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3화]막간
* * *
가차랜드의 외곽에 위치한 산맥, 닌자들의 마을에 있는 랜드마크 히메사이고 성.
본래 이 성의 이름은 운류 성이었으나 당대 가주가 멋대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히메사이고 성의 은밀한 곳에는 최고의 닌자들이 수련하는 훈련장이 있었다.
그리고 쿠노이치 히메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달래기 위해 본가의 훈련장에서 폭포수를 맞으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하아..."
도대체 이 마음은 뭘까.
여전히 히메는 도미닉 경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실 이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해적 스킨을 낀 도미닉 경을 보고 경기를 일으킨 감각이 그저 도미닉 경을 생각할 때마다 다시 떠오른 것이지만,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아가씨인 히메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히메는 자기 감정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않아 속으로 앓는 성격이었고, 이런 성격의 특성상 마음속에 담아둔 무언가가 제멋대로 살이 붙고 뒤틀리는 경향이 있었다.
히메는 수련에 집중하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도미닉 경이 떠올랐다.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구나."
그때, 무사가 나타났다!
"아버지."
히메는 무사의 등장에 수련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이 무사의 이름은 운류 무사시.
현 당주이자 세계 최고의 쿠노이치인 어머니를 컨트롤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무사였다.
"예의는 되었다. 그나저나 우리 딸이 이렇게나 동요하다니, 이런 너를 여태껏 본 적이 없구나."
무사는 살아 있는 갑주처럼 보였다.
귀신을 쫓는 붉은 안료를 발라 은은하고 신비한 빛을 내뿜는 전신갑옷과 뿔처럼 된 장식들이 달린 투구, 그리고 붉은 안료를 먹인 복숭아 나무를 깎아 만든 주술적인 악귀 가면까지.
허리춤에는 2미터는 족히 될 법한 칼이 세 개나 있었는데, 본체가 얼마나 큰지 그 큰 칼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일인지 이 아비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히메는 도미닉 경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말하길 꺼렸으나 이렇게 속으로 앓으며 수련에 방해가 되는 것보단 아버지에게 말해 상담을 받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무사이자, 자신보다 더 오랜 세월을 겪은 베테랑이었으니까.
"그것이..."
히메는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하게 고했다.
해적 도미닉 경을 만난 이야기, 이후 도미닉 경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이야기, 그를 보면 자꾸 심장이 뛴다는 이야기...
히메의 이야기를 듣던 당주 운류 무사시는 히메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러고도 네가 운류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째서 내게 미리 이르지 않았더냐!"
히메는 움찔하며 목을 움츠렸다.
"네가 혼자 살겠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그런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누군가가 신경 쓰인다?"
분명히 아버지에게 혼나리라 생각했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야! 드디어 내 딸이 사랑을 배웠구나."
그러나 돌아온 것은, 감격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래. 너도 사랑을 알 때가 되었지. 누군가를 생각만 해도 떨리고, 보기만 해도 심장이 아리고,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움찔거리게 된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사실, 운류 무사시는 사랑 예찬론자였다.
세상에 사랑이 가득해야 더 나은 세상이 된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뜻밖에 이 무시무시한 무사는 극렬한 로맨티스트였다.
"혹시 잠이 들기 전,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더냐."
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보이지 않아도 마치 옆에 있는 듯 그런 느낌이 들지 않더냐."
히메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사실 그런 적은 없었으나, 아버지의 말에 감화된 히메는 그랬던 것 같다고 스스로 착각한 것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세상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힘이지."
"사랑..."
히메는 아버지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과연 아버지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이 감정이 사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메는 내친김에 해답을 물어보았다.
운류 무사시가 껄껄대며 웃자 악귀 가면이 들썩거렸다.
"쟁취해야지. 사랑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보아라. 내가 그 증거지 않느냐."
"아."
그랬다.
운류 무사시는 사실 삼류 무사였으나, 전대 당주의 외동딸인 아내를 보고 반해 계속해서 구혼했다.
전대 당주는 대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기에 그를 데릴사위로 들여 왔던 것이다.
닌자 마을에서 운류 무사시와 쿠노이치 운류 이치코의 로맨스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쟁취한다라..."
그러나 히메는 자신이 없었다.
자신은 도미닉 경의 앞에 서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고작 몇 걸음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것이다.
주입식 닌자 교육의 폐해.
결국, 히메는 아버지의 현명함을 다시 한번 빌리기로 하였다.
"쟁취하기 위해서, 제가 어떤 태도로 그에게 다가가면 좋겠습니까?"
현명한 운류 무사시가 말했다.
"여우가 되는 것이다."
"여우요?"
