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62화]패러렐 유니버스
* * *
도미닉 경은 가구점에서 침대를 고르던 도중 어떤 소리를 들었다.
여성의 비명 같은 찢어지는 고음.
도미닉 경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귀에 작게 들리는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분노과 공포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손님, 이게 싱글이지만 더블이나 다름없어요"
"실례하겠소. 다시오리다."
도미닉 경은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게를 뛰어나왔다.
가던 도중 썬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여성과 부딪혔으나, 도미닉 경은 죄송하다며 여성을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 달려갔다.
도미닉 경은 기사였고, 기사는 불의의 사건을 보면 지나치지 못한다.
여성의 비명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
분명히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도미닉 경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뛰어갔다.
좁은 골목을 지나 구불구불 미로같은 길을 지나치자 점점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칼과 방패, 그리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다.
전장에서 오래 있었던 도미닉 경은 그 사소한 소리를 구분할 줄 알았다.
점점 싸우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골목길을 꺾어 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겨우 이 정도야? 이 고블린만도 못한 녀석들!"
머리에 꽂은 색색의 깃털.
페럴란트 기사복을 입고 검과 방패를 든 모습.
에메랄드빛 눈. 한쪽 눈에는 안대.
그리고 미소 띤 입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뒤틀린 행복.
"당장 일어나서 싸워! 이러고도 도적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엔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이 있었다.
...흉부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달린.
도미닉 경을 그대로 여자로 만들면 저런 모습일까?
눈앞에 있는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은 굽 높은 군화로 쓰러진 도적을 질끈질끈 밟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이 황당한 상황에 잠깐 멍해졌으나, 이내 이벤트를 기억해냈다.
평행세계.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또 다른 나 자신.
분명 눈앞에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은 이벤트로 나타난 인원이리라.
"그만하시오. 기사답지 않소."
도미닉 경은 우선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는 이들을 짓밟는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을 제지했다.
"누가 내게 명령하지? 내 길은 내가 정해! ...나네."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은 도미닉 경을 바라보며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색색의 깃털을 머리에 꽃고, 안대를 했으며, 검과 방패를 든 기사.
그러나 그의 가슴은 평평했고, 대신 키가 조금 더 커 보였다.
"나 자신이라니, 아. 그렇군. 평행세계 이벤트."
또 하나의 도미닉 경도 이벤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반가워, 또 하나의 레이디 도미니카. 아니, 여기선 써 도미니카인가?"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레이디 도미니카. 또 하나의 나를 만나다니, 신기하구려."
둘은 기사다운 예법으로 통성명했다.
스스로 도미니카라고 소개한 또 하나의 도미닉 경은 신기한 표정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다른 점이라고는 성별과 성격 뿐, 나머지는 거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아 있었다.
도미닉 경도 도미니카 경이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서 고생한 티가 좀 나긴 했지만, 도미니카 경은 피부가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게다가 저 무시무시한 흉부를 보자면 전투할 때 불편하진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통 성별 전환에 대한 글을 보면 가슴은 그, 거기던데 말이야."
난데 없는 성희롱. 그러나 도미닉 경은 꽤 익숙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넘겼다.
"크면 뭐 하겠소. 쓰질 않는데."
도미닉 경은 바지를 탁탁 털었다.
"저기, 저 좀 내려주실 수 있나요?"
성좌 아임 낫 리틀은 여전히 올가미에 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 마음이 맞았는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마침내 성좌를 보았다.
잠시 후, 성좌는 다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빼앗겼던 가차석 주머니도 다시 돌려받았다.
"고마워요.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성좌는 두 기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겉으로는 예의 바른 척했지만, 실제로 성좌의 속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세상에, 도미닉 경이 더블? 팬심이 더블?
도미닉 경의 열렬한 팬이라고 자부하는 성좌 아임 낫 리틀은 마치 팬 서비스를 받은 열혈팬처럼 행복해졌다.
성좌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두 기사를 자세히 비교해 보았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마치 남매처럼 닮았으나, 성격은 좀 달라 보였다.
기사답지만 짐승 같은 반전 매력의 도미닉 경.
짐승 같지만 기사다운 반전이 있는 도미니카 경.
이벤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분명히 이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본 사람은 자신이 처음이리라.
성좌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의 팬이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잡혔던 거지?"
