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5화]마이 리틀 유니버스
* * *
가차랜드에서 뽑을 수 있는 캐릭터 카드는, 보통 그 안에 들어있는 데이터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개척자들은 이런 데이터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캐릭터가 괜찮고 뽑지 않으면 분명 속이 뒤틀릴 것 같이 성능이 좋다?
절대로 가져야만 속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좌들은 조금 다른 이유로 캐릭터 카드를 뽑았다.
일종의 팬심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특전이라고 해야 할지.
개척자들이 현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데이터에 중점을 둔다면, 성좌들은 이런 캐릭터 데이터로 외부에서 돌릴 수 있는 게임에 넣어보거나 그저 소장용으로 얻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성좌라면 그 세계에 데이터를 넣어 더 풍부한 재미를 추구하는, 이른바 '나만의 작은 세계'를 완성시키는 한 걸음이 되는 것이다.
서로 이유는 달랐으나, 원하는 카드에 대한 집착은 누가 더 절실한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이유로, 카드 팩 거래소는 현재 엄청난 광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왜 나만 운 없어? 왜 나만 운 없어? 왜 나만 운 없어?"
"천장을 24번 쳤는데, 시계도 24번 종치면 하루가 지나는데 왜 하나가 안 나와?"
"도미닉 경은 존재한다! 찾아봐라! 그 곳에 도미닉 경을 두고 왔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못 뽑... 못 뽑아도... 행복..."
그리고 광기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카드팩의 잔해에 파묻혀 있는 상태였다.
"저것들 왜 저래?"
혼잡한 거래소에 들어선 한 성좌가 이 엉망진창인 상황에 놀라 소리쳤다.
"이번에 새로 나온 카드가 더럽게 안 나오는 모양이야. 탱커라 그런가?"
"그래? 참, 세상 어렵게 산다."
모든 이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무조건 이기는 것이 즐기는 것이다.
그냥 즐기는 사람이 승자다.
가차랜드에서 통용되는 이분법.
전자의 사람들은 도미닉 경 카드를 뽑기 위해 왕궁의 기둥뿌리를 뽑을 정도로 달렸으나, 후자의 사람들은 그저 적당한 선에서 멈췄다.
그저 이벤트 기간이라 가볍게 즐기려고 거래소를 찾은 이들.
"내 차례네. 아담한 미소녀 카드가 나왔으면 좋겠다. 요즘 너무 빵빵한 여캐만 넣었더니 좀 부담스럽더라고."
"하긴. 로리가 성능캐긴 하지."
가볍게 웃으며 거래소 창구로 이동하는 성좌들.
운명은 참 잔혹하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속삭이면서,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미끼처럼 행운을 던져 준다.
단지 10연차만 지른 성좌의 팩의 틈새 사이로 찬란한 무지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SSR 확정이네. 성좌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기 서명하세요."
요즘 트렌드대로 카드 팩에 별 모양 서명을 기입하자, 카드팩이 열렸다.
이게 또 매력적이란 말이지.
성좌는 이펙트를 스킵하지 않고 카드팩이 공개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중복된 데이터는 등장 연출이 스킵되기에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연출이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열린 카드 팩에서 찬란한 무지개 빛이 흐르며 카드가 나타났다.
하늘에 뜬 10개의 카드.
성좌는 두 눈을 부릅떴다.
무려 3개나 되는 금색 카드와 2개의 무지개 빛 카드.
딱 봐도 잘 뜬 상황.
성좌는 떨리는 손으로 아무 빛도 없는 카드를 하나하나 눌렀다.
[★ 짐꾼 하인스][1코스트]
[★ 짐꾼 하인스][1코스트]
[★ 짐꾼 하인스][1코스트]
[★ 짐꾼 하인스][1코스트]
[★ 개암3동의 자랑 박춘배][2코스트]
역시나. 언제나 스타터 팩을 까면 나오는 이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여길 봐야겠지.
찬란한 무지개 빛 두 장은 마지막으로 넘기고, 금색 카드 3장을 뒤집었다.
그러자, 갑자기 암전되는 시야.
갈색과 연갈색의 선이 지나가더니, 암전된 화면에 새로운 문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소. 행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오. 신캐인가?"
성좌는 새로운 캐릭터의 연출을 유심히 보았다.
색색의 깃털.
한쪽을 안대로 가린 눈.
눈 내리는 요새.
등 뒤로 휘날리는 깃발.
마침내 땅에 방패의 아랫부분이 탕. 하고 찍히며 화면 전체가 드러났다.
눈이 휘날리는 설원의 요새를 배경으로 방패를 짚고 선 기사.
"반갑소.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성좌는 그 장면을 보며 꽤 정성 들인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도미닉 경의 그림은 숨을 쉬듯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으나, 요새 뒤로 지나가는 거대한 우주 전함이나 요새에서 움직이는 조연들 하나하나가 뭐랄까, 소위 뽕이 차오르게 만들었다.
"괜찮네."
사실 이 성좌는 도미닉 경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고, 알았더라도 자신이 뽑을리 없다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뽑은 이상 밥값은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뒤에 있던 이들은 도미닉 경이 얼마나 화제의 캐릭터인지 알고 있었고, 이내 부러움과 질시, 제안과 협박이 혼재된 아포칼립스가 일어났다.
"이봐! 그 카드 내게 팔아. 가차석이 부족하긴 한데, 돌아가면 3성 카드를 10장 주지!"
"겨우 10장? 나는 30장도 줄 수 있소!"
"가차석이랑 교환할래요? 포인트랑 교환할래요?"
"맞고 싶지 않으면 당장 내게 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성좌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성좌를 포위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카드 팩 거래소에는 이런 고객들의 안전장치도 존재했다.
"여기로 오시지요!"
