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60화]등장 연출은 중요합니다.
* * *
"뭐,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용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드 수가 적은 건 어떻게든 포장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지, 확률을 보고 날뛸 탐사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예전부터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있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성능은 좋은데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이 많아졌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이건 너무 숙이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땅을 파고들어 간다.
그런 이들은 충분한 수요가 있음에도 단지 자신감이 부족해 카드를 적게 찍고는 했다.
"자존감을 좀 키웠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
"아니, 아닐세. 이제 다음 절차로 넘어가지. 데이터를 뽑았을 때의 연출과 등장 대사를 찍으러 가자고."
용의 한탄에 도미닉 경은 안대를 낀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 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등장 대사와 연출은 아주 중요하지. 여기서 임팩트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이 더 자네를 기억하기 쉬울 걸세. 그건 자네의 가치를 올리는 일이지."
용은 책상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하늘에 떠오르며 책상을 넘어왔다.
"뒤 내용은 직접 해 보고 말하자고. 아무래도 자네는 설명보단 행동으로 알려 줘야 이해하는 듯싶으니."
도미닉 경은 동의의 뜻으로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차랜드의 의문점은 설명보단 행동으로 알아가는 것이 더 편했다.
용은 지상에서 3센치미터 정도 떨어진 상태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도미닉 경은 그런 용의 뒤를 따라갔다.
용은 몸을 신비한 몸짓으로 엄청난 기술을 쓸 것같이 유려하게 팔을 흔들더니 그저 문 하나를 열었다.
도미닉 경은 열린 문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 위엔 '베티 루드, 등장 연출가'라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아, 셴롱 씨. 오랜만인 것 같네요. 이번에 승진했다고 들었는데. 축하드려요. 무슨 일로?"
"승진이야 오래 일하면 당연히 해주는 거니 감흥은 없어. 이번에 가챠 풀에 새로운 자가 들어가게 되었네."
"아. 등장 연출이랑 대사 넣으러 오셨구나. 하긴, 여기 올 일이 그것밖에 없죠."
주황빛 붉은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앳된 얼굴, 그리고 두꺼운 안경.
빵모자와 트렌치 코트를 입은 여성은 히죽히죽 웃으며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렌즈가 얼마나 큰지 마치 대포를 양손으로 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뒤에 분이 새롭게 풀에 추가된 사람인가요? 어디 보자... 세상에! 도미닉 경이잖아요! 도미닉 경은 저번에 풀에 추가된 줄 았았는데!"
"그건 불법 팩이었어."
용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미닉 경을 사칭한 놈이 저지른 짓이지.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엉성하게 해서 지금은 가차랜드 지하에서 석탄이나 캐고 있다더군."
아마 다음 글로벌 서버 크리스마스 이벤트엔 석탄이 잔뜩 나올 거야라고 투덜거린 용이 멍하게 방을 구경하던 도미닉 경을 불렀다.
"이제 여기에 서게. 긴장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멋진 등장 연출이 나올 거야. 베티 루드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최고의 연출가거든."
"그래요. 천장의 얼룩을 세다 보면 금방 끝날... 아. 이게 아니죠. 셴롱 씨, 혹시 이거 성인용 게임 풀에 들어가나요?"
"아쉽게도 전체 이용가일세. 도미닉 경의 캐릭터성은 고결한 기사라... 잠깐. 고결한 기사. 흠. 성인용 풀에 들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용은 도미닉 경의 컨셉이 나름 어울릴 것 같다며 나중에 추가 팩이 나올 땐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성인과 전체 이용가라.
도미닉 경은 심의 등급에 대해 알 리가 없었기에 그저 그런 것이 있나보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등장 연출은 아주 심플해요. 그리고 그 심플함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하죠. 괜히 등장 연출이 5초의 마법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니까요?"
"5초의 마법?"
"아무리 등장 연출이 길어도 5초. 성격 급한 이들에겐 그마저도 긴 시간이죠."
도미닉 경은 도대체 5초 만에 자기소개를 끝낼 수 있는지 의문이었으나, 연출가는 그 마음을 아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가차 풀 등록이 처음이라고 하셨... 아, 하긴 등장 연출을 찍는 대부분은 등록이 처음이구나. 아무튼 등장 연출은 아주 심플해요. 모든 정보를 넣는 게 아니라 당신이 어떤 컨셉인지, 어떤 성격인지 보여주는 것이죠. 컨셉을 보고 뽑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환장... 아니,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키우겠노라고 마음먹어요. 성능이야 어차피 뽑으면 카드에 기재되어 있으니 천천히 읽어도 되구요."
"난 잠깐 나가 있겠네. 말이 길어서 그렇지 금방 끝날걸세."
용은 점점 말이 길어지기 시작한 연출가를 질린 눈으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갔다.
도미닉 경이 보기엔 둘 다 수다쟁이였으나 연출가의 말이 이어지면서 그 말을 꺼낼 타이밍을 놓쳤다.
"진짜 별거 없어요. 포즈 하나만 취하고 대사 하나만 치면 끝. 나머진 그냥 연출로 때우죠. 가장 싸고 효과적인 방식이에요."
