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64화]마이 리틀 유니버스
* * *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모은 가차석을 다 잃을 뻔했잖아."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참모장과 행정관과 태그 매치를 시작한 그 시각.
성좌 아임 낫 리틀은 오랜만에 들린 환전소에서 포인트를 가차석으로 환전하고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중간에 특산물 코너에 있던 증기선으로 잡아 더 쫄깃한 문어빵에 잠깐 시선이 가긴 했으나, 지금은 그 돈도 아껴 원하는 카드를 뽑을 확률을 더 높여야 했다.
"이 정도면 하나 정도는 나와주지 않을까?"
가차랜드의 카드 풀은 개수가 아닌 확률로 표기되었기에 정확한 수량은 몰랐으나 소수점 일곱 자리인 것을 보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스타터 팩과 기사 팩은 현재 그다지 인기가 없는 팩이다.
유입이 적은 가차랜드 특성상 스타터 팩은 가끔 추억에 잠길 때 까는 팩이었고, 기사 팩은 현재 메타에 어울리지 못 하는 틀딱들이라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던 탓이다.
도미닉 경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분명 팩의 재고는 충분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성좌는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가차랜드에 들어오기 위해 성좌의 힘 대부분을 봉인한 탓에 소녀보다 더 소녀다운 힘만 남은 아임 낫 리틀은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잠깐 쉬기로 마음먹은 성좌 아임 낫 리틀은 폰을 꺼내 SNS에 들어갔다.
쉬는 동안 어떤 일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지금 카드 팩 거래소 역대 최고 호황!'
'산더미 같은 카드, 그러나 얻지 못한 카드.'
'지금 큰 손들 출몰! 스타터 팩을 가차석 백만 단위로 산 사람 나옴!'
"아."
SNS는 지금 카드 팩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SNS를 확인한 아임 낫 리틀은 다시 일어나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거래소를 향해 뛰어갔다.
큰 손들이 움직였다.
지금은 쉴 때가 아니었다.
...
카드 팩 거래소의 입구.
"여기서 부터 이틀입니다! 홀수 번호표를 받은 분은 내일 확장공사와 함께 그쪽으로 가주시면 됩니다!"
조악하게 만든 팻말을 든 이가 소리쳤다.
거래소는 한 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큰 곳이었으나 새로운 카드 풀과 이벤트 기간이라는 호재가 겹쳐 대기열이라는 악재가 생기고 말았다.
"지금 긴급하게 거래소 서버를 증설하는 중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좀 더 쾌적하게 입장하실수 있습니다!"
직원이 외치는 말은 사람들의 귓등을 타고 공허하게 흘러 갔다.
사람들의 눈엔 핏발이 서 있었고, 두 손에는 가차석이 부서져라 주먹을 쥔 채 광기 어린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닥치고 내 돈 가져가! 돈은 충분히 있다!"
"전능하신 선지자님이시여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전능하신 선지자님이시여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그야말로 집단 광기의 현장.
그나마 대기열의 초반, 그러니까 곧 거래소에 입장할 수 있는 이들은 나은 편이었다.
"지금 대기열 다시 서면 3만 가차석을 주지!"
"아저씨, 나랑 자리 바꾸지 않을래요? 에픽 아이템 드릴게."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은 편이지,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대기열이 생기자 벌어진 일.
평소의 카드 팩 거래소에도 사람은 많았지만 거래소의 규모가 큰 탓에 한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오늘만큼 거래소가 이토록 작아 보인 적은 가차랜드의 역사를 봐도 100번이 채 되지 않았다.
이벤트를 의식해 거래소의 서버를 평소의 두 배로 돌리고 있었으나 여전히 대기열은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대기열에 선 방독면의 사내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새로운 카드가 카드 풀에 추가된 것이 몇 년 만이더라?"
"말은 제대로 해, 지휘관 씨. 정확하게는 새로운 탱커가 추가된 거지."
방독면의 사내 뒤에 있던 기괴한 보라색 피부의 사내가 말했다.
"아, 총독 씨. 오랜만이네. 당신 요즘 공포의 사막 이벤트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러는 지휘관 씨야말로 프로젝트 정크 기어 복각 시기 아니던가? 한창 바쁠 때 여기 있다니, 순위는 괜찮아?"
두 기인은 치열하게 기 싸움을 벌였다.
이들을 지칭하는 명칭은 다양했다.
지휘관, 선생님, 총독, 교장, 스승님, 제독...
그러나 가차랜드에서 이들을 묶어 부르는 호칭은 개척자였다.
자신 만의 카드 풀을 모아 제대를 꾸려 가차랜드 외부를 탐사하고 개척하는 이들.
그리고 항상 컨텐츠가 부족하다며 투덜거리는 이들.
캐릭터로서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일반 시민들과 달리, 다양한 이들을 한 데 묶는 놀라운 카리스마로 자기 가치를 증명하는 이들이었다.
"당분간은 클랜에서 도와주기로 해서 말이야, 총독 씨."
