깨어나 도미니카 경은 기사처럼, 도미닉 경은 짐승처럼 굴었으나 평소에는 이렇게 반대인 것이다.
"아무튼, 내일은 이벤트 스테이지를 찾아보는 거야. 알겠지?"
"몇 번을 말하며 강조하지 않아도 내일은 이벤트 스테이지를 할 거요."
도미니카 경은 하던 말을 계속 반복했다.
이는 도미니카 경이 푹신한 침대의 마력에 빠져 점점 잠이 오는 탓이었다.
졸린 탓에 생각이 뚝뚝 끊기기 시작한 도미니카 경은 이내 침대에 온몸을 맡기고 푹신함을 만끽했다.
이내 잠깐 시야가 암전이 된 도미니카 경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조금씩 눈이 무거워지는 걸 보니 잘 때가 된 듯했다.
일단 자고 생각해보자. 라는 생각을 끝으로, 도미니카 경은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잠이 들었다.
"거참, 우렁차게도 고는군."
도미닉 경은 갑자기 천둥처럼 몰아치는 코골이 소리에 놀라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니카 경은 무방비한 상태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기사의 품격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태도.
그러나 도미니카 경은 저래보여도 기사였기에,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명예를 지켜 주기로 했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이 걷어찬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주며 거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도미니카 경은 여성이었고, 여성과 같은 침대를 쓰는 건 도미닉 경의 마음속 기사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미닉 경은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
깊은 밤, 히메사이고 성.
"기습은 통하지 않습니다, 히메 공!"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너무 검이 정직하군요, 츠키 공!"
히메사이고 성 깊숙한 곳에 있는 연무장에서 방랑무사와 쿠노이치가 격돌하고 있었다.
만월이 뜬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빛나는 연무장 바닥에 둘의 땀방울이 흩날리며 반짝거렸다.
망사와 천으로 된 쿠노이치 복장을 입은 히메는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뒤로 빠지며 허리춤에 숨겨둔 수리검을 던졌다.
수리검은 정확히 방랑무사의 심장을 노렸으나, 방랑무사가 든 커다란 도의 옆면에 막혀 튕겨 나갔다.
"사도는 정도를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히메 공."
얇은 철립을 쓰고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타이즈를 입은 방랑무사 츠키는 검을 옆으로 한 번 털어내고 검집에 납도했다.
그녀의 허리춤에 묶어놓은 기모노의 소매가 달빛 아래서 휘날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당신의 사도는 정도를 걷는군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다니, 구시대적인 발상이로군요, 츠키 공."
히메는 연무장 구석에 심어진 나무 위에 착지했다.
그녀의 머리 위, 나무 꼭대기에 만월이 걸려 있었다.
"어떤 기술이든 정직하게 수련하면 정도요, 편법을 쓰면 사도인 법입니다."
히메는 손을 쥐었다가 반쯤 고양이손처럼 펼쳤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수리검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과연. 한 수 배웠습니다. 히메 공."
방랑무사 츠키는 철립의 끝을 잡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철립 아래 흘러내린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예우로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검 중 아직 뽑아낸 적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당장에라도 격돌할 것 같이 긴장된 상황.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가 연무장에 회오리치며 흩날렸다.
"그만! 멈추거라."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연무장 바닥에 진동이 일어났다.
히메와 츠키는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았다.
붉은 갑주에 허리에 찬 세 자루의 긴 검. 그리고 악귀의 모습을 한 가면.
당주 운류 무사시였다.
"너희의 호승심은 잘 알겠으나, 과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
검을 땅에 꽃은 채 양손을 손잡이에 얹고 있던 운류 무사시는 갑자기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옮기고 한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무엇보다 무기를 쓰는 일은 항상 신중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운류 무사시의 분위기가 변했다.
방금 전까지의 무사시가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한 무사의 표본이었다면, 지금의 무사시는 침착하고 눈치가 빠른 낭인의 표본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히메가 나무에서 내려와 연무장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츠키는 오른손을 주먹쥐고 왼쪽 가슴에 올린 채 목만 숙였다.
당주에 대한 예의를 받은 무사시가 손을 들어 올렸다.
"됐다. 이 아비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지 않냐."
"언제부턴가 우리 딸이 애교도 없어져서 얼마나 슬픈지 아느냐."
무사시의 악귀 가면에서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나왔다.
그 말에 히메와 츠키는 고개를 들고 당주... 아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이렇게 빨리 만났구나."
"우리는 처음 마주쳤을 때가 언제였더라?"
무사시의 절반은 절도를 지키며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허리춤에 찬 호리병을 들고 안에 든 술을 마셨다.
"아무래도, 비슷한 상황이니 비슷한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부끄럽지만 동의하는 바입니다, 아버지."
이 쿠노이치와 방랑무사는 둘 다 누군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 저번에 말했듯이 신경 쓰이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뭐라고! 츠키는 나에게 그런 말 안 했는데! 누구냐! 누굴 좋아하는지 말해!"
무사시의 말은 상반되었으나 둘 모두 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말이었다.
"내가 말했듯, 사랑을 쟁취하려면 여우가 되어야 한다. 퐉스. 알겠지?"
"여우는 무슨! 누구냐! 여우가 간 뜯어먹듯 우리 딸을 꼬신 놈이 누구냔 말이다!"
무사시는 이성을 잃고 날뛰는 반쪽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더니, 이내 손날을 들고 자기 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잠깐 무사시의 머리가 꺽이더니,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이 아비는 너의 사랑을 응원한단다. 사랑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더냐."
"네. 아버지."
"네."
히메와 츠키는 여우가 되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나저나, 이벤트 스테이지가 있다고 하더구나."
분위기가 진지해졌다고 느꼈는지, 무사시는 분위기를 전환할 겸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나는 아쉽게도 한 몸이라 이번 이벤트를 포기한다만, 너희는 한 번 경험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메와 츠키가 고개를 들어 무사시를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어제 점을 봤는데, 우리 딸이 곧 인연을 만난다는 점괘가 나오더구나. 인연은 가만히 있어선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너희는 꼭 이번 스테이지를 겪어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히메와 츠키가 고개를 숙여 당주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던 무사시는 잠시 자기 딸과 평행세계의 딸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다시 성안으로 돌아갔다.
가면 너머로 무사시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내면에 있던 무사시도.
무사시가 성으로 돌아가자, 히메와 츠키는 고개를 들었다.
둘은 머리스타일과 복장만 다를 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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