연출가가 손뼉을 치자 방 안의 모습이 바뀌었다.
녹색 천으로 한 면을 가득 채운 무대를 수십 대의 카메라가 채운 방.
도미닉 경이 작지만 신기한 장소에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연출가가 다가와 도미닉 경의 옷자락에 무언가를 달기 시작했다.
"무선 마이크예요. 당신이 대사를 치면 녹음이 되는 거죠. 최대한 멋진 자세와 멋진 대사를 치면 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도미닉 경은 따가울 정도로 쏘아대는 연출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이해하진 못했으나 자세와 대사, 두 가지만 기억했다.
"옷이 좀 그런데 더 멋진 옷은 없나요? 낡고 거친 베테랑의 느낌도 좋지만, 뭔가 에이스 같으면서 엘리트 적인 그런 느낌?"
도미닉 경은 현재 기본 의상을 입고 있었다. 항상 입고 다니는 그 기사복이었다.
"이건 어떻소."
연출가의 말을 들은 도미닉 경이 의상을 변경했다.
거금을 주고 산 화려한 기사 예복.
"좋네요. 이런 게 또 잘 먹히는 법이죠."
연출가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금색 끈들을 한 번 매만져 보곤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 벌써 어떻게 연출해야 할지 영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단 정면으로 서서 방패를 지팡이처럼 딛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도미닉 경은 연출가의 말에 따랐다.
정면을 바라보며 노려보듯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떴다.
방패를 앞에 두고 양손을 그 위에 올려 두어 기댄 느낌으로 연출가를 응시하자 연출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약간 부족한 것 같은데... 아, 그래. 혹시 깃발을 소환하실 수 있나요? 배경이 조금 밋밋한 것 같아서요."
도미닉 경은 요청대로 깃발을 꺼내 들었다.
"그 뒤에 꽂아보세요. 네. 그쪽. 잠시만요... 네. 선풍기 켰으니까 자연스럽게 휘날릴 거예요."
도미닉 경이 자세를 잡자 등 뒤에 페럴란트의 문장이 그려진 갈색 깃발이 휘날렸다.
나름 멋진 컷이었으나 연출가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이번엔 대사를 치면서 한 번 더 찍어볼게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대사를 쳐보세요."
"그... 말처럼 쉽지가 않소."
도미닉 경은 당황스러웠다.
전장에서야 머리에 피가 쏠리면 아무 말이나 나오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려니 쑥스러웠다.
도미닉 경의 쑥스러움이 당연하다는 듯 연출가가 말했다.
"진짜 아무 말이나 해도 좋아요. 좌우명이나 배고프다는 헛소리도 좋고, 그냥 웃거나 침묵해도 다 되거든요. 그저 당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거라서."
"그렇다면야."
도미닉 경은 다시 사진기를 들이미는 연출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소. 행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좋아요! 다음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건네는 것처럼 인사나 안부를 해 보세요."
"당신이 나의 주인인가?"
"아, 그건 이미 저작권 등록이 되어 있어요. 다른 것으로 한 번 더!"
"나의 검은 당신의 것이오."
"그... 것도 이미 등록된 거예요. 다른 거 하나!"
"페럴란트를 위하여!"
"좋네요. 일단 킵해둡시다! 다른 대사들도 쳐보시겠어요? 이번엔 약간 비스듬히 서서 깃발을 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본다는 느낌으로! 잘한다!"
도미닉 경은 처음엔 연출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으나 연출가는 칭찬과 농담으로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도미닉 경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가차랜드에 도착한 이후 여러 가지를 겪었지만 이번에 알게 된 '연출'은 손에 꼽을 정도로 재밌는 것이었다.
점점 자신감이 붙은 도미닉 경은 시켜지 않아도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자세들을 취했다.
"그 자세 좋아요! 그래요, 당당한 게 보기 좋습니다! 대사 잊지 마세요!"
"반갑소.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찰칵. 하며 사진이 찍혔다.
도미닉 경은 이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자, 다 되었습니다. 한 번 보실래요?"
촬영과 녹음이 끝난 후, 도미닉 경은 자기 등장 연출을 보게 되었다.
갈색과 연갈색 선이 나란히 날아가며 확대된 화면이 암전되더니, 위에 '행복해서 죽을 것 같소. 행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라는 문구와 함께 녹음된 도미닉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꽤 신기한 경험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부끄러워 손이 오글거리는 느낌이었다.
문구가 사라지자 설원을 배경으로 한 요새가 스쳐 지나가며 슬쩍슬쩍 도미닉 경의 일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안대를 클로즈업 한 상태로 감질나게 보여주던 컷씬이 확대되며 도미닉 경이 방패에 기댄 정면 샷이 나타났다.
'반갑소.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눈이 날리는 설원의 요새 앞에 선 도미닉 경의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진은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이 라이브 2D라고 한 그것인가?
도미닉 경은 흥미롭게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마음에 드시나요?"
"물론이오."
도미닉 경은 상상 이상으로 멋지게 나온 영상을 다시 한번 돌려보며 말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참 잘생겼군."
도미닉 경이 농담처럼 뱉은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만큼 눈앞의 영상은 멋진 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