창구 너머에 있던 엘프 직원이 급히 성좌를 창구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다른 이들이 창구를 넘어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창구에 생긴 배리어가 그들을 막아주었다.
"세상에."
성좌는 예전에 봤던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에서나 본 장면을 눈앞에서 생생히 관전할 수 있었다.
"도대체 저들이 왜 이러는 거요?"
"그야, 성좌 님께서 뽑으신 카드가 엄청 유니크한 상태라서 그래요."
"유니크하면 얼마나 유니크하다고."
"확률이 소수점 7자리까지 내려가거든요."
"..."
성좌는 저들이 왜 이렇게 광분하는지 이해했다.
"아무튼, 안전을 위해 뒷문으로 나갈 겁니다. 뒷문이 열리는 곳은 매 번 달라지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분간은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엘프 직원은 그렇게 말하며 도미닉 경을 뽑은 성좌를 비밀문으로 데려갔다.
"와 부럽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또 하나의 성좌.
소녀의 모습을 한 성좌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을 뽑은 성좌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대기표를 미리 받아둔 상태로 가차석을 교환하러 갔다 왔기에, 자기 차례에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남은 카드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기 도미닉 경을 뽑기 위해 국가 예산급 가차석을 지르는 이들을 보니 뽑을 자신이 사라졌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낙담하기엔, 도미닉 경의 팬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임 낫 리틀은 방금 만났던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을 떠올렸다.
레이디 도미니카라고 했던가.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니카 경을 처음 봤으나, 순간 도미닉 경을 향한 팬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굳은 의지의 성좌, 아임 낫 리틀은 자기 원픽은 도미닉 경이라며 상념을 지웠다.
잠깐, 도미니카 경이 평행세계의 도미닉 경이라면, 결국 도미닉 경의 팬인 셈 아닐까?
무엇보다 왜 꼭 하나만 픽해야 하지? 둘 모두 팬으로 남으면 안 될까?
그녀의 내면에 있던 본능이 속삭였다.
아냐, 도미닉 경의 팬이 된 이후로 얼마나 돈을 썼니? 도미니카 경의 팬까지 하려면 얼마나 더 써야 하니?
그녀의 이성이 간언했다.
그러고도 네가 도미닉 경의 팬이야? 도미닉 경의 팬이라면 도미닉 경의 파생캐릭터도 좋아해야지!
본능이 말했다.
아직 도미니카 경은 멋진 모습 한 번 보여 준 게 다잖아.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얼마나 멋졌는데!
이성이 이성을 잃고 말했다.
으, 세상에. 아임 낫 리틀은 고개를 흔들었다.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게 다 이벤트 탓이다.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아임 낫 리틀은 방송이 조금 더 커져서 지갑이 넉넉해지면 그때부터 도미니카 경도 같이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미닉 경의 팬으로 있으면서 쓰는 돈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미안해요, 도미니카 경!
"저, 손님? 자리에 앉으시지 그러냥?"
아. 아임 낫 리틀은 자신을 부르는 고양이 수인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차례가 왔음에도 너무 집중한 나머지 멍하게 서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아임 낫 리틀은 뻔뻔하게 자리에 앉았다.
"무슨 팩 원하냥?"
고양이 수인은 말끝에 냥을 붙여야 한다는 그 무슨 법이 있었다.
가끔 반말을 섞는 고양이 수인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고양이가 그렇지 하며 넘어가는 편이었다.
아임 낫 리틀은 부끄러운 탓에 고양이 수인의 반말에 신경쓰지 못한 것이었지만.
대신, 자신이 원하는 팩을 말했다.
"그, 스타터 팩이랑 기사 팩 남았나요?"
방에서 방송만 하던 성좌는 오랜만에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어색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하고 대화할 때에도 부끄러워서 도망치지 않았던가.
다행스럽게도 이 고양이 수인 직원은 프로였다.
"한참 있다냥. 그걸로 주면 되냥?"
"[스타터 팩 MMCIV], [기사 팩 CLII] 이만큼 주세요."
아임 낫 리틀은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팩을 말했다.
뜻밖에 잘 알려지지 않은 꿀팁이지만, 그냥 스타터 팩이나 기사 팩이라고 말하면 예전에 쌓인 재고와 섞인 채로 나왔다.
정확하게 뒤의 내용을 붙여야 좀 더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거래하는 사람이 왔구냥."
고양이 수인은 가차석을 받고 그만큼의 팩을 넘겨주었다.
스타터 팩이 넷, 기사 팩이 셋.
총 7팩, 70연차.
아임 낫 리틀은 심호흡하고 첫 번째 카드 팩에 서명했다.
운명은 참 잔혹하다.
그러나 가끔, 운명은 간절한 이에게 적선하듯 보상을 내린다.
"세상에..."
아임 낫 리틀은 새어 나오는 금색 빛에 조금 실망했으나, 도미닉 경은 금색 카드였다.
차라리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라고 생각한 성좌 아임 낫 리틀은, 개봉하자마자 10장의 금색 카드가 떠오르는 걸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가 열리고 둘이 열렸을 때, 아임 낫 리틀은 입을 틀어막고 감격에 찬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셋이 열렸을 때, 환호성을 내질렀다.
[★★도미닉 경][5코스트]
[★★ 도미니카 경][5코스트]
[★★ 도미닉 경][5코스트]
...
다시금 말하지만, 운명은 잔혹하다.
그러나 때때로, 간절한 이에게 행운을 넘어선 보상을 내린다.
아임 낫 리틀은 눈 앞에 떠오르는 연출을 멍하니 바라보며 도미닉 경에게 감사하고, 도미니카 경에게 감사했다.
분명히 둘과 만났던 탓에 오늘의 행운이 찾아온 것이리라.
그녀는 두 사람의 열렬한 팬이 되기로 다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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