도미니카 경이 말했다.
"잡혀 있었단 말이오?"
"그래. 저기 도적들이 돈을 빼앗고 도망가는걸 목격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기사의 명예를 실추할 뻔했어."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의문점을 해결해주었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 도적을 때리던 도미니카를 말리지 말 걸 그랬나라고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 아무튼 감사해요! 오늘 카드 팩에 원하는 카드가 추가되는 날이어서 가차석을 많이 들고 있었거든요."
소녀의 모습을 한 아임 낫 리틀은 순진한 척 감사를 표했다.
분명히 이 이야기, 방송에서 풀면 가차튜브 조회 수 수십 억 단위도 꿈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서.
"어디까지 가던 중이오?"
"그래. 혼자선 위험하잖아, 레이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그런 소녀를 걱정해 도와주려고 했다.
도미닉 경은 곧은 자세에서 허리를 굽히며 아임 낫 리틀을 내려다보았고, 도미니카 경은 가슴을 내밀며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며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옷 너머로 보이는 윤곽으로 보아, 드러난 것은 자신감만은 아니다.
"그, 그 죄송합니다! 혼자서 할 수 있어요!"
아임 낫 리틀은 두 배나 되는 팬심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도망치고 말았다.
도미닉 경이 손을 들어 소녀를 부르려고 했으나, 도미니카 경이 제지했다.
"여긴 페럴란트가 아니야. 잘못하다간 이상한 일에 엮일 수도 있다고. 뭐, 이미 이상한 일은 충분히 겪은 듯하지만."
도미니카 경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진절머리가 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벤트에서 보면 평행세계의 자신과 할 수 있는 이벤트 스테이지가 있다고 했소."
"아, 맞아. 그랬지. 까먹을 뻔했네. 당장 가자고. 얼마 전에 집을 샀더니 재화가 좀 부족하더라고. 재화를 넉넉히 줬으면 하는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비록 성격은 달랐으나, 원래 하나였던 탓인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둘은 골목을 빠져나가 이벤트 스테이지에 대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던 시선이 있었다.
"오빠가 아닌걸까?"
그 시선의 정체는 밴시 박사였다.
도미닉 경이 자기 오빠가 아닐까 고민하던 밴시 박사는 썬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도미닉 경이 알아채지 못할 거리에서 관찰을 시작했다.
중간에 가구점에서 부딪혀 넘어졌을 때는 완전히 들킨줄로만 알았으나, 다행히 정체를 들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뛰어가는 도미닉 경의 뒤를 따라온 밴시 박사는 정의감과 허당스러움에서 도미닉 경이 오빠일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도미니카 경을 보기 전에는.
"내게 언니는 없었는데."
밴시 박사는 혼란에 빠졌다. 도미닉 경과 똑 닮은, 남매로 추정되는 도미니카 경의 존재가 나타나자 밴시 박사가 쌓아 올린 가설은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 밴시 박사는 이벤트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연구에 매진하던 밴시 박사는,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이 신경 쓰이고 짜증 나 알람을 꺼버린 탓에 이벤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평행세계에서 또 하나의 나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상황은 남매가 오순도순 대화하는 장면으로 보였다.
밴시 박사는 형제가 오빠 하나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 것이다.
"오빠랑 닮은 사람일 뿐, 오빠가 아닌걸까?"
하지만 밴시 박사는 도미닉 경이 페럴란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도미닉 경이 든 깃발에 그려진 문양은 페럴란트의 것이었다.
고향이 같고, 심지어 외모도 비슷하며 가끔 나오는 습관까지 비슷한 타인이 있을 수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더더욱 밴시 박사를 혼란스럽게 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야겠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지나치게 머리를 굴려 뇌가 과부하가 일어나는 듯 지끈거렸다.
밴시 박사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리 생각해봤자 결론을 낼 수 없거나 잘못된 결론을 내릴 것으로 생각했다.
밴시 박사는 저 멀리 멀어져가기 시작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보았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려 블랙 그룹 비밀 연구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밴시 박사는 알지 못했다.
"누나가 아닌걸까?"
"내게 형은 없었는데."
그녀가 숨었던 전봇대와 정확히 대칭이 되는 지점에서, 그녀와 닮은 소년이 그녀와 똑같이 고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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