"나도 이미 이벤트를 끝마쳤으니 소탕만 돌리면 된다고."
둘은 어떻게 보면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성장해 비슷하게 개척자가 된 이들.
그런 이들이었기에 서로에 대한 존중도 있었으나, 그만큼 적대감과 혐오감도 있었다.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방독면을 쓴 이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손이 향한 장소에는 금으로 장식 된 권총이 있었는데, 조금만 더 도발당하면 쏠 생각이었다.
보라색 피부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뒷짐 진 손에 몰래 채찍을 들었다. 여차하면 손목에 휘둘러 무장 해제를 시키리라.
서로를 잘 아는 탓에 서로의 수가 훤히 보였으나, 그들은 그저 앞에선 웃으며 뒤로 찌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냉전은 유혈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마침 그들의 차례가 돌아왔기 때문에.
"다음 열 분! 다음 열 분 입장하겠습니다!"
거래소 안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외치는 소리에 둘은 맥이 빠진 듯 각자의 무기를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원하는바가 비슷한 것 같은데, 내기 하나 하는 게 어때?"
"내기라,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지휘관."
둘은 입장하기 전, 간단한 내기를 걸었다.
당연하게도 원하는 카드를 먼저 뽑는 사람이 승리.
그사이에 얼마나 자금이 들어도 상관없었다.
이 가차랜드에서 가장 가차석이 많다고 자부하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들은 오늘 카드 팩의 확률을 보고 수백만 단위의 가차석을 쟁여놓은 상태였다.
"원하는 카드. 도미닉 경. 맞지?"
"잘 아는군. 너도?"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인 동의.
이제 가차석으로 가차석을 씻는 무의미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둘은 각자 직원이 안내해 준 자리로 향했다.
총독은 가는 도중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오냐? 하나, 둘, 셋, 야! 안 나왔다! 흐흐헤헤!"
원하는 카드가 나오지 않아 미쳐가는 사람들.
"이건 다 제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겁니다."
라며 카드 팩 하나를 살 때마다 목숨을 제물로 한 번 죽었다 살아나는 사람.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시오."
웬만한 건 다 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가차석을 무작정 들이붓는 사람.
그 외에도 눈을 감고 카드를 까는 사람, 직원에게 대신 까달라고 부탁하는 사람, 그사이에서 그냥 카드 하나 사러왔다가 휩쓸린 사람...
그야말로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총독은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봤으나, 생각해 보니 이제부터 자신도 저들과 같아질 것이다.
아니, 저들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지.
편집증 적인 수집가 기질이 있는 총독으로서는 쓰지 않아도 모든 카드를 얻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아마 오늘 얻지 못 하는 순간, 장기를 팔아서라도
"어서 오세요! 밖이 좀 혼잡하죠? 그래도 일찍 오셔서 다행이네요!"
수염이 엄청난 드워프가 환한 접대용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느샌가 자신은 거래소 창구 앞에 앉아 있었다.
드워프는 바로 전 사람이 까고 버린 카드 팩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그래, 무슨 팩을 드릴까요? 오늘의 추천 팩은 아르소니아의 재림"
"스타터 팩과 기사 팩. 되는 대로 다 주시오."
총독은 가볍게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10만 가차석. 부피만 따지면 1.5톤 트럭에 가득 실리는 분량.
그래서 보통 한 트럭이라고 부르는 단위를 '가볍게' 던진 것이다.
"...이거 큰 손이셨군요."
드워프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보통 가차석은 매우 귀중한 자원이기에 평범한 시민들과 개척자들은 일 년을 모아 50연차나 100연차로 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기괴하게 생긴 인물은 시작부터 10만 가차석.
분명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심'인 사람이다.
친근한 태도에서 공손한 태도로 바뀐 드워프는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10만 가차석에 해당하는 여덟 개의 팩을 꺼내 왔다.
정확하게는 96,000 가차석의 가치였으며, 스타터 팩이 넷, 기사 팩이 넷이었다.
각 팩에는 10개의 카드가 들어있었는데, 보통 한 팩을 10연차라고 부르는 가차랜드의 전통 때문이었다.
총 80개의 카드가 들어 있는 팩들.
총독은 쭉 찢어진 입을 기괴하게 뒤틀며 웃었다.
"좋아. 광란의 시간을 보내 보실까."
그러나 총독의 미소가 사라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80연차에서 원하는 카드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10만 가차석 더."
"더."
"감질나네. 50만 가차석."
총독의 재산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미 천장을 일곱 번 쳤으나, 도미닉 경 카드는 이번 픽업에서 제외되었기에 마일리지로는 바꿀 수 없는 상태.
천장이 없는 고통. 카드가 나올 때까지 지르는 인디언식 가챠법.
그러나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와! 떴다! 이거 좋은 건가요?"
총독은 바로 옆에서 환호성을 지른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짜증이 폭발해 손에 쥔 카드 팩을 내동댕이쳤다.
그의 손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도미닉 경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승리자만이 지을 수 있는 기만의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