"그래. 여우. 퐉스가 되는 것이 최고란다."
운류 무사시의 말은 비유적이었으나, 히메는 그 말을 그대로 마음에 새겼다.
현명한 아버지의 말이었으니 정답이라고 여긴 것이다.
"뭐하고 계시나요, 여보?"
"아, 이치코."
운무가 피어오르고 폭포수 위에 무지개가 뜬 신비한 훈련장에 또 한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히메의 어머니, 운류 이치코였다.
"우리 딸이 사랑을 알았나 보오. 그래서 내가 조언을 하는 중이었소."
"어머나."
히메와 똑 닮았으나 어딘가 더 성숙한 매력이 있는 이치코는 기모노 자락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버지께서 여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여우?"
"있잖소. 내가 당신에게 했던 짓."
"아."
이치코는 무사시가 청혼하며 했던 행동들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이게 뭔가하고 생각하다가도, 나중엔 참으로 귀엽다고 생각했지요. 그게 여우짓이라면 확실히 효과가 있겠네요."
히메는 어머니의 보증을 통해 아버지의 말을 더더욱 가슴 깊이 새겼다.
여우짓. 여우가 되어야 한다라.
"그나저나 여긴 왜 왔소? 날이 춥소. 들어가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담소를 나눕시다."
"연락이 왔어요. 아무래도 파견나간 집사가 난항을 겪는 모양이더군요."
이치코는 기모노의 옷자락에서 비둘기를 꺼냈다.
비둘기의 다리에는 붉은색 종이가 묶여 있었는데, 이는 닌자 세계에서 위급한 상황을 뜻했다.
무사시는 비둘기 다리의 종이를 풀어 그 내용을 읽었다. 그의 갑주가 절그럭거리며 움직였다.
비밀문자로 가득한 편지를 끝까지 읽은 무사시가 편지를 구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원이 필요한 모양이구려."
"어쩌죠? 지금 다들 농번기라 일손이 부족한데..."
그렇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닌자 마을에서는 지금 한창 모내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산맥 위에 있어 계단식 영농을 채택했기에 사람들은 바쁘게 산을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그때, 히메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어요."
히메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녀도 쿠노이치, 즉 닌자의 일원이었다.
또한 이미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의 정체를 알고, 그 대처법도 알아냈으니 더 이상 히메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흠..."
"히메도 어엿한 닌자잖아요. 게다가 보아하니 위험보다는 급하다는 뜻으로 보였는데 말이죠."
"으음..."
"이런 임무도 수행해야 진정한 쿠노이치랍니다. 무사인 당신이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우리 딸이 아니라 쿠노이치 히메에게 믿음을 주는 건 어떨까요?"
이치코는 무사시를 설득했다.
무사시는 고민하더니, 이내 임무가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쿠노이치 히메는 들으라."
무사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히메에게 조언하던 목소리가 부드럽고 강직한 소리였다면, 지금은 위엄 넘치고 힘이 넘치는 소리였다.
"지금부터 너는 아래로 내려가 집사를 찾아가라. 그리고 집사를 도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도록. 닌자는 잘 살아남는 자라는 뜻이니, 꼭 무사히 돌아오도록 해라."
무사시의 말은 강인했으나 마지막 말만큼은 아버지로 돌아와 부드럽게 말했다.
"꼭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히메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작은 흙먼지만이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으음..."
"별일 없을 거예요. 애초에 집사와 함께니 위험할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올 거구요."
무사시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치고는 그런 무사시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사실 그다지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으나, 딸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은 다 똑같은 법이다.
...
빠르게 닌자마을에서 포탈을 타고 가차랜드 시내로 내려온 히메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았다.
닌자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향을 따라가면 집사가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바람에 실려 온 미약한 향을 감지하고 자리를 옮겼다.
건물의 지붕을 박차고 날아다니며 집사의 흔적을 쫒자, 마침내 길 건너편에 있는 유료 주차장에 닌자 스쿠터를 주차하는 집사가 보였다.
히메는 건물의 가장자리를 박차고 가볍게 땅에 착지했다.
"집사 상, 긴급하다는 말을 듣고 도우러 왔어요."
"히메 님! 히메 님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집사는 흘끗 요금표를 지켜보았다.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이면 30분 요금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주면 되죠?"
히메는 의욕이 넘쳐 집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집사는 히메를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메고는 이렇게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히메 님. 빨리 가려면 시너지가 필요했습니다."
당혹스러운 히메는 잠깐 발버둥을 쳤으나, 집사는 빠른 속도로 짐과 히메를 들고 달렸다.
닌자 2인의 시너지는 이동 속도 15% 증가였다.
* * *